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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미솔로지 1권(22화)
9 지옥의 만찬(2)
그는 주선에게서 몸을 돌리더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모두 걱정하지 마십시오. 밖에 아무리 많은 수가 있어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지금이야 진강 씨 혼자 고생하시고 있지만 문에 바리케이트를 치면 해결될 문제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적으로 지금 달라진 게 뭐가 있죠?”
더 이상 사람들은 당황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그 마음에 든 불안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조금 전 언쟁과 인수의 그 말들이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인간은 연약한 동물이고 살아남기 위해선 주변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 되었고 주변 환경 변화에 그들 스스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민감하게 반응한다. 집단 공황 상태나 전혀 다른 타인이 같은 환상을 공유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인수가 한 번 분위기를 바꾼 이상 그들 스스로 공황 상태가 되고 싶다고 여겨도 그러긴 어려웠다.
“자자. 그러니 다른 분들은 창밖에 저것들은 무시하고 편히 계시면서 식사 준비라도 하십시오. 아, 성진 씨, 성은 씨, 정진 씨는 저랑 같이 내려가도록 하죠. 진강 씨가 조금 더 수월하게 바리케이트 치는 걸 돕자고요.”
인수의 제안에 사람들은 흔쾌히 그 뒤를 따랐다. 태연한 인수의 태도에 그들도 걱정을 저 멀리로 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강좌실 문을 나와 계단으로 나왔을 때 인수의 표정은 그 누구보다도 어두워졌다.
“이거 정말 큰일입니다.”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사람들은 당황했다.
“큰일……이라니요?”
“지금이야 진강 씨께서 막고 계시고 바리케이트를 쌓아 막는다 치더라도 상대는 워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워커들이야 위험한 야생동물이지만, 뱀파이어들은 머리를 쓰는 사냥꾼입니다.”
인수의 목소리는 그 어떤 때보다 무거워져 있었다.
“단지 벽을 막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뱀파이어가 정확히 어느 정도의 신체 능력을 가진지는 모르지만 건물 전체의 창문들도 문제고 최악의 경우 화물 트럭을 몰고 벽으로 돌진한다거나 폭발, 화재를 일으킬 수도 있지요.”
사람들은 갑자기 변한 인수의 태도와 그 내용들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들 또한 조금 전까지 인수의 말에 마음을 잡아 가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는…….”
“맞아요. 방금 전에는…….”
“조금 전은 단지 다른 분들을 안심시키려 한 말에 불과합니다.”
“그럼 성주선 씨를 그렇게 대한 것도……?”
“아뇨. 성주선 저 여자에 대한 건 거짓이나 지나침 따윈 없이 완벽하게 진심이었습니다. 짓뭉개 버릴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먼저 시비를 걸어 준 거죠. 그나마 이 불행 중 제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운이었습니다. 하지만 방 분위기도 바꿀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먼저 시비를 걸어 준 점에는 감사해야겠군요.”
그의 얼굴에 잠시 만족스런 미소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쨌든 이 사실들은 지금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도록 하죠.”
사람들은 강좌실에서와는 달리 무거운 얼굴로 1층으로 향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
가까운 집 옥상에서 건물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뱀파이어들은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 정도 수를 끌고 온 것만으로도 상황은 끝나야 했다.
워커들 특유의 본능으로 생명에 이끌리고, 건물 입구로 몰려든 격렬한 워커들의 물결에 문 따위는 부서져 내렸어야 했다.
하지만 워커들은 어째선지 건물 입구 앞에서 멈춰 서 있었다.
뒤에서 걸어오는 워커들에 의해 조금씩 밀리고는 있었지만 일정 범위 안에 들어가면 갑자기 검은 연기를 뿜어내더니 힘없이 쓰러져 더 이상 일어서지 못했다.
어느새 쓰러진 워커들의 시체로 작은 둔덕이 생겨 진입을 방해하고 있었다.
“돌아가자. 지금이라면 대장도 용서할 거야.”
“웃기지 마!”
다른 뱀파이어의 말에 제일 선두에서 워커들을 끌고 왔던 사내가 송곳니를 드러내 보였다.
“대장은 무슨! 노친네가 겁만 늘어서 몸 사리는 거라고!”
사내는 손을 들어 건물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에 열 명이 넘는 인간들이 있어! 확실히 노친네 말처럼 나중을 위해서는 일단 살려 놓는 게 좋겠지만, 어쨌든 인간이 있다고! 저 빌어먹을 한 놈만 처리하면 다 우리 거란 말이야! 그걸 포기할 거야?”
“하지만 봤잖아!”
다른 여자 뱀파이어가 입을 열었다.
“그 남자는 손짓만으로 우리 전부를 날려 보냈다고! 거기다 대장 말대로였다면 전부 죽일 수도 있었고!”
“그래서 이 역겨운 것들을 밤새 여기까지 끌고 온 거잖아!”
그는 발 디딜 곳조차 없이 가득한 워커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잖아!”
“아니! 소용이 없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오래 걸릴 뿐이야! 생각해 보라고! 지금은 어떻게 막고 있다고 해도 곧 한계에 부딪힐 거야! 그 잘난 대장조차도 계속 힘을 사용할 수는 없잖아. 저놈도 분명 그럴 거야!”
“하지만 언제? 여기에 계속 있을 순 없어!”
그들 사이에 충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젯밤 흥분에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정신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너도 그저께 봤잖아! 그 커다란 것들, 그 흉측한 것들! 대장이 아니었으면 우리도 죽었을 거라고!”
“그래. 그만하고 이제 돌아가자. 피라면 거기도…….”
“너흰 그런 걸로 만족할 거야? 저기 싱싱한 피가 있는데 고작 냉동식품으로 만족하라고?”
“그만해! 우린 대장의 명령도 어기면서 널 따라왔어! 저 빌어먹을 것들을 여기까지 몰고 왔고!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잖아!”
“…….”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위해 이곳까지 따라나선 이들은 모두 4명. 그들은 바로 그 자신 때문에 로드인 계정의 명령을 어기고 이 자리에 있었다.
본래 뱀파이어 사회에서 로드의 명령에 반하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었다. 뱀파이어 사회에 내려오는 법칙은 단 세 가지였다. 뱀파이어 사회에 해를 가하지 마라. 정체를 들키지 마라. 그리고 로드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라.
셋 중 어느 하나라도 어긴 자가 있다면 즉결 처분이 가능해진다. 즉, 그들은 목숨을 걸고 따라나서 준 것이다.
그는 가만히 다른 네 명의 눈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알아.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나만이라면 또 몰라도 너희까지 처벌받을 수 있어.”
“괜찮아. 분명 대장이라면……!”
“착각하지 마. 아무리 사람이 좋아 보여도 500년 이상 살아온 괴물이라고. 그냥 용서해 줄 리가 만무하잖아.”
“그, 그럼?”
“우리가, 아니, 최소한 너희만이라도 용서를 받으려면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그는 시선을 돌려 입구가 아닌 5층을 바라보았다.
“…….”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워커들의 머리 위로 몸을 날렸고 워커들의 머리와 어깨를 밟으며 진강들이 있는 건물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
자리에 앉은 채 기계적으로 워커들 처리하고 있던 진강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다가온 다섯 개의 검은 기척이 건물 벽면을 타고 위로 향하고 있었다.
“젠장!”
그는 경면주사가 든 상자를 그대로 바닥에 엎어 버렸다. 가득 들어 있던 경면주사는 그대로 쏟아졌고 바닥에 깔린 경면주사로 바닥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바리케이트를 치기 위해 상점에서 무거운 물건들을 가져오던 인수와 사람들은 갑작스런 진강의 그런 모습에 놀랐다.
“여길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진강은 말하고는 곧바로 계단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가 채 계단에 닿기도 전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기척은 5층 강좌실 안으로 들어왔다.
“제길! 늦었나!”
그는 몇 계단 올라서더니 이내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바닥에서부터 검은 기류가 스멀스멀 올라와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오, 오지마!”
창문을 깨고 들어온 뱀파이어들을 향해 창걸은 들고 있던 경면주사 가루를 뿌렸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또한 급히 품에서 경면주사 통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뭐지?”
“마늘이나 십자가는 맞아본 적 있는데 이건 또 처음이네.”
뱀파이어들은 몸에 묻은 경면주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냈다.
“좀 따끔하긴 한데 고춧가루인가?”
아니, 아예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닌 것 같았지만 어쨌든 해를 끼칠 만한 건 아니었다.
“토, 통하지 않아?!”
사람들은 경면주사가 소용이 없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도, 도망쳐!”
몇몇 사람들이 문 쪽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뱀파이어들 중 하나의 모습이 흐릿해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럴 수는 없지.”
“아, 아……!”
가장 앞서서 문으로 달려왔던 남자는 갑작스런 뱀파이어의 모습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뱀파이어는 주저앉은 남자를 바라보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입가심 정도라도 하면 안 되려나?”
“히, 히익!”
“장난할 시간 없어. 벌써 위로 올라오고 있다고.”
“어쩔 수 없군!”
문 앞에 있던 뱀파이어는 눈앞에 주저앉은 남자를 잡아들었다. 아니, 뱀파이어들은 각자 가까이에 있던 사람을 한 명씩 잡아들었다. 그들에게 잡힌 것은 문 앞에 주저앉은 사내와 앞으로 나섰던 창걸,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바닥만을 보고 있는 성주선과 그녀 곁에 있던 두 명이었다.
“노, 놓지 못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몸부림치려 했지만 뱀파이어의 악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좋아! 가자!”
그들은 그대로 창문 밖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런데
“……!”
이상했다. 그들은 어째선지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크, 크윽!”
그리고 목에 전해진 갑작스런 강렬한 압력. 뱀파이어들은 전해지는 그 고통에 데리고 있던 사람들을 놓쳐 버렸다. 사람들은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그들에게 떨어져 방 반대편으로 몸을 옮겼다.
다만 성주선만은 어째선지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