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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제4장. 마법 소녀 에르웬(4)
카리로스가 당장이라도 도끼라도 빼 들려는 듯이, 하자 차가운 눈빛으로 말하더니 마지막에는 눈물을 흘렸다.
그에 카리로스가 멈칫했다.
확실히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여자인 에르웬이 살아남기 위해 재빨리 목걸이를 먼저 가로채려고 한 것도 어쩌면 이해가 되는 부분.
그에 카리로스가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좋아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 주지.”
“흐흑, 몰라!”
에르웬이 카리로스의 말에 투정을 부리듯 눈물을 닦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웃었다.
‘후후, 너도 아직 쓸모 있으니 살려 두는 거야.’
눈물 뒤에 숨겨진 에르웬의 본모습이었다.
에르웬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아이들은 더욱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라라라라∼”
그런 것을 개념 않고, 콧노래를 부르던 에르웬은 수거한 목걸이를 닦고는 목에 걸었다.
그 순간,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잡고는 그대로 눕히며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누, 누구야?!”
에르웬은 자신의 눈을 가리는 이로 인해 당황하며 말했다.
“네년. 그런 악랄한 짓을 하다니, 생각보다 영특한 계집이구나.”
“이, 일론?!”
그녀의 눈을 가리고 눕힌 이는 다름 아닌, 일론이었다. 일론은 한스가 움직일 때부터 이 모든 일을 꾸민 이가 에르웬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아무리 네가 지금 나이에 비해 마법의 경지가 상상을 초월한다지만, 이렇듯 눈을 가리면 나에게 어떤 행동을 가할 수가 있을까?”
“…….”
에르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크크, 네년이 아까 그랬지. 이곳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죽이는 곳이라고, 아아. 그러면 나도 서로를 믿지 못하니 너를 죽여줄까?”
스으윽.
일론의 한 손이 품속으로 들어가며 단도를 꺼내 들었다. 그 소리를 들은 에르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하지 말아 달라… 상당히 가식적이군.”
“……!”
가식적이라는 말에 에르웬의 애걸복걸하던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싸늘하게 변했다.
“네가 뭘 알아?!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살아온 네가 아픔을 알기나 해?! 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해! 그런 걸 네가 알아?!”
흠칫!
순간 에르웬의 말에 일론의 손이 멈췄다. 살아야 한다. 그것은 일론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아무 탈 없이 살아온 자신. 그런 자신에게도 아픔은 있다.
아니, 아픔보다도 보여 줘야 하는 게 있다. 이곳에서 누구보다 우수하게 졸업해서 인정받아야 한다.
자신은 그래야만 하였다. 그래야 세상이 알아줄 테니까. 자신은 어쩌면 아픔보다도 더한 것을 등에 지고 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모욕을 당해 죽었어! 그런 아버지를 위해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해, 그런데 다른 사람 생각? 그런 것을 바래?! 미친 소리 하지 마! 난 어떻게 해서든 살아 나갈 거야! 그래서 최고의 자리에 군림할 거라고!”
“여 마법사로서 최고의 자리로 군림하겠다는 건가?”
“그래, 왜 미친 소리같이 들려?! 두고 봐 해낼 테니까! 그래서 꼭 복수할 거니까!”
스으윽.
에르웬의 눈을 가리고 있던 일론의 손이 치워졌다.
“일단은 살려 주지. 그리고 네년. 아픔과 무언가를 짊어지고 있는 것은 너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둬라.”
일론이 그녀를 누르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에르웬이 그런 그를 쏘아보며 마법을 걸려다, 이내 방금 전 그의 눈동자를 통해 비춰진 슬픔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아픔은 지니고 있다. 무언가 짊어지고도 있지. 에르웬은 여 마법사로서의 최고의 자리로 군림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기사로서, 대륙에 우리 가문의 이름을 빛내는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렇다면 바로크… 네 녀석은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을 짊어지고 있느냐.’
나무에 기댄 일론의 눈이 바로크를 향했다. 여전히 바로크는 소란에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태극권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바로크가 짊어지고 있는 것. 그것은 초감각이라는 괴물.
바로크가 가진 아픔. 그것은 괴물로 바라보는 사람들.
바로크가 얻으려는 것. 자신의 삶의 목표.
그것들이었다.
제5장. 괴물(1)
꾸이익 꾸이익.
“역시 카리로스는 대단해!”
“우리들의 지도자다워!”
“후후, 앞으로 우리 무리는 3일간 식량 걱정은 없을 거다.”
카리로스가 맨몸으로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수풀 속으로 사라지고, 30분 정도가 지난 후 꽤 큰 크기의 멧돼지를 어깨에 둘쳐메고 나타나자, 아이들이 그를 치켜세워 주기에 바빴다.
현재 에르웬으로 인해, 첫 살인이 일어난 지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카리로스의 무리나, 바로크와 나머지 두 사람의 경우는 전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에 반면, 남아 있는 아이들은 달랐다.
잠도 한숨 자지 못해 눈 밑에 내려온 짙은 어둠과 얼굴에 보이는 피곤한 기색.
얼마나 그들이 불안감에 떠는지를 보여 주는 몰골이었다.
“저, 저기…….”
“뭐냐.”
수련을 하며 검을 움직이던 일론이 자신을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땀을 훔쳐 내며 매섭게 노려봤다.
“나, 나와 함께 있지 않겠어? 매일 혼자던데,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않을까?”
“꺼져라. 나약한 녀석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번뜩.
“흠칫.”
“으, 응.”
일론이 당장이라도 들고 있던 검을 휘두를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자 소년이 흠칫 놀라며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한심한 자식들 같으니, 누군가의 힘에 의지해 살아남으려고 하다니, 살아갈 가치가 없는 녀석들이다.’
일론은 이번 말고도 두세 번 정도 다른 아이들이 접근해 왔었다.
분명 일론은 무척 강한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보기에도 수련할 때의 움직임만 봐도 웬만한 기사들을 때려눕힐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일론도 바로크와 에르웬에게는 어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나, 다른 아이들이 보았을 때에는 바로크의 경우 무언가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이 있었고, 에르웬의 경우는 여자아이이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일론의 곁에 붙으려는 것이다.
벌컥벌컥.
“후우.”
검을 허리춤에 차고, 땀을 모두 닦아 낸 일론이 가방에서 물을 꺼내 들이켰다. 그리고는 숨을 내뱉으며, 가방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얼마 안 남았군, 뭐 상관없겠지.”
일론은 이런 시답잖은 3차 관문에 참여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알아서 아이들은 서서히 붕괴해 갈 것이었다.
이제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앞으로 며칠만 기다리면 서로가 죽이는 상황이 일어날 것이었다.
어리다는 것은 참으로 단순한 것과 같았다.
참을성도 모자라고, 끈기도 부족하다. 그런 아이들이기에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지도 못할 터였다.
‘저 녀석도 나와 같은 생각인가?’
배낭을 확인한 일론은 마른 빵을 꺼내 입에 물며 편하게 나무에 기댄 앉은 채, 연초를 물고 있는 바로크를 바라봤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고, 이상한 자세로 매일같이 무언가를 연습하고 있을 뿐이다.
불끈.
‘제길… 아레스라니…….’
그러던 중 문득 일론이 무언가 울컥하고 치미는 것을 느꼈다. 녀석이 아레스를 닮았다는 것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은 녀석에게 어느 하나 뒤처지는 것이 없었다. 녀석의 출신이 노예인지, 아니면 어떤 가문의 아이이든, 자신에게는 안 될 것이고, 키도 자신이 더 컸으며 귀품 또한 자신이 더 넘쳐흘렀다.
하나,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바로크는 가지고 있었다. 그에 질투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그깟 아레스. 부숴 주마.’
일론은 자신의 우상 아레스를 버렸다.
아레스 같은 기사가 되겠다던 생각을 버렸다. 그 대신 아레스를 짓밟을 수 있을 정도의 기사가 되겠다는 새로운 꿈을 품었다.
마른 빵을 모두 씹은 일론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다시 수련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저 아이가 짊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편, 바로크를 바라보는 일론과 같이 에르웬은 일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때의 그 눈동자 너무 슬퍼 보였다. 짊어지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커 보였다. 무언가 압박감에 사는 아이의 눈 같았다.
모든 것이 부족할 것이 없는 현실. 하지만 그 화려한 것들로 치장된 진실은 너무나도 무겁고 아픈 것일지도 몰랐다.
‘나중에는 알 수 있겠지? 저 아이와 나. 바로크라는 아이는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거야.’
그녀가 일론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그럴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이봐.”
“……?”
에르웬이 시선을 거두고, 막 가방에서 빵을 꺼내어 입에 물려던 때에 한 아이가 다가왔다. 카리로스의 무리 쪽에 있는 아이였다.
“카리로스가… 아니, 카리로스 님이 잠깐 보재.”
“카리로스 님……?”
카리로스 님이라는 말에 에르웬은 황당했다. 며칠 간 보호해 주고 살아남을 수 있게 보탬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진실 된 속뜻을 모르고 카리로스 님이라니 한심함 그 자체였다.
“그래.”
에르웬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뒤를 따랐다.
카리로스의 무리 쪽으로 오자, 멧돼지 고기를 굽고 있는 무리의 아이들과 마치 정말 산적 우두머리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카리로스가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에르웬. 우리 무리에 들어오는 게 어때?”
“헤헤, 너희 무리?”
에르웬이 자신의 무리로 들어오라는 카리로스의 말에 혀를 배시시 내밀며 웃었다.
그에 카리로스는 그럴 생각이 있다고 판단하고는 더욱 말을 이었다.
“그래, 우리 무리에 들어온다면 이런 고기쯤 마음껏 먹게 해 주마.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게 해 주지, 후후, 저번에 네가 말한 것처럼 이곳은 아무도 믿지 못하는 곳이다. 하지만 나를 믿어라 에르웬, 그렇다면 살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멋있는 말이군, 크크크.’
자신이 내뱉은 말에 카리로스 본인이 감탄했다.
그에 에르웬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싫어.”
“뭐?”
승낙할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거절하자 카리로스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이렇게 숫자만 믿고 까부는 무리 따위 관심 없어. 그리고 카리로스 너 강해?”
“당연하지, 이곳에서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내 따위는…….”
“그렇다면 바로크를 이기고 와서 나에게 그런 제안을 내걸어 보지 그래? 그렇다면 내가 얌전히 이곳에 틀어박혀 있어 주지.”
에르웬은 참으로 영특한 아이였다. 이제까지 궁금하였던 바로크의 경지를 이번 일로 하여금 확실히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흠흠, 저런 녀석 따위야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헤헤.”
카리로스가 주위 아이들의 눈치를 흘끗 보며 말하자, 에르웬이 웃어 보이며 그의 옆으로 다가가 자세를 낮추고는 귀에 속삭였다.
“나를 원하는 거지, 카리로스? 바로크를 이긴다면 너의 여자가 되어 줄게.”
“으으으, 그, 그래!”
일부러 뜨거움 입김을 내뱉으며 말하는 그녀로 인해 카리로스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에르웬이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흐흐, 나중에 에르웬과 뒹굴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군!’
카리로스는 여기의 평균 나이의 아이들보다 2∼3살가량 더 많은 아이였다. 때문에 성적으로 관심이 많을 나이였기에 그는 지금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무식한 그라고는 하지만 바로크라는 인물은 다가가기 꺼리고, 무서운 것은 사실이었다.
카리로스는 일단은 지켜보기로 하였다.
“네, 네 녀석! 매일같이 나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봤어! 빌어먹을! 내게 원하는 게 뭐야!”
“무슨 헛소리야! 내가 언제 매일 너를 봤다는 거야!”
드디어 꽤나 잠잠했던 이곳에 싸움이 터졌다. 한 아이가 무작정 한 소년에게 다가가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