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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미솔로지 1권(20화)
8 안식으로의 산책(3)


“진강 씨……?”
“들어오십시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진강은 막자로 경면주사를 빻고 있었다.
“이, 이게 다 뭐예요?”
“경면주사입니다. 이걸 빻은 게 그 붉은 가루죠.”
인수가 대신 답해 주었지만 소연은 경면주사라는 것 자체를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괜찮겠습니까?”
“괜찮지 않다 해도 말하셨듯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그래도 위험을 알려 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위험이라니?”
성진의 물음에 성은은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그들이 마주했던 가그라는 존재와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존재들, 그리고 자신이 안전하다 여겼을 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행동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 말이 이어질수록 성진과 소연의 표정은 어두워져만 갔다.
“그, 그럼 빨리 알려 줘야지요!”
“소용없습니다.”
방을 나서려는 소연을 인수가 말렸다.
“애초에 주선 씨가 저런 식으로 나오는 이상 우리가 하는 말을 믿을지도 미지수고, 믿는다 할지라도 그러면 괜한 두려움만 커질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당장 이 건물을 떠난다거나 하진 않을 테니 조금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요.”
동의를 구하듯 인수가 진강을 바라보자 진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소연은 알았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런데 나눠 줄 생각이 없었다면 왜 이게 필요했던 건가요?”
소연의 질문에 인수는 잠시 망설이듯 진강을 바라보았다. 인수로서는 짐작 가는 바가 없진 않은 듯했지만 그는 그것을 입 밖으로 내길 망설이고 있었다.
“…….”
인수의 시선에도 진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야…….”
“그야……?”
사람들의 시선은 인수에게 닿아 있었다. 지금까지의 행동들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가 이유를 안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정작 인수의 시선은 진강에게 가 있었다.
“…….”
그러나 인수의 그러한 시선에도 진강은 그저 아무런 말없이 경면주사를 빻고 있을 뿐이었다. 인수는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야 만약을 위해서지요. 진강 씨께서는 영진 씨 때처럼 진강 씨 혼자만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를 대비하고자 하신 겁니다. 그런데 하필 대비를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일이 일어날 줄은…….”
마지막 말을 흐리며 인수는 다시 진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강은 여전히 경면주사를 빻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정말 하필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은 인수의 말에 납득하는 듯 보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우선은 식사부터 하는 게 좋겠네요. 진강 씨와 저희는 점심도 못 먹었으니까요.”
“아, 그럼 내려가서…….”
“아니. 지금 내려가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조금 더 머리를 식히도록 저들끼리 놔두고 상점에서 먹을 걸 가져와 해결하도록 하죠. 소연 씨, 성진 씨, 성은 씨.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예.”
인수의 부탁에 세 명은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졌을 때쯤 조용히 있던 진강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 말하시지 않은 거지요?”
“어째서 가만히 계셨던 겁니까?”
진강은 인수의 그 답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찌 되든 상관없었기 때문입니다.”
“상관없다……고요?”
인수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상관없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결국은 밝혀질 일이니까요. 다만.”
“다만?”
“바로 그래서 당신을 믿어 볼 수 있었습니다.”
진강은 빻아 놓았던 가루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럼 역시 제가 생각하는 게 맞는 모양이군요.”
“무엇을 생각하시는지요?”
“당신 안에 뭔가 있다고요.”
진강은 인수의 그 말에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에는 그 경면주사가 당신에게 힘을 주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때 그 불길한 그림자와 그림자 이후 빛을 잃은 경면주사들, 그리고 그 이후 한동안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듯 강력한 힘을 휘두르던 당신을 보아 경면주사는 당신에게 힘을 준다라기 보다는 오히려 힘을 억누르는데 사용되는 것 같더군요.”
“대단하군요. 물론 성은 씨도 어딘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긴 할 테지만 당신은 확실히 진실에 근접한 것 같군요.”
진강은 막자사발에 다시 경면주사를 넣고는 빻기 시작했다.
“다만 안에 있다……라는 표현은 조금 안 맞겠지만 말이죠.”
“그럼……?”
“훗. 지금까지 그랬듯 한 번 예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진강은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연 일행이 돌아올 때까지 경면주사를 빻고, 입에 털어 넣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조금 뒤 소연 일행이 돌아왔고 그들 손에는 토치와 냄비, 라면 등이 들려 있었다.
이미 식사를 했던 소연과 성진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마침내 늦은 저녁을 챙겨먹을 수 있었다. 다만 진강의 경우는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다는 이유를 들며 많이 먹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그들은 괜한 말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인수의 의견을 따라 밑에 있는 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것은 꽤나 지루한 시간이라 말할 수 있었다. 특별한 대화도 없었으며, 진강마저 경면주사 빻는 일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특별히 하는 일도 없었다.
“이, 이제 그만 내려가도 되지 않을까요?”
숨 막히는 침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소연이 그렇게 말했다.
“그, 그렇군요.”
“충분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소연의 말에 인수와 성진도 급히 동조했다. 그들로서도 이 침묵은 견디기 어려운 거였다.
“내려가실 겁니까?”
“예. 진강 씨께서는 오늘도 여기서 주무실 겁니까?”
“한 번 자 보니 여기가 꽤 편하더군요.”
진강의 그 말에 다른 이들은 가벼운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그리고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천천히 밑으로 내려왔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
“예. 안녕히 주무세요.”
그들은 문 앞에서 짧은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
소연이 방으로 들어서자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성주선은 아직 깨어 있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그녀는 소연을 향해 특별히 뭐라 말을 걸지는 않았다. 아니, 주선은 아예 그녀 자체를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사정은 남자들 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창걸과 지우가 깨 있기는 했지만 몸을 돌려 누운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들은 잠자리에 들었고 이내 건물 내에는 어둠과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아늑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훈구루이 무구루우나후 크툴후 르 리에 우가후나구루 후타군…….”
아니, 진강이 있는 5층 사무실 내에만은 침묵 대신 예의 그 음울한 중얼거림이 내려앉아 있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밤은 깊어 갔다.

***

부르릉! 부르릉! 빵! 빵!
깊은 밤. 한 자동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도로를 달린다.
“크오오!”
그리고 그 불빛과 소리를 따라 수를 셀 수조차 없는 워커들이 그 뒤를 따른다. 앞줄의 워커들은 불빛을, 그 뒤에 있는 워커들은 소리를, 그리고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뒤쪽의 워커들은 달려 나가는 눈앞의 워커들과 뒤를 따르는 워커들에 밀려.
그렇게 한밤중, 워커들이 만들어 낸 그 거대한 검은 물결은 천천히 어딘가로 향해 가고 있었다.
“제길! 나를 바보 취급했겠다!”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자는 계정이 처음 던져 버렸던 그 뱀파이어였다. 그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크락션을 울리고 깜박이를 켜 대고 엔진음을 높였다.
“어디 두고 보라고. 500살 먹은 노인네가 겁만 많아서는……. 나는, 나는 다르다고.”
시간이 지날수록 워커들의 무리는 불어났고 속도도 점점 더 빨라져 갔다. 어느새 차는 원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워커들은 그 뒤를 바짝 뒤쫓고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잠시 뒤 저 멀리에서 다른 자동차 한 대가 또 한 무리의 워커들을 몰고 오는 것이 보였다. 불빛을 번쩍이며 요란하게 크락션을 울리던 새로운 자동차는 끌고 온 워커들을 그 거대한 무리에 합류시키더니 이내 모든 불과 소리를 끄고는 몰래 다른 쪽으로 향했다. 몇 마리의 워커들 정도는 다시 그 자동차를 따라갔지만 그 수는 미미했다.
“그래. 더 끌고 와! 본때를 보여 주자고!”
저 멀리에 또 다른 자동차들이 오는 것이 보인다. 지금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진강과 사람들이 있는 마을이었다.

“어이, 어이 괜찮은 거야? 좀 전에 몇 놈이 방에서 몰래 나와서는 가 버렸다고.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바텐더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계정을 향해 물었다.
“훗. 알고 있어. 하지만 내 명령을 듣지 않는 녀석을 굳이 지켜 줄 의무는 없지. 꼴사납게 죽어 버리라고 해.”
계정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아직 혈기가 남아 있는 거겠지. 남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가 말이야.”
“주제도 모르는 것이!”
그의 눈동자에는 살짝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바텐더는 계정을 향해 술병을 건넸다. 이번엔 피가 든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술이었다.
“참아. 분수도 모르고 자기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게 젊은 녀석들이잖아. 거기다…….”
“거기다?”
바텐더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런 세상이 되어 버렸잖아. 입은 줄어들수록 좋은 거라고.”
“변함없이 무서운 녀석이구나, 너.”
바텐더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현실적이라고 해 달라고.”
계정은 술병째로 그대로 들이켰다.
“어이 어이! 그거 꽤 독한 술이라고.”
“훗. 어차피 취하지도 않는 몸인데 뭘…….”
“비싸다는 소리지. 뭐 이제 와서는 의미 없긴 하겠지만. 거기다 사실 우리도 취하긴 취하잖아. 주량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의 10배 정도 더 마셔야겠지만 말이야.”
“그 정도 마시려면 다른 걸 다 떠나서 신체적으로 무리야. 욕조에 담아 놓고 다 마시라는 소리니까.”
바텐더는 빙그레 웃더니 두 팔을 펼치며 자신의 뒤에 놓여 있는 진열장을 가리켰다.
“해 볼래?”
“사양하지.”
“그래? 하긴 뭐 나도 그런 낭비를 하고 싶진 않아.”
바텐더는 몸을 숙이더니 진열장 아래 숨겨진 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숨겨 놓았던 소주 박스였다. 그 모습에 계정은 혀를 내둘렀다.
“이야! 소주를 챙겨놨냐?”
“그래. 가끔 나 혼자 마시지.”
바텐더는 작은 잔을 꺼내서는 소주를 담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을 넘겼다.
“그 조그마한 걸 또 나눠 마시냐?”
잔에는 소주가 반 이상 남아 있었다.
“어차피 안 취한다면 많이 마시든 적게 마시든 의미 없지. 이런 식으로 느낌을 살리는 게 오히려 훨씬 마음을 취하게 해 준다니까.”
“그래?”
계정은 들고 있던 술병을 놓고는 바텐더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 계정의 모습에 바텐더는 자연스럽게 잔을 꺼내 놓았고 그들은 서로를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멸망한 세계를 위해.”
“어리석은 죽음에 애도를.”
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울리고 그들은 그대로 술을 들이켰다.
“역시 나는 잘 모르겠군.”
계정은 잔을 놓고는 다시 놓았던 술병을 집어들었다. 그런 계정의 모습에 바텐더는 웃었고, 계정 또한 그런 바텐더를 보며 웃었다.
그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술잔을 비웠고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물론 그 덕분에 옆방에서 휴식을 취하던 뱀파이어들은 잠을 설쳐야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