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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16화)
7장 프로시안 남작령에서의 생활(3)
채앵!
알렌은 역시 녹록하지 않았다. 어느새 검을 빼어 든 그가, 달려드는 그로퍼의 그립을 검신으로 막아 냈다. 그로퍼가 한 발자국 떨어지더니 알렌을 노려보았다.
“오냐, 뒤에서 공격을 가하는 것을 보니 역시 쓰레기 같은 영지의 기사들이로구나! 너희는 기사도마저 잊었더냐.”
알렌이 그렇게 말하자 기가 막힌 것은 에이전트 기사단이었다. 그로퍼가 발끈하고 나섰다.
“뭐, 뭐야! 어제는 본관의 병사들마저 기절시키고 침입한 놈들이 기사도를 운운하느냐?”
그러자 알렌이 무슨 말이냐는 듯 해명을 구하는 눈빛으로 그레이 기사단을 쳐다보았다. 웨일즈는 그 일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왠지 찔리는 기분에 그의 눈빛을 피했다.
“병사들? 웃기지 마라! 우리는 그런 적이 없다. 너희야말로 그레이 기사단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어제 기사를 흠씬 두들긴 놈들이 너희가 아니냐!”
그로퍼도 해명을 구하는 눈빛으로 기사들을 쳐다봤지만, 기사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모자라 우리 영지를 비하한 너희 그레이 기사단에 차륜전을 신청한다!”
차륜전은 일대일의 싸움이지만, 한 명이 지면 진 팀에서 다시 한 명이 나와 그 싸워 이긴 사람과 계속해서 싸우는 것을 의미했다.
“바라는 바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한 시간 후 연무장에서 기다리겠다.”
알렌이 그 말과 함께 나가 버리자, 그레이 기사단도 그 뒤를 따랐다. 세리아는 결국 이마를 짚고 그대로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아, 정말 쓸데없는 짓이에요. 이건 서로 피해만 입을 뿐이라구요.”
그로퍼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들은 우리 영지와 아가씨, 남작님을 비하했습니다. 게다가 힘없는 시녀들을 희롱한 것도 모자라, 저희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결투를 벌이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세리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
아버지를 볼 낯이 없어 울분만 삼킬 뿐이었다.
“크아아아악!”
머릿속을 칼로 헤집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청령은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침대에서 떨어졌다.
“크으으윽!”
청령의 머릿속에 과다한 정보와 기억들이 강제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하얀빛으로 번쩍거렸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고, 혈관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청령은 바닥을 손톱으로 긁어 대며 왼손으로는 침대 시트를 부여잡고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헉! 헉! 헉!”
그렇게 일다경쯤 지났을까. 머리가 가볍게 아프기는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노인장이 도대체 왜……?”
드래곤과 대면하고 있던 노인장은 분명 입고 있는 옷이 다를 뿐이지 그때와 같은 사람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거대한 황궁이 불타고, 눈에 익은 여러 사람들이 적의 칼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아기를 껴안은 노인이 기사 몇을 호위 삼아 그대로 미친 듯이 달려 황궁을 빠져나갔다.
거기서부터 드래곤과의 대면까지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건 분명 노인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가장 확실히 알아낸 것!
‘리바이브 리턴!’
그것은 분명 죽은 자도 살려 낸다는, 사제들이 목숨을 걸고 사용하는 신성마법이다. 다만, 그 살려 낸다는 의미는 처음으로 되돌린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결국 청령은 자신이 그 신성마법으로 이 세계에 흘러들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처음부터 이 유라시아 대륙의 사람이었단 말인가……?”
이곳의 말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노인장의 기억이 큰 도움이 됐지만,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이곳의 언어를 이미 들어 봤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난 라인하르트 황족이었구나. 그래,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였어.”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신분.
청령은 자신이 대제국의 황족, 그것도 모자라 황태자라는 사실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 노인은 추기경……. 그자가 목숨을 버려 가며 날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아마도 멸망한 라인하르트 제국의 재건인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중원에 있을 때 자신을 돌봐 준 청성파 천유한 장문인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리고 멸문한 청성파.
‘만약 그 비급을 몇 년만 더 빨리 보여 주었더라도 청성파는 진정 구파일방 중 지존이 되었을 텐데. 나라는 인간은 유라시아 대륙에서나 중원에서나 해가 되는 존재였구나.’
황태자라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대신 죽어 준 사람들과 청성파 사람들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은 이미 엄청난 사명감을 가진 존재였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게 됐군.”
사실 생각해 보면 갑자기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고 라인하르트 제국을 재건하겠다고 다짐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건 어렸을 적 기억일 뿐이고, 청령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그저 청성파를 재건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청성파의 뿌리를 유라시아 대륙에 내려 그 근본을 계속 이어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나에게 영지가 있다면 생각을 달리해 볼지도 모르지.”
청령은 우스갯소리를 중얼거리고는 그냥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알았을까, 그저 흘려보낸 이 말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
* * *
프로시안 영지에는 외성이 존재하고, 그 외성 안에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영주가 살고 있는 내성이 존재했다.
프로시안 영지의 외성에서 롱 스피어(Long Spear)을 들고 있는 병사 두 명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정말 더워 죽겠네.”
“제기랄. 우리 같은 말단 병사들은 이런 곳에서 햇빛이나 쬐며 죽치고 있는 수밖에 더 있나?”
“하긴, 그 이름 높은 기사들은 편하게 의자에 앉아 쉬고 있겠지. 간간이 보고 따위나 받으면서 말이야.”
그들의 이름은 한스와 존슨이었다. 한스가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그늘이 있는 곳에 가서 털썩 앉아 버렸다.
“야! 그러다가 다른 놈들이 보기라도 하면 우리 아작 나는 거 모르냐?”
“시끄러. 아작 나기 전에 더워서 돌아가시겠구먼.”
한스의 말에 존슨은 살짝 고민했다. 그러고는 그 역시 한스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존슨의 만족한 표정에 한스가 사소한 일을 주제 삼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더럽게 편하지? 그건 그렇고, 너 세리아 아가씨 얼굴 봤냐? 난 저번에 봤는데 역시 소문대로야. 아니, 소문이 훨씬 못하더군!”
한스는 세리아의 얼굴을 회상하는 듯 눈을 감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존슨은 아직 이곳에 지원해서 들어온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이었기에 세리아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정말? 그 정도란 말이야?”
프로시안 영지에서 최고 미녀로 손꼽히고 있는 세리아였다. 그녀를 본 사람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도 모자랄 판이라고 극찬을 내놓기도 했다.
“그래. 그런 여자랑 데이트, 아니 말이라도 한 번 해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서라. 너 같은 놈이 무슨 재주로 그러냐? 집에 있는 마누라나 힘껏 껴안는 게 어때? 낄낄.”
“나도 그러고 있다. 오늘 밤 집에 들어가면 세리아 아가씨를 생각하며 힘껏 끌어안아야겠군. 끄응!”
그는 자신의 몸을 껴안으며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존슨이 경멸 어린 기색으로 한스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야! 나 그런 놈 아니야.”
당황한 한스가 그렇게 말했지만 존슨은 오히려 더욱 피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두두두두두두!
쿠콰콰콰콰!
거대한 무언가가 달려오는 소리에, 존슨이 한스의 곁에서 떨어지면서 무심코 성 밖을 쳐다보았다.
“저, 저, 저게 뭐지?”
존슨이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상함을 느낀 한스가 물었다.
“뭔데 그래?”
시큰둥하게 물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한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몬스터다! 제기랄, 한동안 잠잠하나 했더니 또 저놈들이 왔군!”
“몇 놈이나 돼 보여?”
“글쎄…….”
“아니, 내 정신 좀 봐. 빨리 알려야지!”
두 병사는 서둘러 성탑에 설치된 종을 치기 시작했다.
종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슈레이더 왕국의 깃발을 흔들었다.
땡땡땡땡땡―!
몬스터의 공격을 알리는 종소리가 영지를 울렸다.
여느 때와 같이 서재로 향하던 청령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본관 근처에 위치한 연무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십여의 살기가 멀리서도 느껴졌다.
“기사들 간에 싸움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청령은 눈을 빛내며 연무장으로 곧장 향했다. 연무장에 도착한 청령은 멀리서나마 구경하기 위해 그늘에 앉았다.
한 명 한 명이 뿌리는 살기 때문에 세리아를 비롯한 부관은 숨이 막혀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 에이전트 기사단장은 지금 그레이 기사단에게 차륜전을 신청하는 바이다. 승낙하겠는가?”
결투는 신성한 것이다. 그로퍼는 다혈질이었지만 신성한 결투에서 막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알렌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게 외쳤다.
“나 알렌은 에이전트 기사단의 차륜전을 허락하겠소. 숫자는 30 대 30으로 하겠소이다!”
당연히 기사단의 숫자가 삼십 명밖에 되지 않았으니 최대 숫자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레이 기사단의 머릿수를 세어 보던 그로퍼가 눈을 찡그렸다.
“이의 있소! 그레이 기사단은 스물아홉 명 아니오!”
얼마 전에 청령에게 얻어맞고 그대로 쓰러진 알로크가 빠져 있었다. 의사와 포션의 영향으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병실에서 꼼짝 없이 누워 있어야 할 판이었다.
알렌이 코웃음을 치더니 입술을 말아 올렸다.
“흥! 그대들이 내 부하를 공격하지 않았소? 그리고 또한 에이전트 기사단을 상대하는 데 삼십 명 전원이 나설 필요는 없소. 스물아홉 명이면 충분하오!”
“뭐, 뭐요!”
알렌의 오만방자한 말에 그로퍼가 검을 잡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여차하면 발도술로 그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 버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그때 옆에 있던 부단장 욘지가 나섰다. 욘지는 냉철한 인물이었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검술이 좋아 부단장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것이다.
“단장님, 어차피 저들은 차륜전에서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저렇게 웃는 것도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참으십시오. 승리의 여신의 미소는 어차피 저희 것이 될 겁니다.”
욘지의 말을 듣고 보니 타당하다고 생각한 그로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누구부터 하겠소?”
그로퍼가 당당히 앞에 나섰다.
그로퍼는 다혈질적인 노기사지만, 실력은 매우 뛰어났다. 특히 전쟁에 참가한 경험이 수십 번이고, 생사를 넘나든 경험도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가 나설 것이오.”
알렌도 당당히 앞으로 나섰다.
그로퍼의 검이 롱소드라고 한다면 알렌의 검은 바스타드 소드에 가까웠다. 알렌과 그로퍼가 서로를 노려보며 고개를 숙였다. 서로 상대에 대한 예를 올리는 것이다.
청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처음부터 예상치 못한 대련을 보게 되다니, 정말 기대되는걸.”
승부는 쉽게 점칠 수 없었다. 내공의 수위를 비교하자면 알렌이 그로퍼보다 약간 높았다. 하지만 대련은 결코 내공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그로퍼에게는 알렌보다 무수히 많은 생사를 넘어온 경험이 있었다. 게다가 알렌처럼 편안한 영지에서 생활한 기사가 아닌, 장안의 숲을 옆에 두고 하루도 편안히 지낼 수 없는 프로시안 영지에 있는 기사라면 응당 어떤 싸움이라도 능했다.
‘재밌겠어.’
청령이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두 사람은 동시에 검을 들고 서로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 가고 있었다.
채앵―!
슈슈슉―!
그로퍼의 속검이 여지없이 알렌의 빈틈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허업!”
그로퍼의 속검에 알렌이 여지없이 뒷걸음질 쳤다. 양측의 기사들은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로퍼는 초반 페이스를 제대로 잡아 계속해서 알렌을 몰아갔다. 알렌처럼 힘으로 검술을 하는 자에게는 그로퍼와의 대결이 힘겨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압!”
알렌은 어느 정도 속검에 익숙해지자 곧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그로퍼는 자신의 허리를 찔러 들어오는 검에 한 바퀴 빙그르 돌아 검을 피하더니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그러자 한순간 멍해진 것은 그레이 기사단이었다. 너무 안으로 파고들면 어쌔신이 아닌 이상 저런 롱소드로는 공격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것을 뻔히 아는 에이전트 기사단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련을 쳐다봤다.
휘익!
순식간에 돌아가는 그로퍼의 검.
그로퍼가 그립 부분으로 알렌의 머리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끝났다!”
“헉!”
설마 손잡이로 가격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듯 결국 알렌은 첫 타를 그로퍼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크윽!”
쿠웅!
투구를 쓴 알렌의 머리가 크게 울렸다. 그립에 얻어맞은 충격이 상당했는지 알렌은 잠시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런 알렌을 향해 그로퍼의 발이 여지없이 날아들었다.
퍽!
“크악!”
설마 검술대련에서 발이 날아올 거라고는 상상치 못한 알렌이 그대로 가슴팍을 얻어맞고 뒤로 쿵 하고 넘어졌다.
“이, 이런 비겁한!”
알렌이 투구를 벗어 거칠게 집어 던졌다. 머리가 눌려서 앞을 가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로퍼는 그 충격을 입고도 알렌이 검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온실의 화초처럼 마냥 연무장에서 편안히 수련을 쌓은 자가 제법 기사의 명예는 알고 있는 것이다. 기사는 절대 대련 중에라도 검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검을 놓치면 그 순간이 패배요,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것이다.
그로퍼가 그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비겁하다? 대련 중에 비겁하다는 말이 어디 있나? 차륜전의 제3조항! 차륜전의 대련 중에는 검이 아니라 신체의 일부분을 사용할 수 있다! 모르는가?”
확실히 그런 조항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의미가 퇴색되어 검으로만 싸웠을 뿐이다.
“더 싸울 텐가?”
“아직 난 진 것이 아니오!”
알렌이 검을 움켜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