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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신병 오시리스 1권(23화)
chapter.9 이스트 웨이, 의외의 만남(1)
화창한 햇볕이 내리쬐는 날.
동부 해안가 근처의 절벽에선 커다란 파도가 연신 철썩거리며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새하얀 포말이 공중에서 부서졌다. 반짝이는 물방울 사이로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가 금세 다시 사라졌다.
철썩― 철썩―
파도 소리는 마음속의 짐을 씻어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청량했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 푸른 하늘 위에서 끼룩거리는 갈매기들의 울음소리.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한 자연의 풍경이었다.
우르릉―
그런데 그 조화로운 풍경 속에 이방인들이 나타났다.
콰과과광!
엄청난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린 바윗덩어리들이 해안가의 파도 위로 몸을 던졌다.
놀란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사방으로 도망쳤다. 수십 마리의 물고기들이 기절한 채로 배를 뒤집고 해안가로 떠밀렸다.
“우왓! 바다에요오―!”
“꺄악! 바다잖아?!”
자연의 조화를 파괴하고 대참사를 일으킨 장본인들이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해안가의 절벽 위에는 난데없이 커다란 동굴 하나가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녹색빛을 띤 커다란 그림자 몇 개와 옹기종기 모여 빠끔히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봐들. 그 고생을 하고도 기뻐할 힘이 있는 거야?”
“당연하잖아. 오빠! 바다야, 바다! 이게 얼마 만에 맡아보는 바깥공기야?”
“……젊어서 좋겠다. 정말.”
실제론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면서 팔순 노인네마냥 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는 누트였다.
“에이, 오빠도 좀 봐 봐. 바다를 보니까 기분이 묘해지지 않아? 우리 어릴 때는 만날 바다만 보고 살았었잖아? 그치?”
“아아, 그렇긴 했지.”
누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대답하며 피곤한 얼굴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방방 뛰며 좋아하는 것은 바니와 제프 두 사람뿐이었다.
나머지 네 사람은 초췌한 몰골로 뒤쪽에 주저앉아 있었다.
꾸깃꾸깃하고 축축한 옷을 입은 그들의 모습은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졌고 온몸은 씻지 못해 생긴 기름때가 좔좔 흘렀다.
유적에 갇혀 버린 2개월.
그 기간 동안 물고기와 도롱뇽, 이끼 따위만 먹어 가며 동굴 생활을 하면 누구든 자연스레 이런 몰골이 되었다.
처음 3주 동안은 나름대로 몸도 씻고 관리도 했지만, 그 뒤에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동안에는 그런 것 따윈 신경 쓸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하늘의 도움인지 신전이라 쓰여 있는 문을 열자 바깥으로 향하는 긴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죽겠군.”
“세베크, 너도 그러냐?”
“아아, 빨리 씻고 나서 푹 자고 싶다.”
세베크와 누트는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하의 아피스조차 아무 말없이 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과연 십 대는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이십 대를 훌쩍 넘어 버린 나머지 세 사람은 여전히 팔팔한 십 대들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이, 쥬드. 너는 왜 안 팔팔해? 십 대면 쟤네들처럼 좋아해야지?”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에이, 너는 우리 같은 노친네들이랑은 다르다고. 어서 일어나! 훠이!”
“…….”
대체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그러는 건지.
쥬드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프에게 물어보고 확인할 것이 있었다.
“제프.”
“바니 씨, 바람이 시원한…… 네?”
“신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
제프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아, 맞다. 저도 그 생각을 했었는데!”
“바다뿐이라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 유적에서 신전이라고 쓰여 있는 문을 열고 나왔으니 신전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으음, 그렇죠.”
“혹시 알고 있는 것 있으십니까?”
쥬드는 순순히 질문했다.
이것이 그간 함께해 오면서 바뀐 점이었다. 자부심이 강한 쥬드도 이런 쪽의 지식에 관련한 것은 제프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으음, 알고 있는 건 없지만……. 잠시만요.”
제프는 품속에서 수첩을 하나 꺼내더니 목탄 연필로 뭔가를 슥슥 써 나가기 시작했다.
“그게 뭡니까?”
“지도랑 방향을 그리는 중이에요. 에…… 처음 유적 계단의 방향이 북쪽이니까……. 석실은 남쪽이고, 왼쪽의 신전 문은 동쪽이니까…….”
쥬드는 가만히 기다렸다.
제프가 기억을 더듬으며 또 새로운 능력을 보여 주는 중이었다.
“동, 북, 동, 남, 동……. 녹색 거신병의 걸음으로 한 달간의 거리……. 그걸 대륙 전도와 맞춰 보면…….”
슥슥―
움직이던 연필이 딱 움직임을 멈췄다.
쥬드의 눈이 수첩 위의 그림을 쫓았다. 지하 유적의 지도와 대륙 전도의 그림이 하나로 겹쳐져 있었다.
그리고 제프의 손이 멈춰 있는 곳.
“극동. 이스트 웨이…….”
“……!”
누트와 세베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바니는 헤에 하고 탄성을 내뱉었고, 쥬드는 역시 그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거신병으로 한 달간 행군이면……. 나라를 가로지를 수 있겠죠.”
멍하니 있던 제프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더니 바깥을 쳐다봤다.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윽! 그걸 왜 몰랐을까! 당연한 거였는데!!”
“……제프?”
“확실해요. 여긴 이스트 웨이예요. 제가 여러분을 만난 곳이요.”
제프는 쥬드를 제외한 나머지 네 사람을 쳐다봤다.
“무너진 구름다리요. 아마 이 절벽을 타고 올라가면 항구도시가 나올걸요?”
“무너진 구름다리?! 여기가 거기라고?”
“네.”
누트는 후다닥 튀어 나와 바다를 내다봤다. 그리고 몸을 반쯤 밖으로 내밀고 절벽 위를 아슬아슬하게 올려다봤다.
“이런. 맞잖아! 구름다리가 무너지기 전의 흔적이 있어!”
“에엑―!”
“으아! 겨우 빠져나왔는데 다시 돌아와 버린 건가…….”
누트는 갑자기 축 늘어져서 낙담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피스가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누트처럼 바깥과 위를 한 번씩 살펴보더니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갈 순 있겠군.”
졀벽 위까지 별로 거리가 멀지 않음을 말함이었다.
일행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말은……?”
“어쨌든 항구도시로 가야 하지 않나?”
기쁨 반 긴장 반의 공기가 감돌았다.
지긋지긋한 오지 생활 끝에 발전된 도시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었다.
기쁘기도 하지만 또한 불안했다.
“제프, 네 생각은?”
아피스의 질문에 제프는 턱을 문지르며 눈을 찡그렸다.
“꽤나 위험하지만…… 일단은 상황도 알아보고 정보를 구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정체를 감추고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그렇겠지. 누트, 너는 어떻지?”
“저도 동감이요. 어떻게든 들어는 가야 할 것 같아요. 으윽! 일단 빨리 씻고 쉬고 싶다구요.”
그 점에선 일행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피스는 모두를 지그시 쳐다봤다.
“알겠다. 그럼 이스트 웨이로 들어간다.”
일행이 움직인 것은 하늘이 붉게 달아오르는 황혼 녘 즈음이었다.
배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 쪽에서 여섯 개의 그림자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저녁 고기잡이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 어부들을 지나 이제 막 도착한 무역선의 선원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항구는 원래 이방인들로 붐비는 곳. 이스트 웨이의 주민들은 모르는 얼굴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먼저 말을 걸고 어디서 왔냐고 물을 정도였다.
처음엔 얼떨떨해 하던 쥬드도 이내 상황에 적응하고 자연스럽게 사람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문제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에서 벌어졌다.
“어이, 거기 여섯! 어느 배 타고 왔어?”
“……!”
정확하게 구별 당했다.
입국 심사에 도가 튼 관문병들은 척 보기만 해도 누가 어느 일행인지 구별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쥬드는 날카로운 눈으로 관문병들을 살폈다.
관문 입구에 둘, 그리고 양쪽에 줄을 세우는 둘을 합해서 총 네 명. 실력으론 중하.
병사치고 나쁘진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뚫고 나가는 데 문제는 없었다.
“어이쿠, 저희는 말입죠…….”
그때 앞으로 나선 누트가 몰래 쥬드의 옆구리를 푹 찌르며 아주 낮게 소곤거리듯 말했다.
“어이, 살기를 내보이면 어떻게 해? 가만히 있어. 내가 처리할 테니.”
“하지만……!”
“쉿!”
누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항구에 정박된 배를 슬쩍 둘러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관문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희는 저 밑에 비블로스 공국에서…… 헤헤, 아시죠?”
“음? 비블로스?”
“어이쿠! 병사님. 소리를 조금만 낮춰 주십쇼.”
누트는 정말로 겁먹은 것처럼 손을 내저으면서 주위를 휙휙 살폈다. 연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말투와 행동이었다.
“크흠! 알았어, 알았어.평민이야? 노예야?”
“병사님도 참. 노예가 어찌 이곳까지 오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크흠. 근데 요새 유난히 입국자가 많은 것 같은데…….”
“다 살기 힘들어서 그렇습죠. 어쩌겠습니까?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데요.”
“……그래서 여섯이 다인가?”
“예, 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여섯입니다요.”
관문병이 가늘게 뜬 눈으로 일행들을 쳐다봤다.
마침 두 달이나 동굴 탐험을 한 터라 일행은 모두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누가 봐도 밀입국자라고 손가락질 할 만한 외모였다.
숫자는 딱 여섯.
그런데 술술 지나가던 관문병의 시선이 바니에게서 딱 멎었다.
“어? 여자잖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면서 눈빛이 뜨거워졌다. 뱀처럼 가느다란 시선이 바니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아무리 초췌하고 더러운 상태라도 타고난 미모와 잘 단련된 탄력 있는 몸매를 감출 수는 없었다. 갸름한 턱선과 잘록한 허리, 그리고 길게 쭉 뻗은 다리는 관문병의 욕정을 자극했다.
대번에 태도가 비협조적으로 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커험! 이봐. 여자가 있단 소리는 안 했잖아? 빼고 들어가. 대신 나머지는 그냥 넘겨주지.”
“아이고, 병사님. 안 됩니다!”
“어허, 당장 경비대를 부를까?”
하는 행태가 고위 관료나 귀족이라도 되는 듯했다.
쥬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역시 이런 식이었다.
언제든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쥬드의 몸이 낮춰졌다.
“병사님. 안됩니다. 제 여동생이에요. 꼭 데려가야 합니다.”
“뭐? 여동생?”
“예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사실인가 보구먼. 눈매가 닮았어.”
“예, 예. 그럼요. 누구 앞에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관문병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외모가 괜찮기에 데려가서 첩으로 삼으려 했거늘. 친동생이라면 절대로 남겨 두고 갈 리가 없었다.
“커험. 그럼 안 되겠구먼. 다 같이 남아야지.”
“어이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 돼. 요새 윗분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단속이 심해졌다고.”
뻔한 수작이었다.
누트는 품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내 관문병의 옆구리로 몰래 찔러주었다.
“헤헤, 이걸로 목이라도 축이십쇼.”
“커허험― 뭐 이런 걸…….”
관문병은 슬쩍 주머니 안을 살펴보더니 의외로 두둑한 액수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 마음에 드는구먼. 통과야. 잘 살아 봐.”
“어이쿠, 감사합니다.”
누트는 재빨리 일행을 끌고 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쉬움을 버리지 못한 관문병은 그들이 인파에 섞여 골목 사이로 숨어들어 갈 때까지 바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