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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미솔로지 1권(13화)
6 수확(2)
“끝났군요.”
마지막 카트를 문 안으로 집어넣고 사람들은 가쁜 숨을 쉬었다. 진강이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긴 했지만 막을 수 없는 불안한 마음에 건물 입구가 보이는 요 앞에서부터 그대로 전속력으로 뛰어왔기 때문이다.
“그, 그렇군요.”
창걸은 목이 타는지 카트에 담겨 있는 캔 음료를 집어 들었다.
“아……!”
하지만 한 모금을 입에 가져간 순간 그는 짧은 탄식과 함께 얼굴을 찌푸렸다.
“미지근하군요.”
“어쩔 수 없죠. 계속 버스 안에 있었으니.”
“근데 이 물건들은 어디다 가져다 놓죠?”
“특별히 냉동 보관을 해야 하는 물건은 없으니 우선은 여기 둬도 괜찮겠지만, 나중을 위해서 일단 생활용품과 식품 정도는 나눠 두는 게 좋겠죠.”
“아, 그건 김인수 씨가 어느 정도 해놨습니다.”
지우가 인수의 카트 2개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식품이랑 생활용품은 미리 나누는 게 좋을 거라고 생활용품만 담으시더라고요.”
창걸과 성진은 내심 감탄했다. 물론 누구나 결국에는 생각해 낼 수 있는 단순한 발상이었지만 재빨리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면 우리 쪽에서 생활용품만 빼서 저 카트로 모으죠.”
사람들은 자기들이 맡은 카트에서 생활용품을 빼서 인수의 카트에 집어넣었다. 또한 인수가 붕대나 상비약 같은 의약품들 또한 담지 않은 것을 알아챈 성진은 의약품들은 또 다른 빈 카트에 모으도록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류는 완전히 끝났다.
“금방 끝났군요.”
“그럼 올라가시죠. 슬슬 점심시간이니까요.”
“아, 잠깐만요.”
창걸은 카트를 뒤적거리더니 식빵과 잼을 꺼냈다.
“빵은 아무래도 빨리 먹어야 하는 거잖습니까.”
“확실히 식사 준비하는 것도 귀찮고 간단히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그들은 계단을 올라갔다. 일을 마친 것에 대한 성취감과 만족감으로 그들의 표정은 밝아져 있었다. 그들은 비록 잠시지만 이 현실을 잊었고, 그전에 있던 과거 또한 잊었다.
“……?”
그러나 그러한 좋은 감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위층에서 들려오는 격앙된 목소리들에 그들은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그러니까 내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데 니가 무슨 상관이야?!”
“좀 그만하시죠! 지금 상황이 어떤지나 알고 그런 말을……!”
계단을 올라오니 주선과 소연이 복도에서 서로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성진은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그녀들 사이에 섰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녀들 뒤에 서 있는 사람들끼리 당장이라도 몸싸움이 날 것 같았다.
“아니, 성주선 씨께서 이 상황에 샤워를 하시겠다잖습니까!”
지켜보고 있던 정진이 대신 답했다. 아침 식사 이후부터 쭉 B강좌실에 틀어박혀 있던 성주선과 다른 두 명이 갑자기 샤워를 하겠다며 욕실로 향한 거였다.
“때마침 현숙 아주머니께서 샤워실 가까이에 계셔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물을 다 쓰셨을 겁니다.”
“어차피 콸콸 나오는 물을 못 쓰게 하는 이유는 뭔데!”
“주선 씨. 아직 수도가 살아 있는 건지 아니면 물탱크에 저장되어 있는 물인지 확인을 못했기 때문에…….”
성진은 차분하게 주선을 설득하려 했지만 주선은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는 듯했다.
“그래서 뭐요? 그냥 이대로 쓰지 말자고요? 아직 상수도가 살아 있는 거면 어쩔 건데요?”
“그러니까 저희가 확인할 때까지 만이라도…….”
“그러니까! 애초에 그걸 확인할 수나 있냐는 말이에요!”
성진은 그녀의 그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고 몇 번씩 더 살펴본다고 해서 그들이 답을 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의견을 건의하신 뒤 다 같이 의논을 해 봐야지 다른 사람들한테 아무 말도 없이 멋대로 쓰려 한 게 문제잖아요!”
소연의 그 말에 주선은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하! 의논? 웃기고 있네! 어차피 모든 결정은 진강이니 뭐니 하는 그 인간이 하는 거잖아! 우리 말 같은 건 들어 줄 생각 따윈 없으면서!”
또다시 가열되는 분위기에 성진과 다른 사람들은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알겠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을 쓰시게 할 순 없습니다.”
“하! 당신이 뭔데! 세레머니니 하는 건 이미 완전히 물 건너갔다고! 언제까지 책임자처럼 굴 생각인데?!”
“맞아요! 애초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주선과 주선에 동조하는 두 명은 막무가내로 자신들의 말만 해댔고, 소연과 성진들은 그런 그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간다면 결국은 몸싸움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부르릉! 부르릉!
“……?!”
“……!”
그런데 갑자기 시끄러운 엔진음이 들려왔다.
부르릉! 부르릉!
들릴 리 없지만 똑똑히 들리고 있는 이 소리에 사람들은 일제히 말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방향의 창문으로 달려갔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십여 대의 오토바이가 마을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뭐, 뭐지?!”
“워, 워커는 확실히 아니지요?”
워커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존재에 사람들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분명 그들만큼 다른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에 기쁘고 반갑기도 했지만, 두렵고 불안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특히나 진강이 없는 지금 상대가 호의적이지 않다면 문제는 심각해졌다.
“어, 어떻게 하지요?”
“…….”
성진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천천히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성분들은 우선 여기 계시고, 남자 분들은 따라오십시오.”
적어도 이대로 모르는 척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런 마을까지 일부러 왔다는 것은 저들도 진강처럼 이 건물의 존재를 알고 왔다는 것이고 결국 만나게 될 터였다. 실제로 오토바이들은 곧장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성진을 필두로 남자들은 1층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뭐라도 손에 들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적당한 건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부르릉! 부르릉!
그들의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오토바이 엔진 소리도 점점 더 커져 갔다. 그리고 그들이 1층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오토바이 선두 그룹 또한 정문 앞에 주차를 마치고 있었다.
“아! 역시 사람이 있었군요!”
오토바이에서 내려 다가오는 이는 사람 좋아 보이는 사내였다. 잘생겼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글서글하게 생긴 얼굴 가득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 모습은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확실히 친숙하게 느껴졌다.
“아, 혹시 저희가 놀라게 해드린 건 아니지요?”
사내의 뒤에는 이제 십여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아, 아닙니다.”
성진은 셔터를 미리 내려놓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입구로 걸어갔다. 보기엔 멀쩡해 보인다고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진강이 그러지 않았던가. 워커 말고 다른 것들이 있다고.
세상이 멸망하고 온갖 괴물들이 걸어 다니는 현실이다. 눈앞에 이들이 그 다른 것에 속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또 그들이 생존자라 한들 호의적이라 낙관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타고 온 오토바이에는 짐은커녕 최소한의 식량도 보이지 않았다.
“여, 여러분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성진은 우선 상대를 떠보기로 했다. 아니, 말이 떠본다는 거지 우선은 시간을 끌고 싶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글쎄요. 말 그대로 최후의 심판일까요. 솔직히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완전히 변해 버렸지요.”
말투나 내용, 표정까지 평범하기 만한 대답.
“음…… 다른 일행 분들은 없으십니까?”
“예. 저희뿐입니다.”
“에…… 그럼…….”
성진은 고작 질문 두 개가 한계인 자신의 위기관리 능력에 한탄했다.
이 정도는 시간을 번 것도, 그렇다고 상대의 의중을 떠본 것도 못되었다. 고작해야 인사를 살짝 오래한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일단 질문이 끊어진 이상 상대는 결코 그 틈을 놓치지 않을 터였다.
“그보단 가능하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좀비들이 올까 불안해서 그런데요.”
역시나. 성진은 어떻게 해서든 미루고 싶었던 그 요청에 순간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 버렸다. 성진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단순히 표정을 숨기려 한 거였지만, 그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그대로 마주하게 되었다.
다른 이들은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성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위험해 보이지도 않고 눈앞에 보이는 이들에 대한 평가를 온전히 그에게 미룬 듯했다.
“…….”
성진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인도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서로 맞붙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드문드문 떠오르는 그 자신의 자의식은 성진 자신의 위기관리 능력을 두고두고 질책해 댔다.
“후우.”
성진은 마침내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을 돌렸다.
“들어오시죠.”
그는 바닥에 달린 자물쇠를 풀고 셔터를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로서는 인간적인 도리를 버릴 수는 없었다.
“아,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사내는 얼굴 가득 환한 지으며 악수를 청해 왔다.
“정말 한때는 어떻게 할까 걱정이었습니다.”
“짐은 없으십니까?”
“예. 저희들로서는 오토바이 하나 챙기기도 벅찼거든요.”
성진은 다시 한 번 그들이 타고 온 오토바이를 바라보았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크기와 날렵한 디자인. 저것들 한 대가 어지간한 중형차 가격일 거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침 오토바이 동호회 정모날이라서 다행이었습니다.”
“정모라…….”
묘한 우연에 성진은 어제를 떠올렸다. 어제 아침, 아니, 점심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지 않았었다. 세상의 멸망이라니. 새삼 현실이 다시 다가왔다.
“아, 제가 소개가 늦었네요. 박계정이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전부신가요?”
“김성진입니다. 그리고 아닙니다. 다른 분들도 계시지만 이유가 있어서 저희만 내려왔습니다. 두 분 정도는 잠시 어딜 나갔고요.”
성진은 사람들이 다 들어온 것을 보고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다시 걸었다.
“아, 그렇군요. 어쨌든 생존자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올라가시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겁니다.”
성진과 사람들은 그들을 5층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성진은 마음 한편에 드는 어떤 불안을 쉽게 잠재우지 못했다. 그는 어느새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는 진강이 건네주고 간 유리병을 계속 매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