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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15화)
7장 프로시안 남작령에서의 생활(2)
삼십 년 내공에 해당하는 한기를 얻었다고 해서 전부 다 청령의 내공이 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청령의 새로운 몸에 적응하기 위해 단전에서 둥그런 모양으로 뭉쳐 방어하고 있었다. 청령은 꽤나 견고한 그들의 방어를 만상귀일신공을 일으켜 녹여 냈다. 처음에는 오 년 내공, 그리고 이제는 서서히 이십 년 내공을 한기로 받아들였다. 청령은 이십 년 내공이 한음지기가 있던 자리를 꿰차자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약 한 시진 정도를 더욱 정진하자 어느덧 삼십 년에 해당하는 한기를 얻을 수 있었다.
“하하, 생각지도 못한 기연이다. 한기로만 절정의 경지에 올랐구나. 이거 잘만 하면 빠른 시일 내에 초절정 때의 내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청령이 그렇게 혼자 떠들고 있을 때 레나가 들어왔다. 새침한 표정으로 청령을 노려보는 레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웃는 소리가 바깥에까지 들려요.”
청령은 히죽 웃었다. 계속해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후후. 아무것도 아니다. 아! 혹시 레나는 심법 같은 거 배울 생각 없어?”
“심법이요? 심법이 뭔데요?”
아까 기사들에게 당하던 것을 생각하니 꽤나 마음이 아팠다. 도대체 계급이 뭐기에 사람을 이리도 힘들게 한단 말인가.
레나에게 신공절학 같은 것은 가르쳐 줄 수 없어도, 중원에 떠도는 삼재심법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었다. 삼재심법은 진전이 더디지만 다른 심법과 같이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여자에게 제일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가령 피부가 좋아진다거나, 무병장수하게 된다거나, 엄청난 동안이 된다거나…….”
실제로 청령은 은은하게 풍기는 먹향에 조금 어울리지 않는, 차갑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표정이 차가운 것은 만상귀일신공의 영향이 미쳤기 때문이다. 도가 계열인 청성파는 살수문파 때문에 많이 유행을 타 상당 부분 무공들이 바뀌었다.
“정말요? 배울래요. 꼭 배울 거예요.”
청령의 얼굴을 세심하게 쳐다본 레나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청령은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마치 귀족가의 자제 같았다.
“자, 이쪽으로 와서 이런 자세로 앉아.”
삼재심법은 대성하는 것이 쉬웠다. 꾸준히 십 년만 수련해도 십이성에 오를 수 있었다. 중원에서 삼재심법으로 일갑자 모으기는 평생 해도 부족하지만, 유라시아 대륙 같은 경우는 삼재심법이 신공절학이나 다름없었다. 확실히 유라시아 대륙에는 명상은 있지만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고, 심법 같은 것은 더더욱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윽! 오라버니, 이거 정말 효과 있는 것 맞아요?”
“그럼. 걱정 마.”
가부좌를 처음 틀어 본 레나가 앓는 소리를 해 댔다. 레나는 청령이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대로 따랐다.
‘아, 예뻐지기는 정말 힘들어.’
청령은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차례로 호흡법을 가르쳤다. 일단 천(天)의 기운을 담고, 지(地)의 기운을 뱉어 내 인(人)에 담아 두었다.
레나는 처음엔 굉장히 어설펐지만 하면 할수록 이 자세가 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일각 정도 지났을 때,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포착되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배 아랫부분에서 동전만 한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자, 이제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두자. 너무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거든.”
청령의 말에 레나가 뭔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에 15분, 많게는 30분 정도 하는 게 좋아.”
무조건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기가 몸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족히 한 달간은 일각에서 이각 정도면 충분했다.
“아! 그리고 그 비법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면 안 된다.”
“헤헷, 당연하잖아요. 예뻐지는 비법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바보는 이 세상에 없다구요.”
“하긴, 그런가? 그럼 내일 보자. 내일 곧바로 서재로 향할 생각이니까 12시쯤에 점심 차려서 오도록 해.”
“예, 꼭 시간 맞춰서 갈게요.”
레나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한두 번씩은 꼭 부탁을 잊곤 했다. 레나가 12시를 계속 뇌까리며 방을 나서자 청령은 곧바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빌려만 놓고 본 적이 없는 책이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라인하르트 황족.’
청령은 책을 펼쳤다.
유라시아 대륙력 3765년에 일어난 일 중 제일 충격적인 사건은 당시 대륙 40퍼센트의 땅을 거머쥐고 있던 대제국 라인하르트의 멸망이다. 세간에는 당시 고위 귀족들이 프라스 제국과 그 속국에 해당되는 왕국들에 나라를 팔아먹음으로써 멸망했다는 말이 돌았는데 그 설이 제일 유력하고, 자진 붕괴했다는 설도 있다.
초유의 관심사인 라인하르트 대제국 황족들은 추격꾼들의 공격을 받아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역사상에서 여신의 축복을 받은 피를 가진 이들은 대륙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 나온 내용은 모두 라인하르트의 역사와 여신의 축복에 대한 설명들이었다. 여신의 축복은 남자에게는 한없는 카리스마를, 여인들에게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게 한다는 것이다.
“3765년이라면 이십 년 전이로군.”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이다. 청령은 이 책을 보며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꼈다.
청령은 그 후로 한 시간을 독서로 때운 후에 침대에 누웠다.
평소보다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었다. 한기 때문에 순간 절정에 올라 버렸기 때문일까? 청령은 눈을 꼭 감고 몸을 뒤척이다 잠에 들었다.
그곳은 커다란 동굴이었다. 바닥이 금으로 깔리고 천장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동굴의 주인은 천오백 년 전부터 그곳에 레어를 틀어 온 골드드래곤 알케미온이었다.
골드드래곤은 레드드래곤처럼 흉폭하기보다는 현명하며, 힘에서도 드래곤 중에서 수위를 차지할 정도다.
곳곳이 라이트 마법으로 밝혀져 있는 알케미온의 레어에는 여느 때와 달리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노인 하나가 있었다.
알케미온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이 세상에서 추적자들의 발길을 따돌릴 수 있는 곳 말인가?”
노인이 두려운 눈빛을 띠고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이분은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황태자십니다. 이분이 자랄 때까지만이라도 숨을 수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드래곤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곳이 있을 것 같은가? 아마 있다면 드래곤의 레어뿐이겠지. 하나 아무리 나라고 해도 나 외에 다른 종족이 머무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또한, 내가 왜 너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지 모르겠군. 라인하르트 제국의 황태자란 것이 흥미롭기는 하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고서에는 초대 황제께서 위대하신 알케미온 님이 유희를 나오셨을 당시 드래곤인 것이 발각되어 레어로 돌아온 적이 있으시다고 전하셨습니다. 그 당시 알케미온 님은 그동안의 유희의 대가로 초대 폐하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드래곤은 유희 중에는 절대 자신이 드래곤인 것이 발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발각되었을 경우 신의 명에 따라 유희는 전면 취소되고, 곧바로 레어로 돌아와 오백 년 이상을 근신해야만 했다.
“음…….”
그때를 회상하던 알케미온이 고민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한 기억이 났다. 따지고 보면 그때 알케미온이 유희를 나와 초대 황제의 부하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절대 라인하르트 제국이 세워졌을 리가 없었다.
“좋다. 그 소원이라면 가능하지. 나 또한 라인하르트 제국이 멸망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노인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는 상관이 없다더니…….’
알케미온이 손을 위로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앞에 마법진을 그렸다.
“삼백 년 전에 완성한 차원이동 마법진이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그 어느 세계가 나올지 모른다. 하나! 확실히 해야 될 것은 너는 그 아이의 일에 일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명심하겠느냐?”
차원이동이란 것은 불법입국이나 다름없는 행위다. 그 세계를 관장하는 신의 눈을 속여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차원이동을 겪은 자들이 서로 접촉할 경우, 일부러 접촉을 가한 쪽은 죽어서 그 영혼이 구천을 떠돌고 사후세계에 가서도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하나, 노인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좋다. 넌 이 순간부로 드래곤과의 맹약을 했다. 이것을 잊는다면 죽어서도 편치 못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노인과 아기는 마법진 속으로 사라졌다.
* * *
본관의 접대실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있었다. 그 중심에는 세리아와 그레이 기사단의 단장인 알렌이 있었다.
칸과 부관은 세리아의 옆에 서 있고, 그로퍼는 그녀를 호위하듯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립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레이 기사단 또한 다친 알로크를 제외한 전원이 참석하고 있어 30평 남짓한 접대실이 비좁게 느껴졌다.
알렌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 송이에 십만 골드를 호가한다는 플래임 플라워가 든 상자를 내밀었다. 세리아가 턱짓으로 상자를 가리키자 부관이 상자를 열었다.
덜컥.
상자를 열자 후끈한 열기가 멀리서도 느껴졌다. 상자에 마법 처리를 가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녹아들 정도였다.
“오오! 이것은 플래임 플라워가 맞습니다, 아가씨.”
칸이 감격이라도 한 듯 붉은 꽃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가 꽃을 만져 보려 하자 알렌이 먼저 나서서 상자를 닫았다. 그러자 칸이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자, 거래 조건을 말씀해 보시죠.”
세리아의 말에 알렌이 옆에 있는 기사를 쳐다봤다. 기사는 이런 자리는 처음인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와 손에 들린 문서를 읽어 내렸다.
“헤일론 백작 각하께서 요청하신 것입니다! 첫째, 프로시안 남작은 장안의 숲에 존재하는 모든 광산 소유권을 포기한다!”
“헉! 그건……!”
칸과 부관이 놀라서 외치자, 세리아가 그런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칸은 이 조건을 절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광산의 값어치만 해도 당장 플래임 플라워를 몇 송이 살 수 있는 돈이다.
쾅!
“말도 안 되는 조건이오!”
칸이 탁자를 치며 외치자 기사가 다시 담담한 조건으로 다음 조건을 내밀었다.
“둘째, 프로시안 남작은 광산 개발과 장안의 숲 정벌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댄다. 그리고 장안의 숲을 농경지로 만들어 그 땅에서 나는 순이익의 50퍼센트를 백작령에 바친다!”
“뭐, 뭣이? 제정신이오?”
칸과 부관이 펄쩍 뛰었다. 에이전트 기사단장 그로퍼는 살기를 흩뿌리며 검을 뽑아 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꽃 한 송이의 가격으로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조건이었다.
“거참, 조용히 좀 하면 안 되나? 밑에 보니까 조건이 하나 더 남은 것 같은데 좀 들어 보슈.”
웨일즈의 한 마디에 전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때 알렌이 웨일즈를 저지했다.
“넌 조용하거라!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쳇, 알았수.”
그들의 말이 끝나자 기사가 다시 외쳤다.
“셋째! 음……?”
갑자기 그 기사가 말을 흐렸다.
모든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어서 입을 열어라!”
알렌의 호통에 정신 차린 기사가 다시 외쳤다.
“셋째! 프로시안 남작의 여식인 세리아 폰 프로시안은 지금 이 시간부로 크로니아 반 헤일론 백작 각하의 첩이 된다!”
“……!”
챙챙!
좌중이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성질 급한 그로퍼 단장의 경우는 벌써 칼을 뽑아 들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에 맞선 그레이 기사단도 하나 둘 검을 뽑아 들었다.
“이놈들! 헤일론 백작을 등에 업었다고 오만방자하구나. 너희의 그 터무니없는 조건은 들어줄 수 없다. 아가씨를 모욕한 대가를 치러 주겠다.”
칸도 더 이상 들어 줄 수 없다는 듯 스태프를 꺼내 들고 마법을 캐스팅 했다. 부관 또한 허리춤에 매단 단검을 만지며 언제든지 달려들 기세였다.
그때 세리아가 나서서 말렸다.
“모두들 그만 하세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만, 그 첫째와 두 번째 조건은 어떻게 바꿀 수가 없나요?”
“아가씨! 저놈들 말을 못 들으셨습니까!”
“그로퍼 경! 제발 좀 가만히 계세요. 칸이랑 부관 아저씨도, 냉정한 사람들이 대체 왜 그래요?”
알렌이 태연한 표정으로 상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죄송하지만 헤일론 백작 각하께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양보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아쉽지만 거래는 포기해야 되겠군요. 남작님 일은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화가 나지만, 그 어떤 이보다 침착한 이가 바로 세리아였다. 세리아는 팔은 떨고 있었지만, 얼굴에 띤 미소만은 절대 잃지 않았다. 그런 세리아가 이를 갈며 알렌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발, 제발 아버지를 도와주실 수 없나요? 그 터무니없는 조건을 들어준다면 우리 영지는 더 이상 영지라고 부를 수도 없을 거예요.”
“반복하겠습니다만, 백작 각하께서는 불가하다 하십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때 세리아의 눈앞을 스쳐 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넓은 등을 가진 장대 같은 기사 하나가 그립 부분으로 알렌을 향해 찍어 내릴 듯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로퍼 경!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