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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미솔로지 1권(12화)
5 나이트곤(Night―Gaunts)(3)


화르르륵!
지지지직.
“…….”
바닥에 앉아 있는 진강의 주위로 스파크와 불길이 일었다가 사라진다. 때로는 푸른 불길이 일다가도, 검은 불길이 일었고, 짧은 스파크가 튀다가도 때로는 어느 순간 거대한 용처럼 방 전체를 덮어버렸다.
“후우.”
그의 숨과 함께 그의 입에서 불길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얼핏 워커들의 그것들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불길했다.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과연 ‘기어드는 혼돈’이군. 설마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는 몸을 일으키며 몸 여기저기를 털어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몸에서는 검은 어둠이 흡사 먼지처럼 떨어져 내렸다.
똑똑.
“……!”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진강은 당황했다.
“저, 아직 주무시나요?”
소연의 목소리에 진강은 급히 방 곳곳에 붙여 놓았던 부적을 떼어냈다. 부적들은 대부분 반쯤 타거나 찢겨져 있었다. 그는 그 잔해들을 모아 손안에서 꽉 쥐었고 그것들은 곧 푸른 불길 속에 완전히 사라졌다.
“아, 아닙니다. 들어오십시오.”
그는 손을 털어 푸른 불길을 끄고는 그렇게 말했다. 곧 문이 열렸고 소연이 육포와 생수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
“혹시나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출출하시면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자신의 손으로 향하는 진강의 시선에 그녀는 멋쩍은 듯 말했다. 그리고 말이 끝날 때쯤 갑자기 뭔가를 깨달은 듯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져 갔다.
“물론 출출하시면 언제든 밑에 상점으로 가 다른 맛있는 걸 드실 수도 있겠지만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마친 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저 한심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진강은 그녀에게 다가가 육포를 받아 들었다.
“안 그래도 출출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아니요.”
진강은 가만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특별한 어떤 감정은 묻어 있지 않았지만 흔들림 없이 차분한 그 눈동자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럼 전 이만…….”
어색한 듯 몸을 돌리려는 그녀를 진강이 잡았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그녀와 진강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그녀는 마치 얼어붙은 듯 잠시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진강의 눈동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잠시 후 진강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책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저 너무 두려워하실 필요 없다는 걸 말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저, 저는……!”
“변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대의 눈동자에는 지금 두려움이 담겨 있으니까요.”
“…….”
“다만 궁금한 것은 그렇게 두려우면서도 어째서 굳이 올라 오셨냐는 겁니다. 특별히 뭔가 노리는 것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대답은 안 해 주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문을 나서려던 그녀는 그대로 멈춰 섰다.
“올바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두려움만 담겨 있는 건 아니에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홀로 남은 진강은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육포 봉지를 뜯었다.



6 수확(1)


“……?”
진강이 밑으로 내려왔을 때 강좌실에는 소연을 포함해 5명밖에 없었다.
“다른 분들께서는……?”
밑으로 내려온 진강은 확연히 줄어든 사람들의 수에 그렇게 물었다.
“주선 씨와 다른 두 분은 B강좌실에서 쉬고 계시고, 나머지 분들은 지하로 가셨어요.”
“지하에요?”
“네. 수도 시스템이나 전기 시스템을 보러 가신다고…….”
“그렇군요.”
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런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알아서 이미 하고 있다니 잘된 일이었다.
“그럼 저도 내려가 보지요.”
“아, 저기!”
방을 나서려는 진강을 정진이 불렀다.
“아까부터 1층에서 소리가 자꾸 나던데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도록 하죠.”
대답 전 잠깐의 머뭇거림이 있었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진강은 교실을 나와 1층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셔터를 뒤흔드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있었다.
그는 곧 1층에 도착했다. 계단에서 내려와 모퉁이를 돌자마자 셔터에 잔뜩 달라붙어 있는 십여 명의 워커들이 멀리서나마 확실히 보였다.
“…….”
진강은 천천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커덕 철커덕 셔터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어떻게 될 리는 없었지만, 이대로 두면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더 커질 게 분명했다.
“크오! 크오!”
“…….”
진강은 워커들을 향해 가만히 손을 펼쳐 보였다. 이제 가볍게 손을 오므리는 것만으로 워커들은 힘없이 쓰러질 터였다.
“아니지.”
그러나 진강은 어째선지 손을 그대로 내렸다. 대신 그는 주머니에서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크오! 크오!”
그러나 어제 다른 두 명이 들었을 때와는 달리 워커들은 그 유리병을 보고도 물러서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워커들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셔터에 바짝 붙어서는 신경질적으로 울고 있었다.
“훗.”
진강은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는 그대로 워커들을 향해 뿌렸다.
“크에!”
경면주사 가루가 유리병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진강의 손에서 떨어지자마자 워커들은 그제야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경면주사 가루들은 그대로 워커들을 덮쳤고 아주 미량이라도 경면주사에 닿은 워커들은 마치 햇빛에 말린 오징어처럼 그대로 말라비틀어져 바닥으로 쓰러졌다.
“좀 아깝긴 하군.”
진강은 빈 유리병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
주머니 속에서는 유리병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머니를 가득 채운 유리병들 중 대부분은 이제 단순한 빈 병이었다.
“어쩔 수 없군. 조금 일찍 다녀와야겠어.”
진강은 다시 걸음을 옮겨 다른 이들이 있는 지하 쪽으로 향했다.
“아, 오셨습니까?”
지하 1층은 창고였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가니 사람들이 파이프와 기계장치 앞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어떤지 알아내셨습니까?”
진강의 질문에 인수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물탱크 같은 건 안 보이는데 단지 다른 데 있는 걸 수도 있고 진짜 물탱크가 없다면…… 그야말로 저희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겠죠.”
“발전기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어디서 설명서라도 좀 구했으면 좋겠습니다.”
“뭐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조사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고 우선은 버스에 가서 짐을 챙겨오도록 하죠.”
“짐을요?”
“예. 좀 있다가 어딜 가야 할 일이 생겨서 그전에 짐을 빼 놓고 싶어서요.”
사람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일이 생기다니,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일……이라니요? 무슨 일이지요?”
진강은 대답 대신 빈 유리병을 꺼내 보였다.
“가지러 가야겠습니다.”
“구, 구할 수 있는 겁니까?!”
사람들은 진강의 말에 놀랐다. 유리병 속 가루의 정체를 모르는 그들로서는 그 가루가 어딘가 전설상에나 존재하는 신비로운 어떤 것이라고만 생각해 왔었다.
“물론입니다. 뭐,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도록 하죠.”
그들은 기계들과 파이프를 뒤로한 채 다시 1층으로 향했다.
“……?”
계단으로 나온 인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군요?”
“조금 전에 처리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들이 입구 쪽으로 나오자 말라비틀어진 나무토막 같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자물쇠를 열어 주시겠습니까?”
진강의 요청에 성진은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풀었다. 셔터가 올라가고 사람들은 밖으로 나왔다. 성은이 셔터를 다시 잠그자 진강이 말했다.
“모두 카트를 끌고 오십시오.”
진강의 말대로 그들은 하나씩 카트를 잡고 밀었다. 털털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트 행렬이 도로로 향했다. 애초부터 나이 든 주민들이 카트를 끌고 집에까지 갈 수 있게 만들어 놓다 보니 무리는 없었다.
“그전에는 대체 저 많은 물량을 어떻게 가져온 거랍니까?”
아직도 저 멀리 있는 목적지를 바라보며 창걸이 말했다.
“아마 쇠기둥이 없었겠죠. 아니면 오토바이 같은 게 있거나, 쇠말뚝을 사이에 두고 다른 차에 짐을 옮겨 실었거나. 솔직히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어제 묻고 싶었던 건데 진강 씨께서는 여길 어떻게 아신 겁니까? 자가발전기가 있다는 것도 아시고요.”
“티비에서 봤습니다. 돈 문제로 일그러진 작은 마을. 그리고 보상금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누리고 있는 사치.”
“그럼 그때부터 준비하셨던 겁니까?”
인수의 그 물음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물음이 가져올 수 있는 또 다른 물음이 무엇인지 모두 알고 있었고, 그들은 그 주제를 꺼내길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아닙니다. 그러나 나중에 기억해 냈지요.”
인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두리번 두리번.
“걱정 마십시오. 주변에 워커들은 없습니다. 뭐 집안에 갇힌 듯한 몇 마리야 있지만 하룻밤이 지나도록 못 나왔다면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불안한 듯 주변을 살피는 창걸과 지우를 진강이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진강의 그 말에도 쉽사리 그 불안을 떨쳐 내지 못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그들은 마침내 버스 앞에 도착했다.
“자, 그럼 싣도록 하죠. 너무 한 번에 다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두세 번은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요.”
사람들은 짐을 꺼내 카트에 실었다. 짐칸을 가득 채우고 좌석에까지 쌓았던 짐들이었지만, 애초에 워커들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아무렇게나 집어넣다 보니 차지하는 공간에 비해 양은 확실히 적었다. 짐과 짐 사이에 빈공간도 많았고 불필요한 포장도 많았다.
“저…… 이것도 가져가야 하나요?”
성은이 스타킹 박스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
“뭐 언젠가는 쓸 데가 있겠죠.”
진강이 답을 주저하자 인수가 대신 받아 들었다.
“자자. 그 정도면 됐습니다. 한 번에 너무 많이 실으면 그만큼 힘들 뿐입니다.”
어느 정도 카트가 차자 그들은 다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을 몇 번 반복한 뒤, 마침내 짐은 카트 두 대 분량 정도만 남았다.
“음. 그럼 다른 분들은 이걸 싣고 먼저 돌아가 주십시오. 성은 씨? 운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지요.”
“저도 가면 안 되겠습니까?”
인수의 말에 진강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십시오. 빈 카트는 여기다 놓고 가십시오. 나중에 저희가 끌고 돌아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진강은 품 안에서 붉은 가루가 든 유리병을 꺼내 성진에게 건넸다.
“다른 분들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진강과 인수, 성은은 버스에 올랐다.
“어디로 갈까요?”
성은의 물음에 진강은 또다시 작은 쪽지를 꺼내 건넸다. 거기에는 주소가 여러 개 적혀 있었다.
“우선 가까운 데로 가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