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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미솔로지 1권(21화)
9 지옥의 만찬(1)


“……?”
동쪽 하늘에서부터 어둠이 점점 쫓겨 가고 있을 때 성진은 뭔가 묘한 불안감에 눈을 떴다. 뭔가 말할 수는 없지만 마치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어 가는, 혹은 호수에 내려앉는 모기떼를 떠올리는 그러한 불길함이었다.
“……?”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깨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성진은 뭔가에 이끌리듯 밖으로 나왔다. 물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화장실에 들러 세수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불길한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잠깐의 변덕이었다. 창문에 반사된 햇빛에 눈이 부셔 눈길을 살짝 돌렸을 뿐이었다.
“……!”
하지만 그 후 그가 보게 된 것은 단순히 그런 이름들로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진이 본 것은 눈길이 닿는 곳이라면 어느 곳 하나 할 것 없이 워커로 넘쳐 나는 마을의 풍경이었다. 그 모습은 성진에게 흡사 2002 월드컵 때의 그 열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열정에 휩싸인 군중의 목적이 공놀이가 아니라 성진 자신을 포함한 이 건물 내 모두의 목숨이라는 점이었다.
“…….”
성진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볼을 꼬집어 보았다.
“……!”
통증과 함께 성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5층으로 뛰어올라 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부수다시피 사무실 문을 열었다.
“지, 진강 씨!”
그러나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성진은 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그렇다고 진강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지, 진강 씨……?”
성진은 눈앞의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의식은 어느새 멀어져 가고 있었고 이제 그는 무의미한 줄 알고 있으면서도 기계적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무의미한 행동을 하는 와중에 그의 눈에 경면주사가 든 상자가 보였다.
“……!”
성진은 그제야 제정신을 차렸다.
그는 박스를 집어 들고는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1층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셔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설사 자물쇠를 채워 놓았다고 해도 저 정도 숫자라면 셔터는 버틸 수 없을 터였다. 최악의 경우 이미 문은 열린 채 워커들이 건물을 활보하고 있을지 몰랐다.
“…….”
그는 코너를 앞에 두고 마음을 잡았다. 그리고 상자 속에서 경면주사들을 집어 들었다. 경면주사를 가진 것만으로 범접하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숫자에게도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는 비장한 각오로 코너를 돌았다.
“깨셨습니까?”
하지만 코너를 돌았을 때, 성진은 그 모든 것을 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1층에는 진강이 내려와 있었다. 또한 셔터도 멀쩡했다.
진강이 손을 펼치고 있자 워커들은 어떤 투명한 벽에 막힌 것처럼 셔터는커녕 입구 가까이로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성진은 사태 파악을 할 수 있는 여유를 되찾았다. 당황해 새하얗게 질려 있던 그의 얼굴도 이내 혈색을 되찾고 있었다.
“어제 그 뱀파이어 놈들이 끌고 온 것 같습니다. 새벽에 자동차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들이 달려오더군요.”
“그,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무시지도 않고 여기 계셨던 겁니까?”
“잠은 충분히 잤습니다.”
진강은 성진이 들고 있는 박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제게 주시겠습니까?”
“네? 아, 네!”
성진은 박스를 진강에게 건넸다. 진강은 경면주사를 한 움큼 집어 들어서는 그대로 문을 향해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내려놓지 않았던 한쪽 팔을 내려놓았다. 워커들은 한결 자유로워 보였지만 입구 쪽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제때 와주셨습니다. 팔이 조금 아팠거든요.”
진강의 그 말에 성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설마 계속 들고 계셨던 겁니까?”
“아뇨. 들고 있던 가루들이 다 떨어진 이후부터였습니다. 이 정도 숫자가 한꺼번에 몰려들고, 또 이 정도나 큰 건물이면 가루만으로는 불가능하거든요.”
“그게 언제인데요?”
“한 2시간 정도 되는군요. 가루는 별로 안 챙겨 놨었거든요.”
진강은 손을 털더니 가게 쪽으로 걸어가 빵을 하나 집어 들었다. 주민들 취향에 맞추다 보니 카스테라와 단팥빵밖에 없었지만 그 또한 굳이 많은 종류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팥빵을 베어 물고는 우유 대신 생수를 집어 들어 들이켰다. 그리고 빵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진 뒤 진강의 손은 카스테라로 향했다. 확실히 그는 많이 배가 고픈 듯 보였다.
“그, 그런데 저건 어느 정도나 효과를 발휘하죠?”
성진은 입구에 흩어진 경면주사를 가리키며 물었다. 진강은 재빨리 카스테라의 남은 부분을 쑤셔 넣고는 물을 들이켰다. 그리곤 한 번에 넘기더니 입구 쪽으로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단순히 효력만 말한다면 아마 하루나 이틀 정도는 효과를 발휘하겠죠. 하지만 완전히 막아 주진 못해요. 저 정도 숫자면 밀려서 들어오는 것도 있으니까요. 셔터가 무너지면, 그 다음부터는 최소 한두 마리씩은 계속해서 무사히 안으로 들어오겠죠. 경면주사는 더 빨리 그 효력을 잃을 테고 그 뒤는 뭐…… 말 안 해도 아시겠죠?”
진강이 가볍게 주먹을 쥐자 여댓마리의 워커들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이렇게 앞으로 밀려오는 것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진강은 한 번 더 손을 펼쳤다가 쥐더니 다시 진열장에 집중했다.
“다, 다른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깨우기는 하셔야겠지만, 굳이 불러 오지는 마십시오. 괜히 시끄러워질 수 있으니까요.”
진강은 이번에는 빵이 아닌 과자 봉지와 육포를 집어 들었다.
성진이 올라간 뒤 몇 분도 되지 않아 4층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서 창밖을 바라보았고 처음 성진이 그랬던 것처럼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들이 어떤 창문으로 밖을 본다 해도 보이는 거라곤 수많은 워커 무리였고 한적한 시골 마을은 2002월드컵 때 대도시들보다 더 붐비고 있었다. 아니, 아예 워커들로 마을이 잠겨 버렸다고 하는 게 올바를 것이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아마 어제 도망친 뱀파이어들 중 몇 명이 꾸민 일이겠죠.”
“1, 1층은 괜찮은 거예요? 주, 주차장은요?”
“여긴 지하 주차장이 없습니다. 1층에는 진강 씨가 계시고요.”
다만 그러한 패닉 속에서도 인수만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사람들의 쓸데없는 질문들에 대신 답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인수의 모습이 주선의 눈에는 거슬렸다.
“대체 뭐하는 거예요? 밖에 상황이 안 보여요?”
“그래서요? 당황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러지 않는 제가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거고요? 우리 모두 다 같이 공황 상태에 빠지면 저 워커들이 우리를 상한 음식으로 판단하고 알아서 떠나는가 보군요.”
“이런 상황에서도 재수 없게 구는군요!”
“누가 할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어제 일 때문인지 인수의 말투와 목소리, 그리고 눈빛은 그전보다 훨씬 더 깊고 강렬한 경멸을 담고 있었다.
“대체 당신이란 여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런 상황에까지 쓸데없는 시비라니요. 남성혐오증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나요? 애인이 배신했던가요?”
인수의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이내 흥분으로 시뻘게져 갔다.
“감히……!”
“감히?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군요. 당신 같이 멍청한 여자가 감히 제게 이딴 식의 언사를 해대는 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요.”
“뭐, 뭐요?!”
주선과 인수의 언쟁이 이어질수록 패닉 상태에 있던 방 안의 분위기는 저 밖이 아니라 그들 중심으로 변해 갔다.
“지금까지 당신이 한 모든 행동이 당신이 얼마나 멍청한지 알려 주죠. 앞뒤가 전혀 안 맞는 그 모든 말들과 행동들. 그나마 당신의 행동 중 절반만이라도 말이 되려면 당신은 절대 자살을 선택하지 않아야 되겠죠.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바로 그 사실이 방금 만회한 절반 이상만큼 당신이 얼마나 멍청한지 증명하는 또 다른 증거가 되고요. 죽을 생각도 없이 자살 모임에 들다니 그보다 멍청한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 물론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행동들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이, 이……!”
주선은 쏟아내는 인수의 말에 맞서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완전히 붉게 변해 있었는데,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은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치부를 들킨 어린아이처럼, 그녀는 그걸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인수는 결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 당신은 아마 아버지와의 그 어떤 교감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도 남자 친구 혹은 그렇게 여길 만한 남성 혹은 남성들에게 배신당했겠지요. 최소한 그렇게 느낄 정도로 말입니다. 그것은 남성 불신을 낳고 남성 불신은 혐오로 발전했겠죠. 그래서 사사건건 반발하고 거부하고 삐딱하게 나오는 겁니다. 흔히 정신 연령이 낮은 유치한 인간들이 잘하는 짓이죠. 나이를 먹으면서 쌓은 거라곤 정신적 성장이 아니라 조금 더 그럴싸한 변명과 방식에 관한 메뉴얼 정도인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닥쳐요! 닥치라고요!”
그녀는 발악하듯 소리를 질렀지만 인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이 자살 모임에 참가한 것도 스스로의 선택이나 그런 게 아니라 단순한 반발이었겠죠. 상대의 관심을 끌고 싶기라도 했습니까?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었나요? 그래서 홧김에 마지막 순간, 세레머니에 참가하기로 한 겁니까? 하긴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다는 그 안내문이 선택을 도왔겠죠. 안 그래요?”
“당신이 뭘 안다고……!”
눈물이 맺힌 채 내뱉은 서러운 그녀의 그 한마디에 인수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비웃음이었고 경멸이었으며 도취감이었다.
“예. 저는 모르죠. 이 모든 건 그냥 맘대로 세워 본 가설에 불가합니다. 초보적인 심리학 지식과 섣부른 해석이 섞인 단순한 가설이죠. 하지만 지금 당신의 태도를 보아 확신할 수 있군요. 제 이 가설이 모두 맞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당신이 얼마나 멍청한 인간이지 증명하는 또 다른 증거가 되어 주겠지요.”
“…….”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녀는 격침된 배처럼 그대로 가라앉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바닥으로 향한 채 움직일 줄 몰랐고 초점을 잃은 채 맺혀 있던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은 마치 혼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현숙과 지금껏 그녀를 지지해 왔던 한 여인이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그 어깨를 감쌌지만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인수의 미소는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