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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신병 오시리스 1권(5화)
chapter.2 국경 지대, 녹색의 병사들(2)
“여기에 기체를 둔다고요?”
사람이 너무 기가 차면 화도 안 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쥬드는 황당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기체를 둔다는 곳이 지붕도 없고 벽도 없는 허허벌판에, 단순히 칸막이 몇 개 세워둔 게 다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바닥에 나 있는 커다란 발자국들과 그사이에 멀뚱히 놓여 있는 쥬드의 거신병이 지금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건…… 마구간보다 못하잖습니까? 적어도 지붕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비도 오고 할 텐데 녹슬면 어떻게 하려고요?”
“펠릭시아 씨, 기체는 녹슬지 않아요.”
“예?”
“관리자들이 자기 능력을 돋보이게 하려고 관리를 안 하면 녹스는 척하는 것뿐이에요. 거신병의 자재는 철이 아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마나 회로만 잘 점검해 주면 녹슬지 않습니다.”
제프의 목소리에선 자신감이 느껴졌다.
“겉으론 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물질이에요. 아까 보셨죠? 저희 거신병들은 비도 맞고 바람도 맞지만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부품을 관리하려면 적어도 지붕 정도는…….”
“관리하기에 이곳보다 좋은 곳은 없어요. 사실 비블로스 공국 쪽에선 이미 연구 결과가 나왔어요. 거신병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숨을 쉬기 때문에 자연력이 강한 지역에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은 회복 방법입니다.”
“비블로스 공국……이라고요?”
비블로스 공국이라면, 수준 높은 관리자들을 배출해 내고 거신병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으로 유명한 멤피스의 속국이었다. 그곳에서 나온 연구 결과라면 믿을 만하다.
하지만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이런 변방의 구석진 곳에서 관리자 일을 하는 사람의 말을 믿어도 될까?
“이봐, 쥬드. 제프를 믿어라. 실수를 하나 해서 여기로 좌천되긴 했지만, 나름 알아주는 천재야. 나이가 어린데도 여러 가지 학문에 통달한 천재라고.”
“……어리다고요?”
“어. 아마, 네 또래 정도 되었을걸?”
“……?!”
놀라서 쳐다보자 제프는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놀라셨어요? 하하, 제가 좀 나이 들어 보인단 소리를 많이 들어서…….”
“몇 살입니까?”
“저요? 올해 열일곱이에요.”
“……!”
최소한 서른은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제프는 쥬드와 동갑이었다.
“그럼 수도에선 어째서 밀폐된 곳에 거신병을 넣어 두는 것입니까?”
“아아, 수도 쪽은 워낙 오염되어서 꺼내 놓아도 충전이 안 된대요. 가둬두고 마나를 주입하는 게 낫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사실은 가능하면 자연력이 풍부한 이곳에 놔두는 게 기체를 위해서는 더 좋습니다.”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자신감 넘치는 말이었다.
‘으음. 이거, 믿어도 되나?’
어쩐지 미심쩍어서 망설이고 있는데, 아피스가 손으로 그의 거신병을 가리켰다.
“탑승해 보지.”
“예?”
“탑승하고 움직일 줄은 알겠지?”
쥬드는 기가 차서 웃었다.
“물론입니다.”
“그래? 그럼 보여 주게.”
“그러죠.”
쥬드는 성큼성큼 다가가 거신병의 몸에 손을 얹었다.
기이잉―!
― 깨어 나라.
마나를 흘려보내며 속으로 강하게 염원했다.
그러자 번쩍 하고 거신병의 눈에서 불빛이 번쩍이면서 가슴의 탑승구가 열렸다.
푸쉬이이―
뒤에서 ‘오오!’하고 환호성이 나왔지만 기쁘지도 않았다.
그가 누구였던가? 토너먼트를 우승하고 호루스 최고의 기사가 되었던 몸. 동조해서 각성시키는 것 정도를 못 한다면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다.
탁― 휘익―
사다리 없이 탑승하기는 또 처음이었지만 쥬드에겐 그 역시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거신병의 양쪽 다리를 번갈아서 박차더니 순식간에 탑승구 속으로 몸을 쏙 집어넣었다.
우우웅―
그 순간, 거대한 병사가 생명을 얻었다.
팔짱을 낀 채로 진지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곧바로 하는군.”
“동조까지 1초도 안 걸렸어요. 과연, 호루스 최고의 기사라는 말은 그냥 얻은 게 아니었네요. 동조력, 친화력, 마나 제어.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게 없는데요?”
제프는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흥분해 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나는 저 거신병의 외모가 마음에 걸린다.”
“외모요?”
“저 깃털.”
옆에 있던 누트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특이하다 싶던데요? 보통 녹색은 동물과 합성된 듯한 모양이 많던데, 저 녀석은 완전한 인간이에요. 저렇게 멀쩡하게 생긴 거신병은 처음 봤어요.”
눈을 찡그리면서 한참을 살펴보더니 바니도 동의했다.
“으음, 맞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순수한 인간형은 싸움에 적합하지가 않잖아. 게다가 녹색은 갑옷도 없고.”
“맞아, 난 지금까지 녹색은 모두 동물이랑 섞인 모양만 있는 줄 알았어.”
“그리고 저 머리 위의 깃털. 암만 봐도 장식품 같은데……. 장식이 달린 거신병이 있나?”
모두가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아피스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태양왕.”
“예?”
“태양왕에 장식이 달려 있었다.”
누트와 바니, 그리고 이번엔 세베크마저 흠칫하고 놀랐다.
“팀장님, 태양왕은 또 언제 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하긴, 그 정도 수준이 아니면 여유롭게 장식이 달려 있을 리가 없긴 한데…….”
“그럼, 저게 태양왕 급의 기체라고? 하지만 녹색인데?”
“그렇긴 하지…….”
모두가 웅성거리는 사이, 제프는 갑자기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눈을 질끈 감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깃털……? 태양왕……?”
“제프? 왜 그래?”
“제1유적, 고문(古文). 왕의 기록. 전사에겐 단단한 뿔을, 왕에겐 영광의 깃을…….”
“어어?”
“황혼의 때에, 길을 여는 것은……. 여는 것은…….”
하지만 기억은 그곳에서 끊겼다.
아피스는 더듬거리는 제프의 등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그는 놀라서 눈을 화들짝 떴다.
“아, 아, 팀장님?”
“됐다. 일단 나중에 얘기하지.”
“예, 예.”
아피스는 멀뚱히 서 있는 쥬드의 거신병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내 말이 들리나? 신입!”
기잉―
“들리면 손을 들어 올려라!”
기이잉―
쥬드의 거신병이 손을 들어 올렸다.
“들리나 보군. 걸을 수는 있겠나?”
쥬드는 울컥한 듯 잠시 가만히 서 있더니, 보란 듯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기이잉―
쿠웅― 쿠웅―
“좋다! 걸을 줄은 아는군!”
“…….”
또 갑자기 가만히 서 있는 쥬드를 보며, 아피스의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큭큭, 팀장님. 얼굴을 팍 찡그린 모습이 눈에 선한데요?”
“꺄하하! 맞아, 맞아.”
“조용히 하도록.”
아피스는 양손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그 자리에서 기다려라! 곧 다시 오지!”
기잉―
곧바로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한편, 거신병의 탑승석.
쥬드는 눈앞에 있는 정육면체의 큐브를 들여다보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뭐? 걸을 줄은 안다고?”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이때만큼은 멤피스가 예전의 계급제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기 대장군으로 지목되었던 인재가 녹색 거신병을 소환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에 처박혀서는 용병 출신의 팀장에게 무시를 당한다고?
“젠장, 하다 하다…….”
마음 같아선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호루스 기사단장인 메나스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발밑을 보지 못하는 자는, 언젠간 밑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지.’
그 말이, 지금 쥬드가 분노를 참게 만드는 유일한 자물쇠였다.
우우웅―
“후우, 안 되지. 안 돼.”
흔들리는 큐브의 화면을 보며 쥬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큐브야말로 거신병의 심장이자, 그가 거신병을 조종할 수 있게 해 주는 핵심. 그와 거신병의 몸을 한 몸으로 만들어 주는 매개체.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동기화가 깨져 버렸다.
지직―
큐브에 양 손바닥을 대고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몸은 거신병의 몸.
그의 손과 발은 거신병의 손과 발.
날카롭게 다듬어진 감각이 거인의 눈이 되어 사방을 살폈다.
“음?”
기이잉―
그런데 그때, 뭔가를 느낀 쥬드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쿠웅― 쿠웅―
녹색의 거신병이 다가오고 있었다. 장갑이 장착되지 않은 날렵한 몸에, 황소를 연상시키는 머리 모양. 마치 과거에 존재했다는 소의 머리와 인간의 몸을 가진 몬스터와 비슷한 모습이랄까.
게다가 거신병은 주인의 모습을 닮는다더니 정말이었다. 아피스 본인처럼 무뚝뚝하고 강해 보이는 인상의 거신병이 성큼성큼 다가와 쥬드를 응시했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다.
기이잉― 척―
“……?”
아피스는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는가 싶더니…….
콰아아아―
“……!”
갑자기 앞으로 달려들면서 뿔을 들이밀었다.
“뭐, 뭐야?!”
무사히 옆으로 피해내긴 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마치 노를 젓는 것처럼 온몸의 체중을 실어 아래에서 위로 퍼올리는 듯한 박치기였다.
만약 피하지 못했다면 장갑도 없는 녹색의 거신병으로는 버텨 내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후우웅―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피스는 뿔을 한차례 좌우로 흔들더니, 쥬드의 다리를 향해 미끄러지듯이 달려들었다.
‘좋아, 해보자 이거지?’
쥬드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일종의 시험이나 신고식인 모양인데, 오히려 그를 우습게 보는 무지한 용병들한테 호루스 기사단 최고 기사의 능력을 보여 줄 좋은 기회였다.
카가가가강!
“하압―!”
번개처럼 위로 뛰어올라 마치 곡예를 하듯 양손으로 아피스의 뿔을 잡고 끌어당겼다. 거신병이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재빠르고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중간에 뿔에 긁힌 다리가 뻣뻣해졌지만 그래도 억지로 힘을 줘서 그의 등을 덥썩 끌어안았다.
그런데 그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까아앙―!
“큭!”
실제로 턱을 얻어맞은 것처럼 고개가 휙 뒤로 꺾였다.
거신병과의 동기화의 부작용이었다. 싸움에 익숙한 용병이나 기사들은 마인드 컨트롤을 해서 피해를 최소화하지만, 이제 겨우 첫 번째로 거신병 싸움을 치르고 있는 쥬드에게 그건 무리였다.
하지만 쥬드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양팔로 목 관절을 휘감으면서 다리로는 허리 부분을 꽉 조였다.
기이잉―
끼릭― 끼릭―
인간이었다면 단번에 숨통이 막혀서 승부를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거신병과 인간의 싸움은 달랐다. 처음엔 조금 통하는 듯했지만 아피스가 격렬하게 몸을 비틀며 양팔을 퍼덕거리는 순간, 몸이 위로 붕 떠오르더니 결국 버텨 내지 못하고 허무하게 뒤로 튕겨 나가 버렸다.
쿠구궁―
“크윽…….”
물수제비를 하듯 땅바닥에 몇 번씩이나 튕겨지자 숨이 턱 막혔다. 허리도 찌릿찌릿하면서 몸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아픔을 호소할 틈도 없었다.
쾅―! 쾅―!
거칠게 내려찍는 주먹질을 피해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콰앙―! 콰앙―!
아피스는 분노한 야생동물처럼 미친 듯이 땅을 내려찍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피하기만 하길 얼마, 쥬드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아피스의 거신병이 공격을 하다가 지쳤는지 갑자기 몸을 멈칫하는 것이었다.
‘지금!’
쥬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리찍는 주먹을 왼손으로 휙 끌어당기면서 머리가 있을 법한 쪽을 향해 오른쪽 팔꿈치를 거세게 휘둘렀다.
꽈아앙!
“흡!”
굉음이 울렸다.
아피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쥬드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일어나 앞으로 튀어 나갔다. 지금의 아피스는 허점이 수십 군데는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칼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손이 허전한 것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번개처럼 달려들어 곧바로 주먹을 휘두르는데…….
까앙!
“……!”
과연! 관록 있는 용병 출신이라는 걸까?
머리를 흔들어 뿔로 주먹을 쳐낸 아피스는 언제 허점투성이였냐는 듯 허무할 정도로 위기를 쉽게 빠져나가 버렸다.
쿵―! 쿵―!
기이잉―
곧장 다시 달려들려던 쥬드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뒤로 물러선 아피스가 이제 그만하자는 듯 자세를 풀며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