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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제8장. 무(無)의 검(3)


“하아하아.”
동굴의 벽에 천 개를 넘는 줄이 그어지고, 바로크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밖으로 나섰다. 여전히 추위는 매서웠다.
하지만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추위와 이곳 라벨혼 산맥의 환경은 자신을 더욱더 강인하게 해 주었다.
그가 막 라벨혼 산맥을 내려가려던 때였다.
그의 귀에 이제까지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더 거칠고 힘 있는 듯한 호흡 소리가 들렸다.
“후후, 이제는 녀석을 상대할 때도 됐지.”
바로크는 어느새 거친 눈보라 속에서도 청각과 시각, 촉각까지도 모두 반응하는 상태가 되었다.
한마디로 초감각에 하나가 더 붙여진 것이다.
바로크가 말하는 녀석이란 이곳 라벨혼 산맥의 우두머리와도 같은 녀석이었다.
자신도 멀찌감치 세 번 정도 본 적이 있었다. 설인에 해당하는 녀석이었는데, 녀석은 보통 녀석들에 비해 크기가 2.5배는 더 컸으며 힘이나 빠르기도 상당해 보였다. 바로크의 생각대로라면 아마 이 라벨혼 산맥에서 녀석을 당해 낼 수 있는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터벅터벅.
그의 발걸음이 산맥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녀석의 숨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움직이는 그의 허리춤의 검은 상당히 낡아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 같은 검이었다.
하지만 바로크는 검 따위에 구속되지 않았다. 아니, 그가 얻은 검술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의 검은 무의 검이기에.
쿠오오오오!
쾅쾅쾅쾅!
“가까이서 보니 더 크군.”
숨소리를 따라 이동하고 얼마 후, 설인의 앞에 그가 당도할 수 있었다. 설인의 크기는 자신의 생각보다 가까이 보니 더 컸다.
하지만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웃음이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땅이 진동하는군.”
단지 설인이 거칠게 달려오는 것뿐인데, 바로크는 땅이 거칠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 설인은 그의 앞에 당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수우웅.
쾅!
“한 번만 맞아도 뼈가 모두 으스러지겠어.”
설인의 주먹은 애꿎은 땅을 강타했다. 바로크는 반 발자국 물러나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피했다.
히죽.
바로크가 설인과 눈이 마주치자, 히죽하고 웃어 보였다. 설인이 더욱 거칠게 포효하며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난폭함보다는 침착함이 오히려 상대방을 죽이는 데에 수월하다는 것을 모르나 보군. 뭐 그것이 몬스터와 인간의 차이겠지.”
바로크가 가볍게 발을 움직이며 중얼거리고는 괜한 말을 자신이 몬스터 따위에게 하고 있다고 여기고는 검을 뽑아 든 뒤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우어어어?
설인은 몸을 돌리는 바로크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기회다 싶어 막 주먹을 휘두르려고 하였다. 그 순간, 설인의 몸 곳곳에서 피가 터져 나오며 녀석이 곧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너는 보지 못했겠지. 나의 검은 무의 검. 자연이다.”
쓰러지는 설인의 소리를 듣고 바로크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곧 그의 발걸음이 산맥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후우우, 춥군.”
마차를 타고 온 크론이 마차에서 내려 높디높은 산맥을 올려다보며 몸속 깊은 곳까지 차가운 냉기가 휘감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 그의 눈에 내려오고 있는 인영 하나가 보였다.
터벅터벅.
“……!”
크론은 그가 단번에 바로크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한데,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이유는 마치 라벨혼 산맥의 하나의 일부인 것과 같은 착각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로크 본인이 원래 라벨혼 산맥의 자연 중 하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으며, 하나의 거대한 산처럼 보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자신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주위로 풍겨지는 알 수 없는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멀리 있으면서도 자신까지도 옭아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며 내색하지 않은 채 그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살아남았군.”
“물론입니다.”
바로크가 라벨혼 산맥에서 내려와 자신의 바로 앞에 당도하자 크론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고, 바로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론이 본 바로크는 5년 전에 비해 상당히 남자다워져 있었다.
키는 자신과 비슷하게 181cm정도 되어 보였으며, 얼굴의 곡선은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또한, 다부져진 몸과 몸 곳곳의 상처는 그의 이제까지의 고생길을 보여 주는 듯하였다.
“가지.”
“예.”
둘에게 기쁨의 재회의 순간 따위는 없었다. 짧은 말과 짧은 답이 오갈 뿐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아레스는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마도 바로크나 다른 두 아이를 포함하여, 그들의 졸업은 늦춰지고, 대신 새롭게 들어왔던 신입생들이 꽤 많이 졸업하여 나갔을 것이다.
“앉지.”
“예.”
의아하게도 크론은 거대한 홀 안에 의자 네 개를 덩그러니 놓고는 앉을 것을 권유하였고, 그가 앉자 바로크도 곧 앉았다.
“혹시 다른 이들은 살아남았습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크론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추측이었다. 하지만 그의 본능은 그들이 살아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뚜벅뚜벅.
그때였다.
거대한 홀 안으로 침묵이 감돌던 중,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크론과 바로크의 시선이 향했으며 곧 입구로 그림자에 가려진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브록. 자네군.”
“예.”
하지만 그 인영은 실망스럽게도 브록이었다. 그에 크론과 바로크의 표정이 탐탁치 못하게 변했다.
결국 그들은 죽은 것인 듯 보였다.
그때였다.
다른 입구 쪽에서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로크와 크론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고, 이내 그림자에 가려졌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일론이군. 축하한다. 발카스 던전을 무사히 나온 것을.”
“감사합니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일론이었다. 일론도 상당히 자랐다. 바로크보다는 작았지만 평균 키 이상이었으며, 바로크가 짙은 남자의 뉘앙스가 풍긴다면 일론은 귀족의 표본을 보여 주듯 짙은 쌍꺼풀에 오뚝한 콧날. 남자답지 않은 입술로 아름다움을 뽐내었다.
또한 그의 몸 곳곳에서 풍겨지는 알 수 없는 기운은 상당히 강인하고 뜨거웠다.
“에르웬은 어찌 된 거지?”
“나타나라. 에르웬.”
딱.
스우웅.
에르웬의 여부에 대해 묻는 크론의 말에 브록이 무거운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푸른빛이 휩싸이며 어느덧 숙녀가 되어 아름다움과 여성스러움을 한껏 뽐내는 에르웬이 등장했다.
“마법사 에르웬. 크론 님을 뵙습니다.”
“그래. 너도 살아남았군.”
‘내가 마나를 감지하지 못하다니. 에르웬… 상당한 마법사가 되었군.’
크론은 무덤덤하게 인사를 받아 주는 척하였지만 속으로 상당히 놀랐다.
본디 마법사와 기사의 마나 차이가 당연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웬만한 마법사가 아니면 일정량의 마나를 소유하고 있는 기사들도 마나를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크론이 이른 경지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에르웬의 마나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말은 즉, 현재의 에르웬은 6서클의 후반부거나, 혹은 7서클 정도에 다다랐다는 것을 뜻하였다.
“죄송하지만, 크론 님. 한 가지 확인할 사실이 있습니다. 자리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확인할 사실이라… 그러지.”
일론의 말에 크론이 대충 예상한다는 듯 피식 조소를 띠우며 양 팔짱을 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 그들과 거리를 벌렸다.
뚜벅뚜벅.
일론과 에르웬은 바로크가 앉아 있는 곳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어땠나, 4차 관문은.”
“즐거웠지. 크큭.”
“나 또한.”
바로크의 말에 일론이 짙은 웃음을 지었고, 에르웬도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현재의 경지가 알고 싶군.”
“나 또한 마찬가지다. 너희 둘이 다가오는 것을 청각이 알아채지 못했으니.”
바로크는 자신의 청각이 그들의 존재를 알아내지 못했던 것으로 봐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비록 자신과 호각이거나, 아니면 아래의 경지이겠지만 확실히 강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확인해 보면 되겠지.”
스우웅.
일론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리고 막 검을 빼 들었다. 한데, 갑자기 그 검의 모양이 저절로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론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클레이모어였다.
씰룩.
“저것은…….”
“예, 드워프 일족이 사용하는 무기죠. 일론 녀석 발카스 던전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한 드워프의 잘린 머리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그 드워프…….”
드워프의 머리를 들고 나타났다는 말에 크론이 미간을 찌푸리며 설마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예. 아마도 드워프 최강의 전사라고 불렸던 이겠지요. 아마도 발카스 던전 안에는 그가 살아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일론은 그와 함께 있었던 듯싶습니다.”
“그렇군.”
브록의 설명에 크론이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모습을 드러낸 클레이모어가 빠른 속도로 바로크를 향해 쏘아져 갔다.
챙!
“그런 무기로 내 클레이모어를 막아 내다니…….”
힘을 실고 강하게 내려쳐지던 클레이모어는 바로크가 빼 든 녹이 슬대로 슬어 버린 검 앞에 막혔다.
그에 일론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마도 그가 얻은 이 검에 대한 무언가 자부심이 있는 듯 보였다.
후우웅.
화아악.
“에르웬…….”
“피하는 게 좋겠군.”
그렇게 일론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에르웬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 순간 그녀의 지팡이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가며 그대로 허공을 매섭게 얼리기 시작하더니, 곧 그것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이 되어 쏟아졌다.
타타탓!
일론과 바로크가 몸을 뺐다.
그리고 그 순간 바로크가 몸을 날려 에르웬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따악.
후우웅.
에르웬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가 사라졌고, 바로크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곧 그녀는 바로크의 바로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후웅.
스우웅.
탱!
바로크의 감각이 빠르게 반응하며 그대로 뒤를 가격했다. 하지만 곧 에르웬이 만들어 낸 실드에 막혔다.
“믿을 수 없습니다… 거울의 방에서 살아 돌아왔기에 상식을 벗어난 경지에 이르렀을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상식 이상입니다. 에르웬은 모든 마법을 단지…….”
“그래 단지 정신만으로 펼치고 있지. 시전어도 그렇다고 몸의 동작도 존재하지 않아, 녀석 크게 되겠어.”
놀라워하는 브록의 표정과는 다르게 크론은 꽤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원하던 것.
그리고 곧, 그의 시선이 에르웬에게서 일론과 바로크에게로 향했다.
‘너희들도 이제 너희들이 얻은 것을 보여 다오.’
스우웅.
화아악.
에르웬이 지팡이를 다시 한 번 휘둘렀다. 그 순간 화염을 머금은 불덩이가 일론과 바로크에게 거칠게 날아갔다.
그것을 보며 일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짜증난다, 에르웬. 내가 알고 싶은 건 너의 경지가 아니다.”
화아악.
스우웅.
“……!”
“저, 저건…….”
“재밌군.”
에르웬이 날린 불덩이가 일론의 근처로 다다르려는 때였다. 그 순간 일론이 자신의 검을 비틀어 검 면으로 불덩이를 받아 냈다.
그러자 검 면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오며 불덩이를 그대로 빨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크론은 더욱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곧 바로크에게 날아갔던 불덩이도 그의 앞에 당도했다. 그 순간 그가 검을 뽑아 들며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러자 불덩이는 허공에서 흩어져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크론 님이면 모를까. 저 녀석들 제가 당해 낼 수 없게 됐군요.”
“후후, 나라면 전력을 다해 저 세 녀석을 상대할 수 있기는 하겠지. 하지만 곧 따라잡힐 것 같군.”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