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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미솔로지 1권(18화)
7 뱀파이어(4)


“호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렇게 묻는 계정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그야 당신은 바보처럼 보이지는 않거든요.”
“호오?”
뜻밖에 당돌한 대답에 계정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더해졌다.
“그거 참 고마운 말씀이기는 한데 그게 다른 사람들이 무사한 것과 무슨 상관이죠?”
“상관이야 있지요. 만약 어떤 집단을 사로잡았을 때 다른 힘 있는 동료가 있고, 그 동료의 능력을 가늠하거나 예상하기 어렵다면, 섣불리 그들을 어떻게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죠. 인질로 쓸 수도 있고 만약 상대의 능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할 시엔 괜히 그의 분노를 살 필요는 없으니까요.”
인수의 답변에 계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즐거운 듯 되물었다.
“확실히 그렇긴 하죠. 하지만 바보가 아니더라도 내가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지 않았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지요? 또 인질로 쓰려고 했다면 쓸모없는 몇 사람 정도는 처리하지 않았을까요?”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죠.”
인수의 그 말에 계정의 눈빛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반짝였다.
“호오? 계속해 보시죠.”
“세상이 멸망하고, 보이는 거라곤 온통 움직이는 시체들 뿐. 만약 뱀파이어가 제가 들어왔듯이 인간의 피를 마시며 연명하는 존재라면 이 상황은 그들에게도 결코 달가울 리 없죠. 운 좋게 생존자 몇 명을 찾아 갈증을 해결한다 쳐도 고작 그걸로 끝. 결국에는 말라 죽는 수밖에 없겠죠.”
계정의 눈동자는 이제 아주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는 인수가 말을 이어 갈 때마다 후렴처럼 낮은 감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러니 만약 제가 뱀파이어고, 생존자를 찾게 되었다면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했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바보가 아니라면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람들은 무사할 겁니다.”
짝짝짝!
말이 끝나자 계정은 인수를 향해 아낌없이 박수를 쳤다.
“브라보! 설마 동족이라는 이 녀석들조차 제대로 이해 못한 사실을 보통 인간들 중에서 이해하는 자가 있을 줄이야! 당신 정말 마음에 드는군요!”
계정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이나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계정의 모습에 지켜보고 있던 다른 뱀파이어들 중 몇 명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치기도 했다.
“다 맞는 말입니다. 다른 분들께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계정의 확답에 성은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하지만 진강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그렇겠지. 그래서 네놈들을 아직 살려 두고 있는 거니까.”
진강의 그 말에 뱀파이어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는 보통 사람인 성은과 인수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살기가 그들에게 쏟아졌다.
“감히 어디서……!”
“대장. 저 놈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요?”
그들은 노골적으로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만.”
하지만 계정은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물론 그 또한 많이 굳은 표정이었지만 다행히 살기를 뿜어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말씀은 서로에게 그리 좋지 않을 것 같군요.”
“훗. 글쎄.”
“이놈이 정말!”
진강의 코웃음에 더 이상 참지 못한 뱀파이어 두 명이 몸을 날렸다. 그들은 순식간에 진강의 양쪽을 점했고, 그들의 두 손은 각각 진강의 목과 심장을 향해 뻗어 갔다. 하지만
“……!”
“……!”
들고 있던 상자를 놓아 버리고 진강이 가볍게 양손을 펼치자 두 뱀파이어는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 이런!”
그 모습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다른 뱀파이어들도 급히 몸을 날렸다. 허공에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뱀파이어들은 진강을 덮쳤고, 진강은 그런 뱀파이어들을 보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
멈춰 섰던 두 뱀파이어를 포함해 진강을 덮쳐 오던 뱀파이어들은 그대로 뒤로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제, 젠장!”
그들의 옷은 흙먼지로 물들었고 그들의 입가에는 분노 때문에 송곳니가 밖으로 나 와 있었다. 그들은 다시 진강을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바로 그때.
“그만하지 못해!”
계정의 외침과 함께 강렬한 위압감이 온 사방에 내리깔렸다. 뱀파이어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고 몇몇은 다시 바닥으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부하들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계정은 진강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
진강은 아무 말없이 반쯤 쥐어졌던 손바닥을 다시 펼쳤다.
“무례를 사죄하는 뜻에서 저희는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대장! 그렇게까지……!”
“대체 왜……?!”
갑작스런 계정의 결정에 몇 명이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계정의 눈빛에 그들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계정은 진강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만 떠나려 하는데 실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
진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계정은 다시 숙여 보인 뒤 다른 뱀파이어들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뱀파이어들은 살기등등한 눈으로 진강을 한 번 더 노려보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시야에서 거의 다 사라져 갈 때쯤 계정의 모습 또한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확실히 머리는 좋은가 보군요.”
진강은 인수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계정이 서 있었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기에는 열쇠와 자물쇠가 곱게 놓여져 있었다.
“…….”
“…….”
성은과 인수는 갑작스런 이 상황 변화에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만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진강의 모습과 먹구름에 가려지는 달빛을 보며 부랴부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8 안식으로의 산책(1)


“……그만.”
계정과 그 일행이 멈춰 선 곳은 그들이 있던 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어떤 도시 외곽이었다.
“여기가 분명…… 그래 저쪽쯤에 있겠군.”
계정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보통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워커들이 있었지만, 워커들은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랜만에 오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분명히 이쯤이었지.”
그는 도로가에 나 있는 간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이내 간판 오른쪽 모퉁이에 칠이 살짝 벗겨져 있는 VIP라는 곳으로 바로 들어갔다.
“그래. 여기야. 들어가지.”
계정은 문을 열고는 손짓을 했다. 다른 이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 가게로 들어갔다.
그런데 계정이 가게 안으로 들어선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칼이 그대로 계정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워워! 진정하라고. 나야 나, 계정이라고.”
하지만 계정은 날아든 칼을 두 손가락으로 가볍게 받아 들었다. 그리곤 다음 칼날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 바텐더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까지 봐 왔던 사람 좋은 미소가 아니라 어딘가 섬뜩하긴 하지만 훨씬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아, 너였냐?”
그리고 그의 모습에 바텐더는 칼날을 내려놓았다.
“미안. 어제부터 들어오는 것들이라곤 시체들밖에 없어서 말이지. 주변 놈들한테 들어오지 말라는 암시를 걸어도 또 다른 놈들이 걸어 들어오더군.”
“뭐 엄밀히 말하면 우리도 시체지만.”
계정은 익숙한 듯 바텐더 바로 앞에 앉았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짧은 침묵이 끝나자 그들은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호탕하게 웃어댔다.
“하하하! 그렇지! 우리도 시체지! 이 친구 하나도 안 변했군!”
“하하하! 그래도 조금은 변했을 걸. 봐!”
계정은 아직도 입구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다른 이들을 가리켰다.
“어느새 내 무리도 있잖아.”
“아, 그래. 한 200년 전에 네가 로드의 일원이 되었다는 소리는 들었어. 하지만 금방 관둔 줄 알았는데?”
“관뒀었지. 근데 20년 전쯤에 제발 좀 부탁한다고 매달리더라고. 그래서 한국 지부 정도는 맡아 주기로 했지.”
“뭐야. 그럼 한국으로 돌아온 지 20년이나 됐으면서 날 안 찾아왔다는 거야?”
바텐더는 찬장에서 와인잔을 꺼내 계정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옆에 들고 있던 포도주병을 기울여 잔에 가득 차게 따랐다.
“……!”
온 방 안에 풍기는 그 향기에 입구에 서 있던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그것은 포도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피였다.
“으음! 갓 뽑은 느낌이야. 정말 자네 솜씨는 대단하군.”
“그럼. 두말하면 잔소리지.”
계정은 음미하며 살짝 한 모금을 넘기고는 잔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 그리고는 입구에 서 있는 이들을 향해 손짓했다.
“자! 너희들도 어서 와서 마셔 봐.”
“…….”
하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눈을 잔에 붙인 채 입맛을 다시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입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래? 와서 마시라니까? 마음껏 마시라고는 안 할 거지만, 어쨌든 피는 충분해.”
여기는 뱀파이어들의 혈액 보관 창고였다. 얼핏 보면 단순한 바였지만 지하 냉동 창고에는 몇 백이나 되는 술병들마다 피가 가득 담겨 있었다.
“……대장.”
잠자코 있던 자들 중 하나가 천천히 입을 뗐다.
“대체 왜 그러십니까?”
“뭐가?”
태연하게 되물었지만 계정 또한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 증거로 밀어 놓았던 잔을 다시 가져와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반 이상을 한번에 들이켰다.
“조금 전 일 말입니다.”
정중함을 취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숨길 수 없는 불만이 가득했다.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대장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인류를 재건시켜야 된다고. 그런데 그렇게 많은 인간을 남겨 두고 왜……!”
“…….”
계정은 말없이 다시 잔을 기울였다.
“대장님께서 나섰다면 그런 녀석 정도는……!”
“…….”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키는 계정의 손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흘려 넘기고는 가만히 텅 빈 와인잔과 바텐더를 번갈아 보았다.
끄덕.
그런 계정을 향해 바텐더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한 계정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들고 있던 잔을 그대로 벽으로 던져 버렸다. 잔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버렸고 요란하지만 맑은 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네놈들은 눈 뜬 장님이냐!”
마치 야수의 그것과 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계정은 어느새 말을 하던 사내의 목을 붙잡고 서 있었다.
“내가 왜 그랬냐고? 왜 몇 시간 동안이나 암시를 걸고 매료를 걸면서 노력해 온 결과물을 버리고 도망쳤냐고? 왜 그토록 비굴하게 고개를 숙였냐고? 바로 네놈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이 멍청한 것들아!”
계정은 잡고 있던 사내를 반대편 벽으로 던져 버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가구 몇 개가 부서져 버렸다. 그 모습에 바텐더는 무심한 듯 덧붙였다.
“이봐. 그래도 너무 물건을 부수지는 말라고. 와인잔 하나 정도야 괜찮아도 지나치면 곤란해.”
“미안하군.”
계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흥분 때문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