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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제8장. 무(無)의 검(2)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바로크는 요 근래에 상당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백 동작까지 온 그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했을 때, 앞의 백 동작은 자신과 같은 초감각 인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검의 천재라고 불릴 정도라면 오랜 시간을 걸쳐 충분히 익힐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크론이 말한, 대륙의 뛰어난 기사들이 익힌 부분이 이 앞의 백 동작일 것이다.
하지만. 백 동작의 그다음 무언가 숨겨진 다른 열쇠가 있는 것만 같았다.
백 동작의 그다음 부분은 특이하게도 앞에서 배운 백 동작을 거꾸로 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 백 동작을 거꾸로 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였지만 그 위력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분명 무언가가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후우우… 대체 뭐지?”
한숨을 짙게 내뱉으며 바로크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생각해 보고 아무리 검술서를 다시 읽어 봐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이목을 끄는 글이라면,

내가 존재하였던 곳에 나의 끝이 있고, 내가 존재하고 끝이 있는 곳에, 빛과 함께 어둠이 있다.

라는 글이었다.
무언가 상당히 중요한 말과 같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수우우웅.
“오늘은 평소보다 바람이 매섭게 부는군.”
생각에 빠져 있던 바로크가 동굴 내부로 깊게 스며드는 바람의 영향에 몸을 움츠렸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던지, 마치 동굴 안을 모두 휘젓는 것만 같았다.
세에에에.
그때였다.
바로크는 바람이 훑고 간 자리에 알 수 없는 휘파람 비슷한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꼈다.
“뭐, 뭐지……?”
분명 무척 작은 소리였다. 일반 인간이라면 절대 듣지 못할 소리다.
하지만 바로크의 귀는 그 소리를 들었다.
벌떡.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 다시금 거센 바람이 동굴 안을 휘저었다.
후우우웅.
세에에에.
바로크는 확실하게 들었다. 바람으로 인해 들리는 오묘하고도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소리를.
그의 몸이 저절로 그쪽으로 천천히 향하기 시작하였다.
동굴은 갈수록 좁아져만 갔다. 겨우 바로크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그렇게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던 바로크는 굳게 막혀 있는 벽 앞에 멈춰 섰다.
세에에에.
“분명 이곳의 안에서 들리는 소리다.”
바로크는 이 안에서 들리는 소리라고 단정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제까지 그 어떤 바람보다 차갑고 거센 바람이 동굴 안을 다시 휘저으며 벽과 함께 바로크를 강타했다.
“크으윽.”
거센 추위에 바로크가 자신의 몸을 웅크렸다.
그때, 그의 찌푸려진 눈 사이로 바람과 벽이 만나면서 순간적으로 빛을 내보이는 하나의 글귀가 보였다.
“뭐, 뭐지!”
바로크가 놀라며 방금 전 그 글귀가 보였던 곳을 손으로 더듬었다.
나타났던 글귀는 너무나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게 대체…….”
바로크는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당황했다. 그리고 곧 안정을 되찾았다.
“다시 바람이 불 때까지 기다리자.”
바로크는 다시 바람이 불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거센 바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크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리고 곧 벽과 바람이 만나며 나타난 글귀를 보았다.

내가 존재하였던 곳에 나의 끝이 있고, 내가 존재하고 끝이 있는 곳에, 빛과 함께 어둠이 있다.

“이, 이건……!”
바로크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떠졌다. 이 글귀는, 그가 지금까지 고뇌하던 글귀가 아니던가.
아레스의 검술서에 적혀 있는 한 부분.
그 부분이 바로 이곳에 적혀 있었다.
“이 안에 해답이 있을 것이다. 크론이 괜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 아니었어.”
바로크는 처음으로 크론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무언가를 알고 이곳으로 보낸 것이었다. 그 덕분에 꽤 고뇌하였던 뜻을 풀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곧 그가 검을 강하게 잡아 들었다. 그리고는 온몸에서 흐르는 마나를 주위로 방출시켰다.
바로크는 검에 마나를 주입하여 오러를 만들어 내는 아스트 대륙의 기사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애초에 그는 오러에 대해 배운 것이 없었다. 단지, 태극권을 태극검으로 바꾸었을 뿐.
마나를 몸 밖으로 배출할 때의 그는 검뿐만이 아니라, 몸 주위까지도 마나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흐아압!”
그가 온 힘을 검을 잡은 손에 쥐며, 강하게 벽을 그었다.
스우웅.
그의 검이 공기를 가르며 그대로 벽을 두 번 훑고 지나갔다. 벽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곧 바로크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발로 밀자, 이내 잘려 나간 부분이 뒤로 넘어갔다.
그의 정확도와 완벽함은 어느새 이렇듯 벽까지도 베어 버릴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덥석.
그가 벽의 한 부분을 짚고 조심스럽게 좁은 공간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곳이 대체…….”
그가 발을 들인 곳은 마치 신전과도 같아 보였다.
동굴 안에 이런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눈앞으로는 거대한 광장이 모습을 드러내 있었으며, 광장의 중앙에는 거대한 동상 하나가 장대한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동상의 뒤로는 마치 고인돌을 보는 것과 같이 거대한 돌들이 무덤을 만든 것처럼 쌓여져 있었다.
터벅터벅.
그의 발이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이동하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이동할 때마다, 알 수 없는 끌림이 자신을 인도하였다.
“이 사람은 대체…….”
바로크는 정면으로 동상 앞에 서서,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고, 머리에는 코와 입, 눈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리는 투구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기사로 추정되었다.
“뭐지?”
잠시 그 동상을 올려다보던 바로크는 문득 자신의 앞에 존재하는 먼지에 가려져 흐릿하게 부분부분 보이는 글자들을 발견하였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그 먼지들을 걷어 내었다.
“아레스 론 프레이스… 아레스……?”
그는 아레스라는 말에 놀란 표정으로 동상을 다시 올려다보고는 다시 한 번 글자를 확인하였다.
아레스 론 프레이스.
대륙에 전설로 남아 많은 이들의 동경을 받고 있는 사내이자, 자신과 같은 초감각을 지닌 자.
그의 동상이 바로 이곳에 세워져 있던 것이다.
“내가 존재하였던 곳에 나의 끝이 있고, 내가 존재하고 끝이 있는 곳에, 빛과 함께 어둠이 있다… 이곳이 그의 무덤인 건가……?”
바로크가 위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바보라고 하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아레스의 무덤일 것이었다. 세상에 남은 기사의 무덤. 그 말은 즉, 그의 실제 존재 여부가 밝혀지는 것이었으며, 자신이 익히고 있는 검술 또한 입에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존재하였던 것이 되는 것이다.
스슥.
놀란 표정을 추스른 바로크의 손이 곧 그의 이름 아랫부분의 먼지들을 걷어 냈다. 먼지를 걷어 낸 바로크는 더욱 많은 글자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나와 같은 후손이 언젠가는 이곳에 당도하리라고 믿는다.”
바로크는 먼지를 걷어 내자 보이는 글자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대는 나와 같은 초감각을 지닌 인간일 터. 축복일수도 저주일수도 있다. 나의 예상대로라면 그대는 나의 검술인 무의 검을 완벽히 깨우칠 수 있을 것이며, 그대가 궁금해하는 해답의 답을 알려줄 것이다.”
아레스는 마치 바로크의 존재 여부와 그가 고뇌하고 있던 것을 모두 알고 있는 듯 기록해 놓았다.
“호흡을 해라. 한 동작 한 동작 움직일 때마다 힘 있고, 부드러운 호흡을 펼쳐라. 그것이 내가 너에게 알려줄 길이다.”
글자에는 바로크가 고뇌하고 있던 것의 답이 ‘호흡’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호흡을 하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곧 그의 손이 마지막 글귀가 적혀져 있는 곳을 걷어 냈다.
“너의 존재만을 위한 호흡. 그것이 무의 검을 얻는 길이 될 것이다… 나의 존재만을 위한 호흡?”
바로크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자신의 존재만을 위한 호흡이라니. 도통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나, 추측은 할 수 있었다.
“혹시 태극검의 단전호흡을 말하는 건가?”
바로크는 추측을 태극검의 단전호흡으로 생각하였다. 보통 이 아스트 대륙에서는 마법사들이나, 기사들이 마나를 축적하기 위해 마나심법을 한다.
하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자신은 태극검의 단전호흡을 하고 있었다. 아마 아스트 대륙에서 자신과 같이 단전호흡을 펼치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자신만을 위한 호흡일 수도 있었으며, 적힌 것과 같이 나의 존재만을 위한 호흡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동작 한 동작 움직일 때마다 어떻게 단전호흡을 펼치라는 거지?”
바로크는 또 다른 의문을 찾아내었다. 단전호흡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펼치는 편안한 자세에서 나오는 호흡법이었다.
한데, 거친 움직임을 행하면서 동작마다 호흡을 하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보는 수밖에는 없는 겁니까?”
바로크가 문득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의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할 것 같아도 해 보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고, 잘못된 점을 찾을 수 있으니까.
“좋습니다. 해 보죠.”
동상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바로크가 검을 집어 들었다.
해 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바로크는 호흡과 함께 검을 휘둘러보기 시작했다.

삼 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바로크는 동작과 호흡을 맞추는 데에만 주력하였다. 그 결과 그는 어느 정도 해답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해답 점은 바로, 몸을 가볍고, 부드럽게 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아레스의 검술은 태극검과 많이 흡사하였다. 단전호흡을 아레스의 검술의 동작을 펼치며 할 당시에 태극검의 사상과 같이 몸을 가볍게 하고, 부드럽게 해 주면서 동작을 취하고, 한 번 한 번 호흡을 하면 동작이 마치 하나가 된 듯 상당히 부드러워지고 빨라졌다.
더군다나, 처음 백 동작과는 다르게 거꾸로 하는 백 동작을 취했을 때, 호흡을 함께 병행할 시 상당한 효과를 더욱 내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우웅.
스우웅.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바로크의 움직임은 정말 자연과도 같았다.
있는 듯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바로크는 동상의 밑에 적혀 있던 글귀의 무의 검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무의 검.
그것은 어쩌면 기사들이 갖춰야 하는 오러 소드와 같았다. 하지만 전혀 달랐다.
오러 소드의 경우 힘을 발휘할 시 그것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의 검의 경우는 달라 보였다.
분명 무의 검은 동작을 모두 깨우치고, 그것을 깨우치게 된다면 오러 소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한 위력을 낼 것이었다.
하나, 무의 검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검과 같아 보였다.
이 호흡과 동작을 함께하는 것을 끝내고 모든 동작을 익힌 후에는 바로크에게서 완벽한 무의 검이 탄생할 것이었다.
그가 만들어 내는 무의 검은 마나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었다. 자연과 몸의 부드러움으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부드러우면서도 어떠한 것보다 강한 검인 것이다.
그렇게 바로크는 다시 2년 가까이 남은 시간 동안 아레스가 자신에게 가르쳐 준 것과 같이 검을 익히기 시작하였다.

“바로 내일이군.”
크론이 입가로 차를 가져가 한번 목을 축이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드디어 내일이었다.
내일이면 정확히 5년이라는 시간이 채워진다.
누군가는 죽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자신이 내건 4차 관문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무척 위험하고 힘든 일인 것이다.
“만약 모두들 살아 있다면 얼마나 변해 있을지… 후후, 기대되는군.”
크론의 입가로 짙은 기대감이 맺혔다. 그들의 성장이 기대되었다. 살아만 있다면 그들은 무척 강해져 있을 것이었다. 또한, 5년 전의 그 앳된 모습은 사라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