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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미솔로지 1권(23화)
9 지옥의 만찬(3)
“무리다. 건물 전체에 주술을 걸어 놨으니 네놈들은 나갈 수 없다.”
문이 열리고 진강이 걸어 들어왔다. 하지만 여유만만한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어딘가 피곤하다고 할까, 괴로워 보였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몸 주변에는 흐릿하긴 했지만 검은 연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네놈들 대장이란 그놈이 오지 않은 걸 보아, 이 유치한 짓거리는 네놈들 단독 행동인가 보구나.”
꽈악!
“크, 크윽!”
진강이 주먹을 쥐자 뱀파이어들은 괴로운 듯 신음성을 뱉어냈다.
“그럼 네놈들 목숨만으로 참고, 뱀파이어들을 찾아 몰살시키는 건 관두도록 하지.”
사람들은 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진강의 왼쪽 눈은 눈동자뿐만 아니라 안구 전체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
진강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급히 왼쪽 눈을 가렸다.
“네, 네놈 정체가 뭐냐?!”
붙잡혀 있는 뱀파이어는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진강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그 눈동자에 분노가 일었다.
“힘을 너무 쓴 건가.”
순간 뱀파이어들은 몸에 가해지는 압력이 약해진 걸 느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몸을 잡고 있는 힘도 한층 약해져 있었다.
“……!”
뱀파이어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속박에서 벗어났다.
“이놈들이……!”
진강은 급히 다시 손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뱀파이어 중 한 명이 그런 진강을 향해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는 성주선이 잡혀 있었다.
“…….”
진강은 순간 멈칫했다. 뱀파이어들은 성주선의 목에 날카로운 손톱을 가져다대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생각 마. 그때는 이 여자 목숨은 없을 테니까.”
“네놈들이 정말 그럴 수 있을 거라 믿느냐?”
사람들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진강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시험해 볼까?”
“…….”
뱀파이어의 손톱이 목에 닿아 있었지만, 성주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진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원하는 게 뭐지?”
“사람들을 데려가겠다.”
“뭐?!”
방 한 구석,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상황을 지켜 있던 사람들이 술령였다.
“마, 말도 안 되는……!”
“그런 요구라면 들어줄 수 없다.”
“일단 들어봐!”
뱀파이어의 고함 소리에 뒤쪽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일순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우리는 인간에게 해를 가할 생각 따윈 없다. 오히려 어제 말했듯 우리는 생존자들을 모아 인류의 재건을 계획하고 있다. 인간들이 없으면 우리도 곤란하니까. 우리를 따라오면 정중하고 쾌적한 대우를 약속하겠다.”
“누, 누가 뱀파이어 말을……!”
“애, 애초에 우리한테 최면술을 걸었었잖아!”
“그래. 우리는 뱀파이어지. 그러니 그냥 말하면 누가 순순히 우리말을 듣겠어. 그러니 최면과 암시를 써서 안심시킨 뒤에 해야지. 그리고…….”
뱀파이어는 다른 쪽 손을 들어 진강을 가리켰다.
“애초에 저놈도 수상한 건 마찬가지 아니야? 인간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리 없잖아. 거기다 좀 전에 저 눈동자 봤지? 거기다 저놈은 이미 세상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면서? 우리보다 수상하고 위험하지 않아?”
“맞아. 너희도 저놈을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됐다면서? 아니, 오늘까지 치면 3일이겠지만 어쨌든 저놈 목적이 뭔지 누가 알아? 나중에 잡아먹으려고 남겨 둔 건지도 모르잖아!”
“어디서 감히……!”
분노 때문인지 이제 진강의 오른쪽 눈도 검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뱀파이어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저거 보라고! 저놈이 우리보다 위험하지 않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데?”
술렁술렁.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진강과 뱀파이어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다 안타깝게도 지금 인수는 이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진강을 대변해 주거나 분위기를 진정시켜 줄 사람은 없었다.
“화, 확실히…….”
“하, 하지만…….”
진강은 말없이 뒤편에서 웅얼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뭐라고 변명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것이 의미가 없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후후.”
뱀파이어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졌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사람들도 데려갈 수 있다.
그러한 생각들에 점점 불안은 사라져 가고 여유 또한 돌아오고 있었다. 사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인질을 잡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그 인질 때문에 멈춰 서 있는 진강보다 저쪽 말을 더 신뢰하다니.
만일 인수가 있었다면 결코 이런 분위기로 흐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사람들은 뱀파이어들이 만든 분위기에 완전히 휩쓸리고 있었다.
“나, 난 따라가겠어.”
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도망치려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던 그 사내였다.
“나, 나도!”
“…….”
그리고 그런 사내의 행동에 현숙과 또 다른 여성 한 명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뱀파이어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천천히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래도 되겠지요 진강 씨?”
“마음대로.”
진강의 그 말에 일어난 사람들은 천천히 뱀파이어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뱀파이어들은 성주선의 목에서 손톱을 거뒀다. 이미 이것은 협상이 아니었다. 사람들 개개인의 선택 문제였다.
“…….”
진강은 왼쪽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의 눈은 완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경악했고 그들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가시고 싶은 분들은 가십시오. 저들에게 가고 싶다면 막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일어서지 않았다. 그것이 진강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신뢰 때문인지는 확실히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더 이상 뱀파이어를 향해 다가가는 이는 없었다.
“뭐 어쩔 수 없군요. 그럼…….”
뱀파이어들은 시선을 주선에게 옮겼다.
“당신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조금 전까지 목에 손톱을 들이밀고 생명을 위협하던 자들이 하기에는 확실히 뻔뻔스러운 말이었다.
“…….”
어쨌든 성주선은 그 물음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계속 숙이고만 있던 고개를 돌려 뱀파이어들을 한 번 둘러보긴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
“……?”
뱀파이어들뿐만 아니라 사정을 모르는 진강 또한 성주선의 그런 행동에 의아해했다. 지금까지야 너무 놀라서 몸이 안 움직였다고 여길 수도 있었지만 지금 상황은 전혀 달랐다.
“…….”
그녀는 아무 말도 않은 채 빤히 뱀파이어들의 얼굴과 그의 손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뭔가 생각하는 듯 복잡한 빛을 내고 있었다.
“고민하시는 겁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좀 전에는 실례를 범했지만 앞으로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거라 장담하지요.”
혹시나 아까 일 때문에 고민 중인가 싶어 뱀파이어들은 그렇게 말을 덧붙였지만, 그녀는 그런 일 따위는 상관없는 듯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묘한 침묵이 이어져 갈 때쯤, 갑자기 문이 열렸다.
“무, 무슨 일 있습니까?”
문을 연 것은 인수였다. 여길 부탁한다는 진강의 그 말에 지금까지 밑에서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올라온 거였다.
“……!”
그런데 인수의 등장에 갑자기 주선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는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갑자기 뱀파이어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그 손톱에 자신의 목을 들이밀었다.
푸욱!
손을 잡힌 뱀파이어도, 또 다른 이들도 지금 눈앞에서 일어난 이것이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진강은커녕, 당사자 뱀파이어조차 어떻게 하기도 전에 그 손톱은 그대로 성주선의 목을 꿰뚫었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
그녀는 그대로 있는 힘껏 뒷걸음질 쳤다. 구멍을 막고 있던 손가락은 빠져 버렸고 목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피가 뱀파이어들의 얼굴과 몸에 뿌려졌다. 그녀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흘러나온 피로 그녀의 옷은 붉게 젖어 갔고 바닥에도 피가 고여 갔다.
“어, 어서 지혈할 걸!”
소연과 가까이 있던 사람들 중 몇 명이 그녀에게 달려갔지만, 그들 중 정작 어떻게 해야 될지 아는 이는 없었다.
소연은 지혈이라도 하자는 생각에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지만 주선은 온 힘을 다해 뿌리쳤다.
피는 점점 더 많이 흘러나왔고 비릿한 피 향이 방을 가득 채웠다.
“……!”
그리고 인수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주선이 고개를 기울여 그를 보고 웃은 거였다. 그녀의 표정에 담겨 있는 것은 어떤 기분 나쁜 승리감이었고, 그녀의 눈에 담겨 있는 것은 슬픔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눈동자가 빛을 잃어 가며 표정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휘청!
인수는 다리가 풀린 듯 옆쪽 벽면에 기댔다. 표정은 큰 변함이 없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
하지만 문제는 그가 아니었다. 뱀파이어들 쪽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들은 뭔가 참기 어려운 것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주선의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나 주선의 목을 꿰뚫었던 뱀파이어는 그녀의 피로 아직 따뜻한 그 손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이 멸망한 지 삼 일. 그것은 그들이 신선한 피를 맛본 지도 그 정도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뱀파이어에게 있어서 신선한 피는 단순한 음식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그 어떤 마약보다 강렬한 쾌락을 동반하며, 생물의 그 어떤 본능보다 앞서는 충동을 일으키는 것.
거기다 이미 상대가 죽은 거라면 인류 재건이라는 계획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지금 그들의 강력한 본성을 막고 있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연약한 이성뿐이었다.
날름.
뱀파이어들 중 하나가 윗입술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입술 끝에 묻어 있는 핏방울을 가볍게 핥았다. 그의 얼굴에 희열이 떠오르고 전율로 몸이 떨렸다.
“……!”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피를 처음 핥은 뱀파이어의 표정이 바뀌더니 이내 자기 몸 곳곳에 튄 주선의 피를 핥기 시작했다.
“이, 이봐!”
처음에는 말렸다. 하지만 계속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참고 있던 다른 이들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에 튄 피를 핥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런 뱀파이어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들의 눈빛은 옅은 붉은빛으로 변해 있었고 마침내 더 이상 핥을 피가 없어진 그 순간,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주선의 시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캬악!”
가까이 있던 소연과 다른 사람들을 거칠게 밀어낸 그들은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주선의 시체에 송곳니를 꽂아 넣거나 바닥에 고인 피들을 핥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의 아귀를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