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거신병 오시리스 1권(17화)
chapter.6 붉은 불꽃의 태양왕(4)
“빨리 거신병에 타세요. 이유가 있어서 그래요. 세베크 씨가 부축해 줄 테니 부상은 걱정하지 마시구요.”
따스한 염려가 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쥬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아닙니다. 나는…….”
왠지 목이 멨다.
“나는…… 팀원들을…….”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뒷말을 삼켰다.
……자신은 팀원들을 버렸다.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아피스가 어깨를 찔렸던 그 순간, 그는 분명 팀원들을 버렸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속여도 자기 자신 만큼은 진실을 아는 법이다.
“괜찮아요. 오히려 저는 부추겼잖아요. 그렇죠?”
“……제프.”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제 다시 팀이니 잘 부탁드린다고. 그럼 된 거예요. 저희는 펠릭시아 씨와 같은 팀으로서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
가슴이 먹먹했다. 마음에서 솟구친 열기가 눈시울을 뜨겁게 달궜다.
모든 것을 알고도 다 용서하고 받아 주는 동료가 그곳에 있었다. 출세나 성공보다 더욱 값진 무언가가 쥬드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보기 좋은 모습이군.”
“……!”
기이잉― 기이잉―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양 갈래로 다듬은 콧수염. 잘 그을린 갈색 피부와 강인하게 단련된 육체. 주름 한 점 없이 빳빳한 제복의 소매엔 새빨간 피가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그에게선 한시도 시선을 뗄 수 없는 위험스런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하나 진심으로 묻고 싶군. 정말로 나와 대적할 텐가?”
맨몸으로 거신병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비할 바 없이 당당했다.
그는 아피스의 거신병, 그리고 그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는 제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부관들이 다쳤을 텐데?”
“…….”
야누스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대적할 거냐고요? 에이, 이미 선택권은 없는데 무슨 말씀을.”
“포기하는 게 좋을 텐데?”
“그럴 순 없죠.”
“선을 넘은 것은 그쪽이다. 내 부관을 죽인 것은. 도저히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그거야……. 어라? 죽이지 않았을 텐데요?”
“결과적으론 죽었다. 그것도 내 품에서.”
힐끗―
야누스의 소매에 묻은 새빨간 피가 눈에 띄었다.
제프의 눈이 찌푸려졌다.
“당신, 설마…….”
푸쉬이이―
그때 아피스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천이 새빨갛게 물들었음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야누스를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우린 떠나겠소.”
“군부와의 계약을 위반하고 말인가?”
“상관이 죽이려 드는 것도 계약이라 할 수 있을까. 어차피 계약 따위 의미가 없었잖소.”
“…….”
야누스는 의외로 선선히 수긍했다.
“하긴 그렇긴 하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유는 묻지 않겠소. 들어서도 안 될 테니.”
“…….”
“다만 우린 죽지 않을 것이고, 우리 팀원들 또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오.”
아피스의 시선이 쥬드를 향했다.
쥬드의 고개가 숙여졌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을 한데 묶는 단단한 인연의 끈을 느꼈다.
가족을 보는 듯한 따스함이 그곳에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를 보듬어 안는 든든한 울타리가 만들어졌다.
착각일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야누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도는 듯했다.
“수상한 시국이다. 시대가 격변하고 있어. 한 달만 빨랐어도 결과는 달랐을 것을…….”
“이해하오.”
“이해한다? 아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시대를 느끼기에 너희는 너무 자유롭다.”
기이잉―
야누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시선, 위압적인 패기가 모두를 덮쳤다.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거신병 넷과 맨몸의 한 사람과의 대치지만 불안해 보이는 것은 오히려 거신병 쪽이었다.
“보내줄 수 없다. 이곳에서 역사를 지우겠다.”
우우웅―
군왕의 눈에 흐르는 것은 살기. 그리고 시대를 제패한 자의 무심함.
그의 입에서 하나의 이름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들의 시간은 제자리에서 멈춰 버렸다.
“태양왕.”
콰아아아―
나타났다. 물감을 칠하듯 신기루처럼 신비롭게.
그들의 뒤에서 유령처럼 몸을 내밀고, 황금색으로 빛나는 신의 징벌을 휘둘렀다.
쩌어엉!
붉은색의 잔인한 거신이 화산 같은 힘을 내뿜으며 폭음이 터졌다.
산산조각 난 파편들이 하늘 높이 비산했다.
그리고 비명이 터졌다.
chapter.7 태양왕의 징벌, 죽은 자들의 신(1)
“바니―!”
한순간이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짧은 순간에 태양왕은 나타났고, 거대한 징벌창으로 바니가 탑승한 고양이 얼굴의 거신병을 후려쳤다.
육중한 폭음과 함께, 녹색의 거신병이 하찮은 돌멩이처럼 바닥을 굴렀다.
‘어떻게 저런 능력이!’
반칙 같은 힘이었다. 저 거대한 몸체에 강력한 힘으로 유령처럼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기척을 감추는 ‘은신’이거나 공간을 이동하는 ‘순간 이동’이라는 말인데, 어느 쪽이든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콰과과과―
“윽!”
곧바로 수평으로 휘두른 참격에 녹색 거신병들은 일제히 우수수 뒤로 튕겨져 나갔다.
감히 상대할 수 없는 힘, 아예 급이 다른 능력이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울리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격렬한 진동 후에 조심스레 눈을 뜨자 악어 형태의 머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베크?”
기이잉―
그가 무사했던 건 세베크가 한쪽 손으로 감싸 줬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아피스, 누트, 세베크의 기체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바니의 기체는 꿈틀거리긴 하지만 좀처럼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대체……!”
절망적이었다. 저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란 말인가.
머릿속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떠올려 보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대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주황색 기체가 두 자리 수로 몰려와도 상대가 가능할까 모르겠다. 마나포 수십 개로 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도 왠지 저 태양왕은 멀쩡하게 서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 태양왕.’
어째서 적들이 그토록 태양왕을 두려워했는가, 어째서 ‘일인 요새’라는 칭호를 들으며 군부의 최고 자리를 차지했는가.
그 모든 답이 눈앞에 있었다.
상대할 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무적(無敵).
쿠구궁― 쿠구궁―
괴물이 걸어왔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지축이 울렸다.
경계하는 일행을 무시하고 똑바로 걸음을 옮겨 야누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우우웅―
마치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 같은 모습이었다.
손을 내민 태양왕에게 올라 탄 야누스는 가슴의 조종석으로 들어갔다.
“아! 그러고 보니!”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야누스는 분명 태양왕에 탑승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 태양왕이 스스로 움직여서 공격했단 말인가? 조종사도 없이?
“콜록― 콜록― 예, 맞아요. 태양왕은 그럴 수 있어요.”
“제프?!”
“하하. 예. 무사하셨네요. 펠릭시아 씨.”
어느새 옆에는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제프가 서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아피스 팀장님도 위태위태해서요. 제가 손 위에 있으면 짐만 되겠더라고요.”
“그렇군요. 그럼 바니는? 바니는 괜찮습니까?”
“에이, 당연하죠. 무릎 쪽 회로에 손상이 갔을 뿐이에요. 그나저나 걱정해 주시네요. 바니 씨가 좋아하겠어요.”
“그런 말이 나옵니까? 이런 상황에서?”
눈을 찌푸리자 제프는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아, 참. 태양왕에 대해 궁금해 하셨죠? 저건 원격 감응이라는 거예요. 큐브와 조종자는 원래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그 연결을 좀 더 강화하고, 큐브에 숨겨진 거신병의 자아를 이끌어 내면 되요. 물론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지만요.”
“……!”
“큐브와 조종자가 둘 다 강하다면 훨씬 쉽게 돼요. 대륙 전체를 찾아보면 몇 명 있어요. 크로노스 쪽의 해신이랑 뇌신이 그렇고……. 살렘 쪽의 세라핌도 아마 가능할 거예요.”
제프의 말엔 막힘이 없었다. 과연 비블로스 공국 연구소 출신의 천재라더니 얄미울 정도로 해박했다.
원격 감응이라는 것은 쥬드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유물학을 공부할 때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는 식으로 써져 있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가능했단 말이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는 태양왕과 그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제프.
어느 쪽도 현실 속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결론은, 펠릭시아 씨도 해 보라는 거예요.”
“예? 뭘 말입니까?”
“원격 감응이요.”
“……?!”
놀라서 쳐다 보니 제프는 언제나처럼 싱글벙글이었다.
“태양왕이 하는 걸, 저보고 하라는 겁니까?”
“네, 그렇죠.”
“그, 그런 걸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합니까?
“빨리요! 우린 위험한 상황이잖아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콰과가가강―!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바니의 기체를 부축한 누트와 아피스의 기체가 태양왕이 휘두르는 징벌창을 피해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창에 얻어맞을 것처럼 위태위태한 움직임이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쥬드가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제프가 턱 어깨에 손을 얹었다.
“태양왕이 했다면 펠릭시아 씨도 할 수 있어요.”
“……뭐라고요?”
“대장군한테 들으셨죠? 녹색 거신병의 비밀. 마차에 있을 때 살기가 터져 나왔다는 건 다 얘기해 준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
“아마 변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기도 전에 과도하게 화를 냈을 거구요. 그렇죠?”
쥬드의 얼굴에 놀람이 번졌다.
대체 이 사람은 그를 얼마나 놀래킬 작정인 건가.
“에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별거 아니에요.”
“이게 별거 아니란 말입니까?”
대장군의 행동을 예측하고, 제 손바닥 위에서 나라를 쥐락펴락할 수도 있는 희대의 전략가를 어찌 별거 아니라 부를 수 있을까.
“그냥 호기심이 많다고 해 둘게요. 펠릭시아 씨와 재능의 방향이 다를 뿐이에요. 펠릭시아 씨도 숨기는 능력이 있잖아요. 그쵸?”
“……!”
지저분한 머리카락 사이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은색 눈동자가 별처럼 빛났다.
“아니에요?”
“……대체 모르는 게 뭡니까?”
“하하, 모르는 거 많아요! 두 살 때 본 동화의 뒷부분 같은 거?”
씨익 웃는 얼굴은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쥬드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자 갑자기 제프가 화들짝 놀라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등을 돌렸다.
“이크! 빨리 하세요!”
“예?”
“징벌창이 날아와요!”
“……?!”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에게 날아온 것이 아니었다.
포탄처럼 쏘아진 창이 세베크가 탄 기체의 허리를 훑으며 땅속 깊이 날을 틀어박았다. 세베크의 기체가 옆으로 휘청 흔들렸다. 단지 스쳤을 뿐인데도 기체 옆구리 근처가 폭발한 것처럼 터져 나갔다.
후두둑―
그리고 그 파편과 흙먼지가 두 사람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