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라인하르트 1권(14화)
6장 한음지기를 되찾다(3)


프로시안 남작은 몸을 울리는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하지만 왠 줄은 몰라도 입에서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결국 표정만 와락 구겨서는, 자신의 몸을 짓이기는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했다.
몸속에 있던 한기가 마치 자아라도 가지고 있는 양 새로운 마나에 대항하여 맞붙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 기운은 작고 작았지만 갈수록 힘이 더해 갔다.
어느새 그 기운들은 마나 보유고(단전)까지 치고 들어와 한기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기들이 주춤하기 시작하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마나가 단전을 뒤덮었다. 집을 잃은 한기들이 뿔뿔이 흩어져 몸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곧바로 마나들 또한 나눠져 몸속에서는 마나와 한기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남작은 자신의 마나로도 충격을 가하지 못한 이 한기들이 도망친다는 사실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통쾌함에 몸부림쳤다.
‘한기들이…… 눈 녹듯 사라지다니.’
남작이 한참 놀라움을 표출하고 있을 때 청년, 아니 청령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단전을 점령하는 것까지는 쉬웠다. 그 기세로 만상귀일신공의 기운으로 몰아붙이니 제아무리 지독한 한기라도 몸부림을 치면서 도망을 갔다. 그러더니 놈들이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반격을 가해 오는 것이다.
‘이거 제압하기가 쉽지 않겠는걸.’
일단 이 기운을 제압해서 단전으로 끌어들여야 내공으로 한음지기가 될 수 있었다. 청령은 마치 처음 빙정을 먹었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며 온몸으로 한기의 반격을 받아 냈다. 청령이 미간을 찌푸렸다.
‘되도록이면 빨리 제압해야겠어. 내공이 얼마 남지 않았군.’
한기가 뿔뿔이 흩어졌으니, 따로따로 모아서 단전으로 이끌어야 했다. 물론 그 단전은 청령의 단전이다.
왼손이 한기를 빨아들이고 오른손으로 한기를 제압해 나간다. 잃어버렸던 한음지기를 되찾자 청령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빨아들인 내공의 양만 해도 족히 이십 년 내공을 상회했다.
청령은 남작의 몸에 있는 한기 중에서 반 정도를 내공으로 만들었다. 그 양이 삼십 년을 조금 넘었다.
“그래도 정말 대단하군. 일갑자의 한기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청령이 계속해서 작업하려던 순간, 그는 두 손을 떼고 숨을 죽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 발소리만 들어도 몇은 되어 보였다.
청령은 숨을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스윽 둘러보고는 얼른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때맞춰 덜컥 열리는 문소리에, 그는 숨을 죽인 채 청명심법으로 주위의 기운을 갈무리했다.
프로시안 남작령에 하나밖에 없는 기사단의 이름은 에이전트이다. 삼십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몬스터의 땅인 장안의 숲을 근처에 두고 있어 실력들이 제법 대단한 자들이었다.
기사들 다섯 명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청령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차, 남작에게 점혈해 놓은 것을 풀지 않았다……!’

에이전트 기사단의 단장인 그로퍼는 냉철하고 충성심이 강한 노기사였다. 그는 방금 전 영주를 지키던 병사들이 쓰러졌다는 보고에 허둥지둥 침실로 달려왔다.
때마침 세리아도 부관에게 보고를 듣고 병사들 열 명을 동원해 본관 출입문을 봉쇄하고 곧바로 달려왔다.
“어서 신관을 불러요! 아버지의 상태가 어떤지 봐야겠어.”
세리아의 외침에 기사 하나가 달려 나갔다. 세리아가 곧바로 의자에 앉아 남작의 코에 손가락을 대었다.
“휴우. 다행히 몸은 괜찮으세요.”
침실을 지키는 호위병사 둘이 기절해 있었다는 보고에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는 아버지의 안위를 깨닫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기사들도 세리아의 말 한마디에 화색을 띠었다.
아니, 화색을 띠는 것은 오히려 남작이었다. 온몸에 일갑자나 되는 한기를 품고 살았던 그는 자신의 몸이 호전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남작은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을 속으로 삼켰다. 아까부터 말을 하려고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것은 아혈을 점혈당했기 때문이었다. 마혈까지 점혈당한 그는 손가락 하나 맘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덜컹!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기사의 뒤로 신관이 보였다. 프로시안 영지에 둘밖에 없는 신관이었다. 세리아는 오랜만에 만난 듯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아, 마리엔 님. 두 달 만이죠? 정정하시네요.”
하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백발의 노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껄껄, 이놈! 고작 두 달 동안 노부가 여신님의 곁으로 갈 줄 알았더냐? 생명의 여신 플로아 님께서는 나에게 아직 사명감이 있다고 올라오지 말라고 하시는구나.”
신관의 사회적인 계급은 남작과 맞먹는다. 설사 자작 이상 급의 귀족들이라고 해도 신관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마리엔이라 불린 노신관은 줄곧 어렸을 때부터 세리아를 보았기 때문에 마치 손녀를 만난 듯이 대했다.
“아, 어서요. 할아버지. 얼른 아버지 상태를 봐 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녀의 재촉에 마리엔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리엔이 갑자기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남작의 몸이 하얗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 강렬한 빛에 팔로 눈을 가린 채 실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헛, 이 기운은!’
신성력의 기운에 반응한 것은 청령이었다.
낯설지 않은 이 기운에, 청령의 머릿속에 용아천에서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리바이브 리턴?’
용아천에서 노인장은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자신은 이 세계에 와 있었다.
죽을 것 같은 순간에 느낀 그 이상한 기운은 현재 남작 옆에 서 있는 노인의 기운과 유사했다.
‘같은 종류인가……? 그랬구나! 노인장의 기는 이 유라시아 대륙의 기운이었어.’
청령이 그렇게 짐작하고 있을 때 마리엔이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를 닦고서는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상황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몸에 가득했던 한기의 기세가 누그러졌구나.”
“예에?”
“헛! 마리엔 님, 그게 정녕 사실입니까?”
기사들과 세리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나 잠시 후 마리엔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아직도 치료가 완전히는 불가능하다.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플래임 플라워가 있지 않은 이상은 확실한 치료가 불가능할 게야.”
그만 해도 어디인가.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좋은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마리엔 님.”
“아니다. 언제든지 이 노부를 불러 주거라. 심심하면 신전에 놀러 와도 좋단다. 고지식한 페그 녀석이랑 있으려니 여간 심심해서 말이야. 껄껄껄.”
페그는 마리엔의 제자였다. 다섯 살에 우연히 신전에 찾아왔다가 마리엔의 눈에 띄어 사제가 되었는데, 여신 플로아에 대한 믿음과 재능이 매우 뛰어난 자였다.
“그런데 마리엔 님, 아버지가 평소와는 다르게 말을 한 마디도 안 하시는데 왜 그러신 거죠?”
“아무래도 한기가 누그러지면서 생긴 일시적인 현상인 것 같구나.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야. 그건 그렇고, 그 침입자라는 놈이 누군지는 알아낸 게냐?”
세리아가 고개를 힐끔 돌리며 기사들을 쳐다보자, 기사들이 저마다 고개를 저었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더니 세리아에게 본관을 봉쇄하라는 명을 받은 병사가 들어왔다.
“아가씨! 본관 근처에서 수상한 자를 발견했습니다.”
“뭐라구요? 알았어요. 지금 당장 그자를 포박하세요. 마리엔 님과 그로퍼 경은 저를 따라오시구요. 욘지 경은 병사들에게 이 침실을 지키게 하세요.”
“알았습니다.”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인 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두 방을 나섰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청령은 침대 밑에서 기어 나오더니 몸을 쭈욱 폈다.
“에구구, 정말 위험했다. 발각될 뻔했어.”
청령은 남작의 아혈과 마혈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남작이 신기한 듯이 청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누구인가? 도대체 누구기에 나를 도와줬는지 모르겠군.”
청령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도와주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순수 한음지기를 얻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따님인 세리아 소저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간이 난다면 언제든 찾아와 주겠나? 아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는가?”
청령은 살짝 고심했다. 만약 남작이 정말 한음지체를 가졌다면 그것을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음지체는 끊임없이 한기를 내기 때문이다. 마르지 않는 우물을 비워 내려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남자의 몸으로 한음지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남작은 다른 병에 걸렸다고 봐야 했다.
“매일 이 시간에 한 번씩 들르겠습니다. 저도 장담은 하지 못합니다.”
청령은 그 말과 함께 창문을 열고 그곳으로 뛰어내렸다. 프로시안 남작은 청령을 부르려다가 깜짝 놀랐다.
“자, 잠깐! 여기는 3층……!”
청령은 사뿐히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반 갑자의 내공을 보유하게 된 청령에게 3층 정도의 높이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아직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한음지기를 확인하고는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좋아.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내 내공으로 완벽히 흡수해야겠어.”



7장 프로시안 남작령에서의 생활(1)


“이거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난 그대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정말 아니라니까!”
“그것은 조사해 보면 될 것입니다. 잠시만 따라오십시오. 아무런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레이 기사단의 웨일즈는 평민 출신의 기사였다. 검술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정식으로 헤일론 백작가의 기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신분 상승을 꾀하고 헤일론 백작가의 기사가 된 대부분의 귀족가 차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신분이었다. 때문에 그들과는 곧잘 어울리지 못했다.
웨일즈는 당황한 기색으로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아홉 명의 병사들을 보고 양손을 위로 올렸다.
솔직히 말해서 잘 훈련된 병사 아홉 명을 상대로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 빌어먹을 창들 좀 내려놔. 그 날에 찔리면 얼마나 아픈 줄 알아?”
창날의 날카로운 부분을 피해 몸을 흠칫 떠는 웨일즈의 말에 병사가 담담히 말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따라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 제기랄. 따라가 준다, 가 줘!”
그의 막말에 경계를 늦추지 않은 병사들이 일단 그를 포박했다. 웨일즈가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병사에게 물었다.
“뭘 묻고 싶은 거야? 그리고 또 어디를 가는 건데?”
“그건 세리아 아가씨께서 물으실 거요. 지금 경께서는 아가씨에게 가는 길이오.”
병사의 무심한 대답에 표정을 와락 구긴 웨일즈가 투덜거리며, 앞에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보았다.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멈춘 채, 제일 앞에 있는 세리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헉! 헉! 이자인가요?”
“그렇습니다, 아가씨.”
세리아의 질문에 웨일즈를 포박했던 병사가 냉큼 대답했다.
쉬지 않고 달려온 모양인지 세리아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경은 그레이 기사단이시죠? 실례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서(Sir) 웨일즈요. 근데 이거 참, 밧줄 좀 풀어 주지 않겠소? 팔목이 뻐근해서 죽겠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챙!
그로퍼는 세리아를 대하는 웨일즈의 태도가 불량하다고 생각되자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발도술에 깜짝 놀란 웨일즈가 움찔거렸다.
“아, 거 되게 성급하시네. 농담이요, 농담. 산 사람이 농담도 하면 안 되나? 그건 그렇고, 병사들에게 들었는데 묻고 싶은 게 뭐요?”
“음, 웨일즈 경께서는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나요?”
“그냥 놀았소. 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헝겊으로 검을 닦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숨쉬기 운동 좀 했수다.”
그로퍼의 검이 허공을 내질렀다.
웨일즈는 검을 피하기 위해 한 발자국 물러섰다.
“제, 제기랄. 이게 뭔 짓이오! 죽이려고 환장했수? 당신들도 평민 기피증이라고 평민들만 보면 죽이고 싶수?”
귀족들 중에 가끔 있었다. 워낙 부족한 것 없이 살다 보니, 평민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귀족들이 많았다. 그들은 평민들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겼다. 그래서 생긴 병이 평민 기피증.
평민들을 보는 것만도 구역질이 나는 귀족만의 병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런 귀족들이 웨일즈의 얼굴만 보고도 평민이라는 것을 알고 죽기 살기로 덤빈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세리아 일행은 오히려 몰랐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로퍼 경,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게. 이자의 말이 거짓 같지는 않아 보이네.”
마리엔은 일단 다혈질인 그로퍼를 말려 보고자 그들 사이로 다가갔다. 마리엔의 말에 그로퍼도 화기를 한껏 누그러뜨렸다.
“그래, 맞아요. 일단 웨일즈 경의 포박을 풀어 줘라. 잠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예!”
세리아의 말에 병사들이 얼른 포박을 풀었다. 웨일즈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더니 남작가의 침통한 분위기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이 빌어먹을 분위기는 뭐요? 마치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나에게 지금까지 어디 있었냐고 묻는 걸 보니 그레이 기사단의 그 떨거지 놈들이 무슨 사고라도 쳤소? 에이, 이래서 귀족 놈들은 앞에서 고상한 척은 다 해도 뒤에서는 사고만 친다니까.”
마치 기사들과 세리아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하는 웨일즈였다. 모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웨일즈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귀족 열 명 중에 제대로 된 이가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잘들 지내슈. 인연이 있으면 또 봅시다.”
웨일즈는 등을 뒤로 돌리더니 자신이 있었던 곳으로 터벅터벅 돌아갔다.
“이대로 내버려 두실 참입니까?”
“그러면 어쩌겠어요. 생사람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로퍼는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다.
“아직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후훗. 걱정 말아요. 근래 저 웨일즈 경처럼 눈이 맑은 사람은 두 번째로군요. 그 사람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요. 자! 그럼 우리도 돌아가요. 침입자는 아직 이 근방에 있을 것 같으니 그로퍼 경께서 수고 좀 해 주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대만 믿겠어요.”
그들은 하루 동안 침입자를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결국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에이전트 기사단이 그레이 기사단을 믿지 못하는 분위기로 이어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