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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미솔로지 1권(10화)
5 나이트곤(Night―Gaunts)(1)


해가 지고 저녁이 되자 사람들은 모여 앉아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행히 부탄가스와 토치도 충분한 것 같군요.”
그들 앞에는 몇 개의 토치 위 냄비들 속에서 밥과 즉석 요리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애초에 문화 강좌를 염두하고 설계한 방들이었기에 요리 강좌를 위한 전기레인지도 한구석에 확실히 달려 있긴 있었지만, 그들은 최대한 전기 사용량을 줄이고 있었다.
“자가발전기가 달려 있다고는 해도 솔직히 여기 있는 사람들로서는 그 정확한 발전 전력량조차도 알 수 없고, 거기다 혹시라도 고장이라도 나면 그걸로 끝이지요. 그러니 최대한 사용 전력을 줄이는 게 최선이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건물 여기저기를 일일이 돌며 방범 카메라, 조명 등 쓸데없는 전기 사용을 줄이기 위해 부분적으로 전력들을 차단했던 그들이었다.
“전기는 그렇다 쳐도 생활용수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식수야 지하 냉동 창고에 쌓여 있는 생수면 충분하지만, 생활용수로까지 쓰기에는 부족했다.
“…….”
진강은 답을 해 주지 못했다.
“아마 물탱크가 있지 않을까요? 아까 보니 물이 나오긴 하던데요.”
“요즘은 지하수를 끌어오거나 빗물들을 받아서 사용하는 시스템도 있다던데 이 건물도 그렇지 않을까요?”
“건축 관련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게 안타깝군요.”
“애초에 죽으려고 모인 사람들에게 뭘 바라겠습니까.”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인수가 입을 열었다.
“아, 물론 두 분은 빼고 말입니다.”
그는 성진과 성은을 가리키며 그렇게 덧붙였다.
“근데 폐교의 그 교실들을 보면 어느 정도 식견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인수의 말에 성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실내 인테리어라면 예전에 제가 어깨너머로 몇 번 보고, 참여한 적이 있지만 이런 쪽의 건설이나 시스템은 문외한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께서는 높은 식견을 가지고 계신가 보죠?”
주선이 인수를 향해 비꼬듯 말했다. 하지만 그런 주선의 말에 인수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웃고는 있었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한심함이 가득했다.
“이미 말했다시피, 애초에 죽으려고 모인 사람들에게 뭘 바라겠습니까?”
“흥!”
“다 된 것 같네요.”
밥이 다되자 소연과 정진이 냄비를 열고 밥을 그릇에 나눠 담기 시작했다. 사람들 앞에는 각자 육포나 통조림 등 식성에 맞는 음식들이 들려 있었다.
“근데 이렇게 계획 없이 막 먹어도 되는 건가요? 아무리 쌓여 있는 물량이 있다고는 해도 결국 제한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자세한 건 내일 의논하도록 하지요. 식량이나 생활용수나 전기량 등등 지금 정하려고 하면 너무 힘드니까요.”
과연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이라는 것인가. 기존 삶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 혹은 극단적으로 적응해 죽음을 선택한 이들이었지만, 비록 진강의 도움과 충격적 경험들이 있었다고는 해도 한나절 만에 그들은 살아갈 계획을 입에 담고 있었다.
비록 여전히 복잡한 마음에 입조차 떼지 못하고 있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확실히 놀라운 변화였다.
식사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준비하던 시간의 1/3도 안 돼서 사람들은 빈 그릇과 함께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쓰레기 처리도 문제군요.”
식사가 끝나자 그들 앞에는 조금 전에는 없었던 쓰레기들의 산이 쌓여 있었다.
산을 이루고 있는 대부분은 포장지였는데, 물론 면적이 넓어지고 그 사이에 빈 공간이 많아져 그렇다는 원리는 알고 있었지만 내용물이 들어 있었을 때보다 빈껍데기만 남은 지금이 더 많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신기하기만 했다.
“……적어도 오늘 이건 제가 처리하도록 하죠.”
진강은 어디선가 검은 봉지를 가져와 쓰레기들을 담기 시작했다.
“그릇들은 우선 싱크대에 갖다 놓으시고, 슬슬 주무실 준비를 하도록 하지요. 수가 더 적은 여성분들께서 B강좌실을 쓰시면 될 겁니다. 이불이나 담요, 베개 수 확인하시고 부족하면 밑에서 가져오십시오.”
문화 강좌를 위해 마련된 교실들이었지만 실제로는 동네 어르신들의 휴게실로 이용되던 만큼 담요나 베개, 이불들도 있었고 또 부족한 만큼 상점에서 가져오면 되기에 침구나 자리는 문제가 없었다.
“여성분들 방은 못 봤지만 여긴 아까 제가 확인해 봤는데 이불은 2장, 베개는 3개가 모자라더군요.”
“그럼 제가 내려갔다가 오도록 하죠. 여성분들도 부족한 수를 알려 주십시오.”
사람들은 저마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시작했다.
침구 조달이나 청소 같은 대체적으로 궂은일을 하는 것은 성진, 성은 형제였고 뒤를 따라 정진과 소연, 인수 같은 이들이 진강과 다른 사람들을 도왔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고 검은 밤이 찾아왔을 때 사람들은 복잡한 마음을 가진 채 잠자리로 향했다.
“가능하면 밤중에는 개인행동은 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진강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분들께서는 들어가신 뒤 문을 잠그도록 하시고요.”
진강의 그 말에 몇몇 남성들의 표정이 살짝 안 좋아졌다. 특별히 다른 마음을 먹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상한 취급을 받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그 심기를 드러냈다.
“잠깐만요. 굳이 서로를 그렇게 경계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까 저분이 말씀했다시피 우리가 왜 여기 모이게 됐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 중 이상한 마음을 먹을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소연 또한 조심스럽게 거들었다.
“괜히 서로에 대한 불신을 조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진강은 말을 꺼낸 최지우라는 남성과 소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강이 뭐라고 하려는 순간 인수가 끼어들었다.
“이분이 하신 말씀은 애초에 누구를 못 믿거나 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본래 인간이란 위기 상황일수록 종족 번식의 본능이 강해지지요. 전쟁 후 베이비붐 현상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하물며 이런 상황입니다. 그 누구라도 순간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그것은 양쪽 모두에게 비극이겠지요.”
인수는 말을 이어 가는 중간 진강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진강은 그에 대한 답으로 가볍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고 인수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문을 잠그는 것은 여성분들을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서 그러한 여지를 조금이라도 더 줄이자는 거지요. 마치 발코니에 안전대를 설치해 놓듯 말입니다.”
인수의 그 말에 지우와 소연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런 좌중의 분위기에 인수는 자랑스레 미소를 지으며 진강을 바라보았다.
“훗. 좀 쓰다듬어 주지 그래요? 저렇게 꼬리까지 치고 있는데. 안쓰럽잖아요.”
그러나 곧바로 들려온 주선의 그 말에 인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만하시죠.”
인수가 주선을 향해 사납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진강이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인수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해 보였다.
“대신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든 이제 모두 주무시도록 하시죠. 내일은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을 테니까요.”
진강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에 쓰레기 봉지를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진강 씨께서는……?”
“저는 옥상에서 이걸 처리하도록 하죠. 또 생각할 것도 있고요. 신경 쓰지 마시고 먼저 주무시도록 하십시오.”
“잠자리는 어디로……?”
“저는 오늘은 5층에서 자도록 하겠습니다.”
진강이 옥상으로 향하고, 여성들도 곧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선과 인수의 시선이 허공에서 사납게 부딪히긴 했지만 다행히 그저 그걸로 끝났다.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마음을 지닌 채 잠자리에 들었고 고요한 정적과 암흑이 건물 전체에 내리깔렸다.
“…….”
옥상 문 앞에 도착한 진강이 가볍게 손을 내젖자 문에 달려 있던 자물쇠는 힘없이 풀려 버렸다. 진강은 자물쇠를 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옥상 문을 열었다.
“하아.”
상쾌한 밤바람이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가자 그는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밤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툭.
그는 들고 왔던 쓰레기 봉지를 앞쪽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그가 다시 손을 움직이자 쓰레기 봉지에 푸른 불길이 일었다.
화르륵!
불길은 강렬하게 치솟아 올랐다. 쓰레기 따위는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물며 철로 된 통조림통조차도 완전히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태울 것이 없어졌음에도 불길은 꺼지기는커녕 더 기세를 올리며 맹렬히 타올랐다. 진강은 그 푸른 불길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색의 노덴스를 따르는 이들아.”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5층 사무실에서 잠에 취해 홀로 중얼거리던 그때보다도 더 음산했고 분명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곤 있었지만 그의 입이 아닌 마치 저 멀리 아래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절대 심연의 수문장. 밤하늘의 악몽들아. 나의 부름을 들어라.”
그의 목소리에 저 하늘 위 별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진짜 별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검은 그림자들이 밤하늘 별들을 가리며 그를 향해 내려서고 있었다.
“……왔구나.”
대부분의 검은 그림자들은 그의 머리 위에 머물렀지만 그것들 중 일부는 그 앞에 내려앉았다. 맹렬히 타오르던 불길은 꺼지고 그림자들을 마주한 진강의 목소리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나이트곤(Night―Gaunts)들이여.”
그의 앞에 내려앉은 것은 성인 남성 몇 명은 족히 감쌀 것 같은 커다란 한 쌍의 박쥐 날개와 매끈한 몸통에 그대로 달려 있는 거대한 입. 이마에 달린 휘어진 뿔과 날개 끝에 달린 미늘 그리고 촉수같이 긴 두 다리 끝에 억샌 발톱을 지닌 기괴하게 생긴 어떤 생물들이었다.
그것의 이름은 나이트곤. 백색의 노덴스를 따르는 검은 짐승들로 절대 심연으로 향하는 문을 지키는 수문장들이었다.
나이트곤들은 그 거대한 몸과 커다란 입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조그마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것들의 눈은 몸체 바로 위에 붙어 있었는데 마치 검은 진주와 같이 빛을 내며 진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고 있다.”
그러나 진강은 마치 그것들과 대화를 나누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고 있다고 했을 텐데!”
진강의 목소리가 다시 변하고, 그의 몸 뒤로 검은 어둠이 일렁이더니 이내 기괴하게 생긴 검은 손이 나이트곤들 중 하나를 잡아챘다. 그 팔은 마치 다른 차원에서 뻗어 온 것처럼 기괴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부분은 낚시줄처럼 가느다랬으며 어떤 부분은 거인의 것처럼 거대했다. 하지만 설사 똑같은 부분이라도 보는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네 주인과 한 약속은 지킬 거다. 그러니 재촉할 생각은 하지 마라. 너희는 너희 주인이 시킨 것처럼 내 명령을 따르면 되는 거다.”
나이트곤들은 진강을 향해 가만히 몸을 숙여 보였다.
“그래 그래야지.”
진강의 목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고, 그는 피곤한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이트곤을 잡고 있던 검은 손 또한 사라졌다.
“돌아가라. 그리고 크투가의 자식들이 이 땅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어라.”
진강의 그 말에 나이트곤들은 곧바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내려앉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그마한 날갯짓 소리도 없이 그들은 정적 속에서 밤하늘 저 너머로 사라져 갔고 주변을 날아다니던 나머지 나이트곤들 또한 그들을 따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