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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미솔로지 1권(15화)
6 수확(4)
휘이익!
어디선가 기분 나쁜 바람 소리가 들려오고, 골목을 가득 채웠던 워커들이 일제히 검은 연기를 토해냈다. 검은 연기들은 바람에 휩쓸려 흩어졌고 워커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
워커들이 쓰러지고, 인수와 성은은 진강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검은 그림자에 감싸인 채 그는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
인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를 부축하고 싶었다. 적어도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진강이 그 걸음을 버스 쪽으로 옮길 때마다 당장이라도 저 멀리로 도망치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 아…….”
그것은 성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핸들을 꺾고 기름이 다 떨어질 때까지 달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후우…….”
다행히 조금 지나자 진강을 뒤덮고 있던 그림자는 차차 줄어들었고 그와 함께 그 기분 나쁜 음습함과 공포도 사라졌다.
“오, 오셨습니까?”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말이란 건 인수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몸은 아직도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는 자리에 앉았고 즉시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던 경면주사들 중 반 이상은 그 빛을 잃고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다행이군요. 생각보단 많이 남았어요.”
진강은 창문을 열고는 회색으로 변한 경면주사들을 던져 버리기 시작했다.
“성은 씨?”
“예, 예?!”
성은은 완전히 얼어 있었다.
“힘드신 건 알고 있습니다만, 다음 장소로 출발해 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바, 방금 전은……?”
“인수 씨.”
진강의 낮은 목소리에 인수는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서 물러앉았다.
“그것들은 나중에 설명해 드릴 테니 지금은 마음부터 추스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되돌아오기 어려울 겁니다.”
버스는 다음 장소를 향해 나아갔다.
7 뱀파이어(1)
성진의 안내를 따라 올라온 뒤 계정과 그의 무리들은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탁월한 사교성 때문인지, 아니면 동질감 때문인지 처음 만났음에도 불과하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었다.
어쩌면 애초에 죽음을 위해 모인 그들에게 유대감 같은 건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서로의 어두운 면을 보았고 그것은 결코 드러내지도, 마주하고도 싶지 않은 거였으니 말이다.
그에 반해 계정의 경우는 그들 입장에서는 세상이 끝난 뒤 처음 보는 일반인이었다. 자신의 어둠을 보인 적도, 그들의 어둠을 본 적도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 점에 끌린 건지도 몰랐다.
하물며 성주선조차 지금 계정의 옆에 달라붙어서 즐거운 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아, 저희는 우선 생존자들을 찾아 나설 겁니다. 저희나 여러분 같은 분들이 분명 남아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럼요! 분명 그럴 거예요!”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건 조금 이상했다. 지금까지 사사건건 반발만 해대던 성주선이 이제는 아예 그가 하는 모든 말들에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여기 안 계신다는 두 분은 어떤 분들이죠?”
“아, 그 사람들이요?”
성주선은 진강과 성은, 인수에 대해 모든 것을 말했다. 특히나 진강의 능력, 그가 했던 말, 진강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의심스러워하는지 모든 것을 말이다. 물론 중간 중간 인수에 대한 노골적인 분노도 담겨 있었다.
“그 우습지도 않은 인간은 진강 그 사람에 옆에 딱 붙어서는 기회만 되면……!”
“자자, 진정하십시오.”
계정의 그 말에 주선은 그대로 말을 멈췄다.
“그러니까 이 진강이라는 자가 손짓만으로 워커들을 조종하고 처리할 수 있다는 겁니까?”
“예! 그 사람은 대체 정체가…….”
“아아아. 조용히 하십시오.”
계정의 손짓에 주선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니, 주선뿐만이 아니었다. 계정의 일행을 제외한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넋이 나간 듯 입을 다문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아, 대장. 갑자기 이러시면 지금까지 걸었던 암시가 무슨 소용이에요?”
일행 중 하나가 그를 향해 볼멘소리로 말하자, 계정은 아차 싶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 미안. 내가 조금 흥분했군.”
그의 빠른 사과에 일행은 즐거운 듯 더 그를 책망했다.
“강한 매료 정도로는 오래가지 않는다고 일상 대화를 하면서 약한 암시를 착실하게 계속 주자고 한 건 대장 계획인데 그걸 대장이 망치면 어떻게 해?”
“그래, 미안하다.”
“애초에…….”
“그만하라니까!”
야수의 포효 같은 고함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계정의 눈동자는 마치 피처럼 짙은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일행들은 급히 그 앞에 고개를 숙였고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게 말을 걸던 사내는 바닥에 몸을 바짝 엎드리고 있었다.
“일어나.”
그의 말에 사내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계정의 눈동자는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고 그의 얼굴에도 처음과 마찬가지로 사람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냥 조금 힘 조절을 실수했을 뿐이야. 지금까지 걸어 놓은 암시를 지울 정도로 강하진 않았으니 걱정 마.”
“근데 대장. 진짜 이 진강이라는 자 정체가 뭐죠?”
“글쎄. 어쩌면 우리 동족일 수도 있겠지. 아니면 마법사, 주술사…… 솔직히 나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확실한 건 만약 우리 동족이라면 나보다 고위급이란 거겠지.”
계정과 다른 이들에 얼굴에 살짝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가 어떤 자든 이 사태를 예견했다면 우리에게 정확한 답을 내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여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장. 한 명 정도만이라도 먹으면 안 될까요?”
그렇게 말하는 여인의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붉은 눈동자와 날카로운 송곳니. 그녀는 눈앞에 성진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안 돼! 말하지 않았나! 약한 암시로 우리에게 익숙하게 만든 뒤 인류를 재건시켜야 한다고! 지금은 단 한 명이라도 숫자를 죽여서는 안 돼!”
“하지만 대장!”
“말하지 않았나!”
또다시 계정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었다.
“오늘 우리의 배를 채운다면 내일 굶주릴 것이다. 그래. 분명 혈액 창고에 피는 충분하다. 한동안은 그렇게 연명할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죽지 않는다. 또한 언제 창고에 공급되는 전기가 끊길지도 모르지. 어쨌든 결국 피는 다할 것이다.”
그는 여전히 충동을 자제하지 못하는 다른 이들 하나하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최소한 적정 수가 될 때까지 만이라도 인류 재건에 모든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영원히 굶주릴 것이다.”
“하지만 대장! 남자들 정도는……!”
계정의 몸이 순간 흐릿해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말을 하던 남자의 목을 붙잡고 서 있었다. 계정은 고작 한 손으로 건장한 성인 남성 하나를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네놈들이 내 말에 이렇게 토를 달 수 있었지? 세상이 멸망하니 지휘 체계도 끝났다고 생각하나?”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일제히 계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질서 속에 있고 싶다면 언제든 말만 해라. 더 이상 나도 네놈들 안 챙기고 약육강식의 이름 속에 모든 먹이를 내가 차지할 테니까.”
“죄, 죄송합니다.”
간신히 내뱉은 사내의 사과에 계정은 그를 놓아 주었다.
“좋다. 그러면 하던 일이나 마저 하도록 하지.”
계정은 다시 성주선 앞으로 가 자리에 앉았고 다른 이들 또한 원래 앉았던 자리로 가 앉았다.
탁!
계정이 손가락을 튕기자 멈춰 있던 사람들은 다시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상황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다들 식사를 안 하셨군요?”
“아. 그렇네요!”
“그럼 식사 준비를 하죠.”
계정의 그 말에 주선과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창걸이 들고 있던 식빵과 잼은 아직까지도 그 자리에 있었고 말이다.
***
“…….”
진강의 손짓에 워커가 저 멀리로 날아갔다. 하지만 고작 한 마리의 워커임에도 그는 어딘가 힘들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그의 옆에는 박스 가득 경면주사가 담겨 있었다. 여기가 벌써 쪽지에 적혀 있는 네 번째 장소였다.
“그저, 좀 피곤할 뿐입니다.”
그는 다른 쪽 박스에 손을 가져가더니 가루가 든 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그대로 뚜껑을 열어서는 입속으로 쏟아 넣었다.
“그, 그래도 괜찮습니까? 경면주사에는 수은 성분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강은 개의치 않고 다음 통을 열어 입속으로 쏟아 넣었다. 중간 중간 물을 들이키기도 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통을 열고 쏟아 넣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거의 한 통을 다 먹고 나서야 그는 손을 멈췄다.
“후우.”
진강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인수와 성은은 보았다. 그의 입에서 아주 불길한 검은 연기가 살짝 흘러나왔다.
“괜찮습니다.”
진강의 얼굴은 훨씬 편안해져 있었다.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진강의 손짓에 성은과 인수는 박스를 챙겼다.
“궁금하신 게 많을 거란 건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 말씀드리도록 하죠.”
그들은 가게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도로에 가깝다 보니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게 문만 나서면 버스에 닿을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다음 장소로 갈까요?”
성은의 물음에 진강은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해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습니다. 돌아가도록 하죠.”
성은은 그의 말대로 버스를 돌렸다. 도로에는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인도 여기저기에 뒤집힌 차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을 뿐이었다.
“…….”
버스가 출발하자 진강은 그대로 눈을 감고는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