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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미솔로지 1권(19화)
8 안식으로의 산책(2)


“멍청한 것들! 만약 내가 1초라도 늦게 고개를 숙였다면 네놈들은 모조리 죽었어! 그자의 손짓에 움직이던 그 강렬한 힘을 네놈들은 못 느꼈던 거냐? 다행히 내가 중간에 멈춰서 무사했지, 그가 주먹을 쥐기라도 했다면 네놈들의 몸은 그대로 짓이겨졌을 거다!”
계정은 손을 뻗어 다른 또 사내와 여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마치 목을 뜯어 버릴 것만 같은 그 악력에 목을 잡힌 이들은 신음성조차 내뱉지 못했다.
“괴롭더냐? 만약 내가 막지 않았다면 이보다 더한 압력이 네놈들 모두의 몸을 한 순간에 집어삼켰을 거다!”
계정은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한 번 더 손에 힘을 주고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털썩.
그가 손을 놓자 두 남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미 그 몸은 차가운 시체에 불과한 뱀파이어. 비록 통증이 없는 건 아니라 해도 그들로서는 설사 목이 부서진다한들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설사 온몸의 뼈가 모두 조각나 버린다고 해도 하루나 이틀 정도만 지나면 멀쩡해지니까. 지금 그들이 일어서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마주한 분노 때문이었다.
온몸을 꿰뚫고 영혼을 옥죄는 그 강렬한 분노에 그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도 못했다. 아마 그들이 아직 숨을 쉴 필요성이 있었다면 진작 숨이 막혀 죽었을 터였다.
“나는 바로 네놈들 때문에 내 오토바이도 버리고 꼴사납게 도망쳤다. 그리고 네놈들을 먹이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지. 근데 네놈들이 그런 내게 뭐……?”
순간 계정의 손끝에 붉은 빛들이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가 아주 살짝 팔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어이!”
바텐더는 있는 힘껏 술병을 던졌고, 계정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그 병을 잡아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 정도 하고 참으라고. 애들이 잔뜩 얼었잖아.”
계정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거의 실신 직전 상태에서 간신히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렇군.”
그는 그 손과 눈동자에서 붉은빛을 거둬들이고는 다시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계정이 멀어진 순간, 서 있던 나머지 뱀파이어들 또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직 어린것들이잖아. 자, 한 잔 더할래?”
바텐더는 계정이 돌려 준 술병을 다시 내밀며 말했다.
“아니. 나중에 저 녀석들한테 주도록 해.”
계정의 그런 말에 바텐더는 술병을 다시 집어넣었다.
“뭐, 그러도록 하지. 근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좀비가 넘쳐 나질 않나 방송은커녕 우리 쪽 무전기도 터지지 않고. 어제 들른 녀석들 말로는 온 나라가 이 꼴 같던데.”
“세상의 멸망이라더군.”
“훗. 하긴 비급 영화 같은 데서는 항상 이런 식의 종말…….”
“아니. 진짜 멸망이라고.”
계정의 그 말에 바텐더의 표정이 굳어졌다. 계정은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생존자들을 찾아 나선 일들과 한 생존자 무리를 만난 일, 그리고 그곳에서 들은 모든 것과 진강의 존재, 조금 전 바로 그 진강이란 자를 피해 도망치듯 떠나왔다는 이야기까지 말이다.
“그럴 수가…… 세상의 멸망이야 그렇다 쳐도 설마 자네도 어쩔 수 없을 정도의 존재란 건가? 대체 정체가 뭐길래?”
“모르겠더군. 적어도 그런 자는 내 오백년 삶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어. 나름 이름 높은 마법사나 주술사들 중에서도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자는 없었단 말이야. 솔직히 처음에는 은거 중인 고위급 동족이라고 생각했다고.”
바텐더는 목이 타는지 집어넣었던 술병을 다시 꺼내 병째로 들이켰다.
“내가 한 번 가 볼까?”
“그만둬. 말했지만 내가 내 오토바이를 버리고 올 정도였다고.”
“…….”
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이 어색해질 정도의 시간쯤 되었을 때 계정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이, 언제까지 그렇게 엎어져 있을 거야? 와서 목이라도 축이라고.”
“예, 예…….”
몇 명이 대답하긴 하기는 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면 아직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하아. 어린것들이란. 고작 겁 좀 줬다고 저렇게 되다니.”
“이봐. 솔직히 말하지 그래. 좀 전엔 겁만 줄 생각이 아니었잖아?”
“뭐 부정할 수는 없겠군.”
계정은 바텐더가 들고 있던 술병을 빼앗아 그대로 들이켰다. 바텐더는 황당한 듯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말했듯 무전기가 안 되는 이상 다른 로드들은커녕 지역 공동체에 연락을 취할 수도 없어. 그렇다고 일일이 찾아다닐 수도 없고, 본부가 있는 런던까지 뛰어갔다 올 수도 없어.”
“말했잖아. 생존자들을 찾아야지. 그리고 인류를 재건할 거야.”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내가 말하는 재건이란 이전 생활로 돌아가자는 소리는 아니야. 애초에 그건 몇 백 년 내로는 불가능할 거고, 솔직히 나야 상관없지만 나이 많은 로드들 중에는 은근히 이런 상황을 바라 왔었던 자들도 있으니 협조할 리가 없지. 그들은 아마 이대로 인간들을 통제하며 먹이로 사육하려 하겠지.”
“그럼 너는 다르고?”
“대우의 차이란 거겠지. 난 어디까지나 그들을 소중히 보살필 거야. 그리고 보살핌의 대가로 인간은 피를 나눠 주는 거지. 어디까지나 공생이란 거야.”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솔직히 이 상황이라면 다른 생존자가 있을 거 같지도 않거든.”
계정은 쓴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몇 모금 남은 술병을 끝으로 밀었다. 그곳에는 처음 계정이 던져 버렸던 뱀파이어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 모금 하도록 해라.”
“…….”
그는 병을 받아들어 그대로 쭉 들이켰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계정의 물음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숙이며 숨기는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

“모두 괜찮으십니까?”
진강과 두 사람은 강좌실로 올라와 사람들을 확인했다. 진강이 손가락을 튕기는 것으로 암시는 모두 풀렸고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사람들은 조금 전 그토록 친하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상대들이 뱀파이어라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특히나 계정과 그 일행을 들어오게 한 성진의 경우 깊은 자책감에 빠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설마 뱀파이어일 줄은…….”
물론 뱀파이어가 존재할 줄도 몰랐겠지만 설사 알았다 해도 대낮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날 줄은 몰랐을 터였다.
“괜찮습니다. 모두 무사하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충분해요? 지금 충분하다 그랬어요?!”
성주선이 진강을 향해 외쳤다. 조금 전 상황들 때문인지 그녀는 평소보다도 훨씬 흥분해 있었다.
“난 좀 전에 뱀파이어들 바로 앞에 있었어요! 여기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요! 그런데 충분하다고요?!”
“…….”
진강과 인수, 성진과 소연이 표정이 안 좋아졌다. 다른 일이었다면 그저 그녀의 불평으로만 끝났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몇몇 사람들이 그녀의 그런 말들에 동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래요. 이번에는 어떻게 무사했다지만 그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잖아요.”
현숙과 지우가 동의를 표하자 주선은 점점 더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낯선 사람들을 그렇게 멋대로……!”
“좀 그만하시죠!”
기세등등해서 목소리를 높이며 성진을 질책하려는 그녀를 인수가 막아섰다.
“대체 생각이 있는 겁니까? 설사 성진 씨가 그들을 안으로 들이지 않으려 했어도 상대는 최면과 암시를 쓰는 자들입니다. 막을 수 있었을 리가 없잖습니까. 애초에 그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셔터나 자물쇠 따위는 부수고 들어왔을 겁니다.”
인수의 말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만약 계정이 처음부터 그 능력을 사용했다면 그들을 막을 방법 따위는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주선은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모두가 위험할 수 있었던 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하잖아요!”
그녀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은 거들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체 뭘 어쩌기를 바라는 겁니까?”
“책임을 져야죠! 책임자처럼 굴었으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인수의 표정은 그대로 구겨졌다. 이 무슨 억지란 말인가.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말 한 번 잘하시는군요! 그럼 묻겠습니다. 그 뱀파이어들이 찾아왔을 때 정작 그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말이라도 한 분이 계시다면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
인수의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인수의 시선을 피하려 허공을 바라보거나 고개를 숙였다. 인수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보십시오. 애초에 선택권을 남에게 미뤘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책임자니 책임이니 들먹이는 겁니까?”
“…….”
주선과 그녀의 지지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잠시 후 성주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당신 말처럼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면 선택 따위는 의미가 없겠죠.”
인수는 그녀의 그런 태도에 황당했다. 책임자처럼 굴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며 반박했으면서 이제는 그 말을 그대로 끌어와 자신을 변호하다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대체 무슨……?!”
“그럼 어떻게 할 수 있었던 사람이 책임을 져야겠죠?”
인수와 소연, 성진과 성은, 그리고 정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이제 진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당신이 여기 있었으면 문제가 없었겠죠. 안 그래요?”
“이게 무슨 헛지랄입니까?!”
인수는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뱉어냈다.
“아니, 위험에서 구해 주신 분을 애초에 위험을 막아 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려는 겁니까?”
하지만 그녀는 이제 인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인수를 철저히 무시한 채 진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초에 우리한테 말 한마디 없이 대체 어딜 갔던 거예요?”
“성주선 씨!”
성은이 그녀를 향해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진강이 팔을 들어 그를 막았다.
“…….”
진강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은과 인수, 성진은 말을 아껴 주겠지만 주선의 말에 동조하고 있는 지우는 그렇게 해 주지 않을 터였다.
“후우.”
진강은 낮은 한숨과 함께 들고 있던 박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경면주사 가루가 담긴 물감통들이 담겨 있었다.
“……!”
그 내용물을 보자마자 성주선과 그녀에게 동조하던 다른 모든 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되겠습니까?”
진강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른 박스들을 들고 강좌실 밖으로 나갔다. 애초에 나눠 줄 생각은 없었던 그였지만,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불만을 그냥 놔뒀다면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커져 힘으로밖에 해결하지 못하게 됐을 터였다.
주선과 사람들은 박스로 다가와 통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개, 그리고 두 개. 그들은 박스가 텅 빌 때까지 통들을 챙겼다.
“…….”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인수와 소연, 성진과 성은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서둘러 진강의 뒤를 따라 강좌실을 나왔다. 그들은 5층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 말하지 않아도 진강이 그곳에 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