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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미솔로지 1권(9화)
4 정착(3)


인수의 입가에는 조롱과 경멸이 뒤섞인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은 애초에 왜 우리가 모였는지부터 기억하는 게 좋겠군요. 죽으려고 왔으면서 이제 와 살려고 멍청한 말이나 해대며 꾀를 부리다니. 정말…… 추하군요.”
“뭐라고요?”
추하다는 그 말에 아래로 향하던 그녀의 눈이 다시 위로 향했다.
“추하다고요? 지금 추하다고 그랬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옅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 속 초점을 흐리며 흔들리던 그 얇은 악마의 실은 이제 광기라는 모습으로 녹아내려 눈동자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흥분한 듯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고통 때문에 힘들어 보였지만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쓰러지듯 인수의 옷깃을 두 손으로 잡았다.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추하다고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그녀의 눈은 강렬하게 일렁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인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초점을 잃은 그녀의 눈은 인수의 뒤쪽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다른 뭔가라도 있듯 말이다.
“당신들 남자들이잖아! 그런데 나 보고 추하다고?!”
그녀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횡설수설 그저 소리를 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인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다시 한 번 내려다보더니 자신의 옷깃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을 그대로 내쳤다.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중심을 잃었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아…….”
퍽하는 큰소리 이후, 그녀의 입에서는 고통스런 신음조차 간신히 흘러나왔다. 몇몇 여성과 남성들이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인수는 개의치 않는 듯 조금의 동요도 없이 여전히 차가운 눈빛을 한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는 광분인가요? 정말 추하군요.”
“이봐요!”
“그만하시죠. 아무리 그래도 지금 건 당신이 심했습니다.”
그녀를 부축하러 나온 여성과 남성, 두 사람이 인수를 말렸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또 알고 싶지도 않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사정없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니 최소한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는 주지 말란 말입니다.”
인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서는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 김인수 씨! 어디 가시는 겁니까!”
성진이 급히 그를 불렀지만 인수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가볍게 답했다.
“그분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쓸데없는 일들도 없어지겠지요.”
“하, 하지만 안에는 워커가……!”
“제,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성진과 창걸의 그 말에 인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돌아서지 않은 채 괜찮다는 듯 오른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괜찮습니다. 전 누구와는 달리 헛소리는 안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의 목소리에는 순간 짙은 경멸이 담겼다가 사라졌다.
“그분이 당했다면 유리병 따윈 소용도 없다는 거고, 당하지 않았다면 위험할 것도 없다는 거죠. 어느 쪽이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도 아니고 아직 처리하는 중이라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성진의 그 말에 발걸음을 떼려던 그는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몸을 돌려 성진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경우라면 확실히 말은 되겠지요.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그려졌다. 조소나, 경멸이 담겨 있지 않은 그런 평범하고 담담한 미소였다.
“애초에 그 가능성 때문에 30분이나 더 기다린 거거든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몸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기다리는 김에 좀 더 기다리지 그러셨습니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의 뒤쪽에는 어느새 내려온 진강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군요.”
진강은 인수와 사람들의 모습을 쭉 둘러보았다. 주저앉은 주선과 그런 그녀를 부축하는 두 남녀,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 대충 몇 가지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듯한 진강이었지만 그것을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럼 모두 올라가시죠. 4층 주민 편의 시설들을 살펴봤는데 문화 강좌실들은 강좌 대신에 이불과 화투, 바둑판이나 장기판들이 가득하더군요. 방도 여러 개니 남녀로 나눌 수도 있고 꽤 넓은 편이니 거기서 쉬시면 될 겁니다.”
진강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들을 지나쳐 문 쪽으로 다가갔다.
“크아!”
“크오! 크오!”
셔터에 가로막힌 워커들이 그들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
진강은 가만히 워커들을 쳐다보았다. 손짓 한 번으로 가볍게 처리할 수 있을 텐데도 그는 어째선지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
“크아! 크아!”
그리곤 이내 진강은 워커들을 뒤로한 채 몸을 돌렸다.
“모두 올라가시죠. 배가 고프신 분들을 저쪽 가게나 2층 식료품 매장에서 챙겨서 올라가시도록 하십시오.”
사람들은 그제야 하나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주선 또한 다른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걸었고 정진과 몇몇 사람들은 그런 주선을 멀리하듯 먼저 앞으로 나아가 버렸다. 하지만 인수만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서서는 진강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시간이 지나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위층으로 올라갈 때까지도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는 인수의 모습에 진강이 물었다.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주선과의 대화 때와는 달리 인수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차갑던 그의 말투는 지금은 부드럽고 정중하기만 했으며 또한 겸손했다.
“괜찮으시다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왜 우리인지 말입니다.”
인수의 물음에 잠시긴 했지만 진강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풀렸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당신께서는 분명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솔직히 저로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여전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신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숨긴 적은 없습니다만?”
“물론입니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입니다.”
“무엇이 말이지요?”
“만약 세상이 곧 멸망하고 제가 그 멸망을 피할 뿐만 아니라 그 멸망 후에도 살아갈 수 있는 당신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면, 저라면 친한 주변인들을 살리려 노력할 거 같거든요. 만약 그런 이들이 없다고 해도 최소한 더 효율적인 인간들을 살릴 테고요. 의사나 기술자 같은 자들 말입니다.”
“…….”
진강은 말없이 가만히 인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인수는 한층 더 조심스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당신께서는 자살 모임 같은 곳을 찾아오셨지요. 그리곤 이렇듯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대체 저희 어디에 당신께서 선택할 만한 이유가 있는 거지요?”
“…….”
진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진강을 바라보는 인수의 얼굴에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묘한 우월감이 뒤섞여 있었다. 마침내 진강이 입을 열었다.
“지금 묻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궁금하셨다면 버스 안에서도 물을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지요.”
인수의 그 대답에 진강은 다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고 있다는 것 같군요.”
진강의 그 말에 인수의 표정에 우월감이 더해졌다.
“그렇다면 말씀해 보시지요. 왜일 것 같습니까?”
“죄책감 때문이겠지요.”
인수의 그 말에 진강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모습에 인수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던 자들. 설사 지키지 못할 상황이 온다 해도 어차피 죽었을 사람들이라면 그때의 죄책감은 적을 테니까요.”
“…….”
진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진강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밖에 서 있는 워커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크아……!”
콰지지직!
워커들의 온몸이 일제히 뒤틀렸다. 몸 밖으로 부러져 튀어나온 뼈들과 터져 나오는 말라비틀어진 피들. 끔찍한 장면이었지만 진강의 표정은 그저 슬프기만 했다.
“…….”
워커들을 끝낸 후 진강은 다시 인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대단하시군요. 이 집단 속에 설마 당신 같은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 속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도 아십니까?”
진강의 물음에 인수는 갑자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건물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물론입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며 말했다.
“결국 우린 다 죽는다는 소리지요.”
“…….”
담담한, 혹은 약간의 장난스런 말투. 하지만 진강은 인수가 어째서 몸을 돌렸는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목소리를 가장한다 해도 그 속에 묻어나는 절망은 숨길 수 없었다.
“저도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뜻밖에 그 물음에 걸음을 옮기던 인수는 진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 궁금하시지요?”
인수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기대가 묻어 있었다.
“당신께서는 왜 죽음을 선택하셨던 거죠?”
진강의 질문에 인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잡한 표정이 스쳐 지나가듯 하더니 이내 그의 얼굴에 장난스러우면서도 자조가 섞인 듯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글쎄요. 쓸모없는 게 너무 많아서. 그리고 그 쓸모없는 것들과 내 자신이 별 다를 게 없어서. 라고 해두죠.”
“……그렇습니까?”
진강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인수는 그렇게 진강을 놔둔 채 위로 향했다.
“…….”
홀로 남은 진강은 다시 문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해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