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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1권(17화)
7장 프로시안 남작령에서의 생활(4)


“하아아압!”
“자, 잠깐 멈추십시오!”
앞으로 달려 나가던 알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갑자기 소리친 병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겁지겁 달려온 탓인지 병사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헉! 헉! 지금 당장 외성으로 가셔야겠습니다. 지난번의 그 오크들이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인지 수천 마리를 이끌고 침공해 왔습니다.”
“헉! 벌써 말이냐? 요즘 놈들이 성급해졌구나. 미안하지만, 알렌 경! 차륜전은 다음으로 미뤄야겠소.”
“자, 잠깐 기다리시오!”
그로퍼와 에이전트 기사들은 중무장을 한 채 그대로 외성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에 서로를 바라보던 그레이 기사단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그들을 뒤쫓았다.
하지만 점점 격차가 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뭐지? 저들은 중무장까지 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저들을 따라잡을 수 없는가?”
현재 알렌은 그로퍼와의 대련으로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그는 그로퍼를 보고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마나의 양은 자신이 월등히 높았다. 하지만 승부 내내 승기를 잡을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놀라운 점은, 그의 호흡이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두두두두두두!
“취이이익!”
“화살을 쏘아라! 기름을 퍼부어라! 절대 놈들이 성벽에 올라오게 해서는 안 된다. 성문의 방어를 강화해라! 절대 자리를 벗어나지 마라! 너희가 물러서면 너희 가족이 위험하고, 고향을 잃는다!”
수천 마리의 오크 떼들에 주눅 든 병사들을 지휘하는 제1소대 경비대장의 외침이었다. 그는 영지 안에서 기사 다음의 계급이었다.
“한스! 농땡이 치지 말고 기름이라도 퍼부어라!”
“제기랄! 내가 네 꼬붕인 줄 아냐?”
존슨의 외침에 한스가 투덜거리며 장창을 휘둘렀다. 그의 창이 오크 한 마리의 미간을 여지없이 꿰뚫었다.
“아아악!”
“이런 제기랄! 존슨!”
존슨의 비명 소리에 한스는 서둘러 창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그의 화려한 창술에 오크 서넛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직까지 직접적인 전투를 해 본 적이 없는 존슨은 한스의 등 뒤에서 보호를 받으며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고, 고맙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할 시간에 창이라도 휘둘러! 이 빌어먹을 자식아.”
“꿀꺽.”
옆에서 오크들의 도끼에 머리통이 박살나는 동료 병사를 본 존슨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제1소대 경비대장이 표정이 다소 상기된 채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처음과는 달리 오크들이 넘어오는 숫자가 많아졌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동요한 병사들이 도망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이 굼벵이 같은 놈들은.’
“퀴엑!”
그의 말에 감복하기라도 하듯,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앞에 있던 오크가 그대로 무 썰리듯 썰려 나갔다.
경비대장이 눈이 치켜떠졌다. 옆으로 눈동자를 굴리니 어느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운 노기사 하나가 서 있었다.
“그로퍼 님!”
“이제 이곳은 내가 맡는다. 욘지! 너는 다섯 명을 데리고 성문을 막아라!”
“예!”
“우와아아아! 에이전트 기사단이다!”
병사들은 기사들이 온 것을 보고 힘을 얻었다. 확실히 기사들은 병사들과는 다른 웨폰 오러급의 경지였기에 오크 서너 마리가 한 번에 썰렸다.
그 무렵 칸과 세리아도 외성에 도착했다.
“칸 아저씨! 되도록 병사들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성벽으로 올라오는 놈들에게 대규모 마법을 사용해 주세요. 저는 성벽에 올라온 놈들을 공격할게요!”
“아가씨, 이곳은 위험합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여린 마음을 가진 세리아가 보기에 이곳에는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 많았다. 그녀로서는 평생 버티기 힘든 정신적 고통을 느낄 수도 있었다.
“병사들이 죽는 마당에 제가 도망갈 수는 없어요!”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칸도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 세리아의 그런 모습에 칸은 대견스러워하며 미소 지었다.
‘벌써 병사들을 생각하실 정도로 자라셨구나. 내가 미련했어. 이미 아가씨는 이렇게 성숙하신걸.’
항상 어린애로 보였다. 아저씨, 아저씨 하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의 모습에 겹쳐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미 그녀는 칸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자랐다는 것을.
“그렇다면 명심하십시오. 마나 고갈이 올 경우 곧바로 뒤로 빠지십시오. 아가씨 호위는 병사들에게 따로 맡기겠습니다.”
“우와아아! 세리아 아가씨까지 오셨다!”
“정말 세리아 아가씨다!”
프로시안 남작령의 정신적 지주!
이미 그녀의 얼굴은 영지에 곳곳에 퍼져 있었다. 병사들의 잠을 설치게 만든다는 그녀가 외성에 나와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허걱! 정말, 네 말이 맞구나!”
존슨이 눈을 비벼 가며 세리아의 미모에 감탄했다.
“이런 멍청한 놈! 그럼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다면 창이라도 휘둘러! 기름이라도 붓든가!”
“이놈들 정말 끝도 없이 밀려오는데!”
각 병과의 대장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절대 물러서지 마라!”
“칸 님께서 마법을 캐스팅 하신다!”
“아가씨를 지켜라! 그리고 화살을 쏴라!”
슈슈슈슉―!
삼백 개의 화살이 하늘을 날아올라 뒤편에 있던 오크들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때, 기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던 칸이 캐스팅을 끝냈는지 이내 손을 높이 들었다.
“절대 불의 영역이여! 불의 신이시여. 그대의 힘을 빌려 내 앞에 있는 공간을 바꾸리라. 파이어 필드(Fire Field)!”
화르르륵!
“꾸에에엑!”
30미터 정도 되는 거리가 모두 불타는 땅으로 변했다. 4서클 마스터의 마법에 이백여 마리의 오크가 한 번에 타 죽었다. 칸은 이 공격 한 번으로 다소 지친 표정으로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매직 미사일!”
하얀 화살 모양을 한 수십 개의 마법 화살이 허공을 날아다녔다. 그 마법들은 병사들이 공격할 시간을 주기 위해 성벽 위를 올라온 오크들의 눈을 가렸다. 세리아의 마법에 도움을 받아, 병사들은 오크 떼를 쉽게 도륙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끝이 없다!”
“방패병! 창병! 성문을 막아라!”
“누구든 좋으니까 화살 좀 가져와 봐!”
병사들이 저마다 소리를 꽥꽥 질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병사들의 활약에 오크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동쪽에 위치한 외성 곳곳이 불에 그을렸다.
병사들은 시체 사이를 누비며, 몬스터와 사람의 주검을 구분하기에 바빴다.
“크아악! 내 눈!”
“혀엉! 엉엉!”
이번 몬스터와의 전투 때문에 프로시안 남작령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세리아는 죽은 사람들보다도 부상자를 보는 것이 더 가슴이 아팠다. 어느 정도 진정된 상황에서 부관이 급히 달려왔다.
“피해는요?”
“보고 올립니다! 병사들 피해자 사망자 이백일흔네 명, 중상 구십 명, 경상 오백오십 명입니다. 에이전트 기사단의 피해는 없지만, 그레이 기사단의 경우 싸움에 투입되어 약 세 명의 사망자를 내었습니다. 창병과 방패병이 피해를 가장 많이 보았습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병사들 치료에 박차를 가하고, 경계에 고삐를 늦추지 마요. 지금 당장 운용 가능한 병력은 얼마나 되죠? 그런데 그레이 기사단의 피해라뇨?”
세리아의 물음에 헛기침을 한 부관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에이전트 기사단의 활약에 살짝 배알이 꼬였나 봅니다. 그들이 참가한 덕분에 우리 병사의 피해가 다소 줄었습니다. 운용 가능한 병력은 기마병 백여 기, 궁병 삼백여 명, 창병 삼백여 명, 방패병 이백여 명입니다. 마법사는 아가씨와 칸 님뿐이고, 당장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연금술사는 한 명도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하나 수성전에는 기마를 사용하지 않으니 지금 운용 가능한 병력은 팔백여 명이 다입니다.”
세리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레이 기사단은요?”
“그들은 일찌감치 떠났습니다. 백작령으로 향한 듯합니다.”
“기사들 간에 작은 다툼이 있었는데, 과연 헤일론 백작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에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차피 헤일론 백작도 어쩌지 못할 겁니다. 장안의 숲을 막고 있는 것은 실질적으로 우리 영지입니다. 영지전(領地戰)을 한다고 해도 폐하께서 말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그닥! 다그닥!
말을 탄 스무 명 정도의 기사들이 보였다.
그레이 기사단은 에이전트 기사단과는 달리 세 명의 사망자와 열 명의 경상자를 내었다. 제일 멀쩡한 웨일즈와 알렌은 다소 편안한 표정으로 백작령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단원들의 죽을상을 본 웨일즈가 알렌을 불렀다.
“거, 단장. 조금만 쉬고 갑시다. 말을 하도 오래 탔더니 엉덩이가 찢어질 것 같은데.”
“…….”
웨일즈의 말에 알렌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방금 전 그 몬스터 떼와의 전투를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
몬스터들 사이를 누비던 에이전트 기사단과는 달리, 그레이 기사단은 소극적으로 싸웠다. 그러면서도 피해를 입었다.
차륜전을 치렀다면 완벽히 패배했을 것이다.
왠지 분한 느낌에 알렌이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한 기사가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단장님, 백작 각하께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임무를 실패한 것을 아시면 크게 노하실 것이 분명한데.”
“기사까지 죽은 것을 아시면 프로시안 남작에게 영지전까지 걸지도 모르는 일이지. 어떡하긴. 우리는 백작령으로 돌아간다. 알로크! 상처는 괜찮나?”
이들 중 상처가 제일 깊은 것은 알로크였다. 청령에게 맞은 상처가 아직도 다 낫지 않은 것이다. 알로크가 무리한 행군을 하는 것 같자 알렌이 슬쩍 손을 들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숙영한다.”
그 말을 들은 기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빠른 속도로 장작을 피움과 동시에 간단한 음식이 준비되었다.
말에서 내린 알렌이 노을을 바라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영지로 돌아가는 즉시 평소보다 훈련량을 두 배로 늘리겠다. 에이전트 기사단보다 비실대다니. 너희가 그러고도 헤일론 백작 각하의 자랑스런 기사더냐!”
“헉! 그, 그건……!”
평소에도 과도할 정도로 훈련을 하고 있는 기사들이었기에, 그들의 눈이 저마다 치켜떠졌다. 하루에 일곱 시간을 훈련하는 그들에게 두 배인 열네 시간이라 하면 잠자는 시간도 아껴야 할 판이었다. 훈련 후의 달콤한 휴식시간을 빼앗긴 기사들은 항의하려고 했지만 알렌의 한마디에 입을 꾹 다물었다.
“번복은 없다. 모두 영지로 돌아가는 즉시 각오하도록! 이번 그레이 기사단의 단원의 죽음은 모두 너희의 약함에서 비롯되었다. 명심하도록 해라!”
“예.”
기사들은 저마다 굳은 표정을 하고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가씨, 잠깐 이곳으로…….”
칸이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인적 없는 곳으로 세리아를 이끌었다.
“칸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혹시 방금 전의 전투에서 마나폭풍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예? 마나폭풍이라니요?”
마나폭풍이란, 마나를 과도하게 사용할 경우 일어나는 현상이다. 마법사들이 클래스를 높여 승급하거나, 검사들이 다음 경지로 오를 때 마나폭풍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세리아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음…… 만약 에이전트 기사단의 실력이 상승했다면 마땅히 칭찬해야 할 일이잖아요.”
칸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닙니다. 에이전트도, 그레이 기사단도 아니고, 병사들도 아니었습니다. 재밌는 건 오크들의 뒤에서 마나폭풍이 일어났고, 그 직후 오크 수백 마리가 동결되어 죽었다는 겁니다.”
“도, 동결이요? 그렇다면 속성마법이라도 사용했다는 건가요?”
오크 수백 마리를 동결시키려면 적어도 4클래스, 혹은 5클래스 이상의 공격 마법을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칸이 알기로 4클래스에 그런 마법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속성마법도 아닙니다. 그자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병사들이 사용하는 검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머리색이 검은색이었습니다.”
“거, 검은색이요?”
병사들이나 현재 프로시안 남작령에는 검은색 머리를 한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
“예. 제가 생각하기엔 얼마 전 아가씨께서 룩커 강에서 발견했던 그 청년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그를 처음 들쳐 업었을 때만 해도 4클래스에 버금가는 마나가 몸을 휘감다가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그가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세리아는 처음 청령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고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방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겁이 나 경계하던 모습 등등 여태껏 지켜봐 온 그의 모습은 어디를 봐도 절대 칼을 들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호호호! 아이고, 배야. 칸 아저씨, 그건 절대로 아닐 거예요.”
하지만 칸은 자신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밝히기 위해 언성까지 높였다.
“아니요! 분명히 그가 맞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검은 머리입니다. 게다가 제가 따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어쩌면 룩커 강 상류에서 떠밀려 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룩커 강 상류 쪽으로 가면 기사의 나라인 ‘펠타온 제국’이 존재한다. 펠타온 제국은 마법과 정령 쪽에서는 취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기사의 나라답게 기사들만의 무력으로 제국의 명성을 거머쥔 강국이었다. 나라에서는 기사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실력이 없으면 귀족의 작위마저 뺏는 나라다.
황제마저 검에 대한 지식이 빠삭할 정도로 기사를 신성하게 여기는 곳이었다.
현재 유라시아 대륙에서 검에 속성을 다룰 수 있는 나라는 고작해야 펠타온 제국의 일부 상류층뿐이었다. 듣기로는 어느 귀족가의 독문검법은 죄다 속성을 드러내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칸 아저씨도 알다시피 상류 쪽에서 이곳 프로시안 남작령까지 떠밀려 오는 동안 죽지 않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에요.”
“생명의 여신 플로아 님께서 보살펴 주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칸의 말을 곰곰이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렇게 된 거라면 우린 엄청난 인재를 얻은 것입니다. 그를 붙잡아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알았어요. 그럼 칸 아저씨께서 일을 맡아서 그를 감시해 주세요. 아셨죠?”
“걱정 마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눈을 빛내며 대답하는 칸을 향해 세리아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주위가 마치 환해진 듯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