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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7화)
Chapter 3 프레너미
(Friend+Enemy)(3)
원수처럼 싸우기만 하던 차니와 제이에게 1년이란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놓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둘이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서로 도와주며 정을 쌓기 시작한 것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둘의 관계 회복은 로체의 역할이 컸다.
그것은 차니와 제이만의 특별반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생긴 일이었다.
정규 수업을 마친 로체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이 공들여 가꾸고 있는 화단으로 향했다. 아카데미 후미진 곳에 있는 정원의 한 귀퉁이에 로체는 자신만의 화단을 꾸미고 있었다.
꽃을 좋아하는 그녀가 아카데미의 교사들을 조르고 졸라 겨우 마련한 소중한 그녀만의 공간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며칠 전에 심은 이름 모를 씨앗이 싹을 틔웠을까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즈음엔 이미 아카데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진 차니와 제이의 살벌한 다툼이었다.
평소 친구들이 그들의 얘기를 할 때마다 제이와 차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말해 왔던 로체의 귀에 제이의 독기 서린 외침이 들려왔다.
“파이어 볼!”
펑! 펑!
갈수록 빨라지는 제이의 마법과 만만찮게 빨라지는 차니의 움직임. 그리고 여자아이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응? 비명소리?’
자신이 가꾸어 온 소중한 공간이 차니의 발자국과 제이의 마법으로 송두리째 엉망이 되어 가는 것을 목격한 로체가 비명소리의 주인공이었다.
“으아아아앙.”
“난 몰라.”
갑작스런 로체의 등장과 나타나자마자 터트려 버린 울음에 차니와 제이가 흠칫 동작을 멈추었다.
아카데미 교사들 여러 명이 한 번에 달려들어 떼어 놓아야 간신히 서로를 향한 공격을 멈추던 그들이 보인 반응치고는 의외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두 명의 꼬마 악마들.
“누, 누구야? 저 누난?”
“나도 모르지. 근데 대체 왜 저래?”
“난들 알겠냐.”
분위기 파악하느라 잠시 둘의 대화가 이어지기 무섭게 로체의 비명 같은 절규와 외침이 들려왔다.
“죽여 버릴거야∼∼”
아닌 게 아니라 죽일 기세로 로체가 둘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자 제이가 황급히 차니에게 말했다.
“튀어. 미친 여잔가 보다.”
“헉. 알았어.”
제이가 쏜 파이어 볼이 폭발할 때만큼 큰 소음을 내지르며 둘을 쫓아가는 로체의 입에선 여전히 죽여 버린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거의 한 시간에 걸친 추격전이 끝난 건 차니가 로체에게 다가가면서였다.
3∼4살 많아 보이는 로체였지만 이미 성인 남자의 움직임을 상회하는 꼬마 악마들을 붙잡을 순 없었다.
쫓아가다 주저앉아 울고 다시 일어나서 쫓아가는 로체가 안쓰럽기도 하고 대체 무슨 사연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차니는 그만 도망치고 잡히는 것을 택했다.
“누나 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차니가 뻔뻔한 질문을 하며 다가오자 로체는 이를 악물고 차니에게 뛰어가 차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려 했지만 하도 뛰어다니다 보니 차니 바로 앞에서 다리가 풀려 버려 그만 차니 쪽으로 쓰려지고 말았다.
아무리 움직임이 날쌘 차니라도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로체가 자기를 덮칠 듯 쓰러지자 버티지 못하고 그 아래에 깔려 버렸다.
멀리서 지켜보던 제이가 황급히 차니를 구하려 뛰어왔지만 로체의 구타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왜 그랬어?”
그렇잖아도 약해 보이는 로체가 빈 주먹으로 차니의 가슴을 마구 때렸지만 그리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그 바람에 안심하고 다가오던 제이도 어느새 로체에게 덥석 팔을 잡혀 차니 옆에서 나란히 구타를 당하고 말았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한참을 차니와 제이를 번갈아 가며 때리던 로체가 이젠 때릴 힘도 없는지 다시 주저앉아 속절없는 눈물만 쏟아내고 있었다.
기회가 생겼지만 도망가지 않고 그런 로체의 왼쪽, 오른쪽에 차니와 제이가 앉았다.
“저, 저기……. 누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13써클 아이스 애로우를 눈으로 쏘는 듯한 차가운 로체의 눈빛을 보자 호기심에 굳이 안 해도 될 질문을 한 제이의 심장은 그대로 얼어 버렸다.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밑도 끝도 없이 화만 내는 로체를 달래는 차니와 제이가 정원에 대한 얘기를 들은 건 저녁이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로체가 아카데미에 입교할 때 겨우 두 살이던 동생이 있었는데 무서운 병에 걸려 죽었고 그런 동생을 그리워하며 가꾸고 있는 정원이 자기들 때문에 쑥대밭이 돼 버렸다는 탄식도 들었다.
아직 어린 아이라 그 정원에서 어차피 죽은 동생과 함께 있지도 못할 건데 뭐가 그리 슬픈 거냐고 되물어 볼 만하건만 차니와 제이는 진심으로 로체에게 미안해만 했다.
“누나, 우리가 동생 할게요. 그만 울어요.”
“맞아요, 누나. 우리가 동생 대신 같이 있어 줄게요.”
꼬마들의 눈에는 어느새 전염된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런 제이와 차니를 보자 로체도 그만 맥이 풀려 버려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정말이지?”
“그럼요∼”
“정말이에요∼”
로체는 다짐하듯 대답하는 차니와 제이를 양팔을 벌려 품에 끌어안았다.
“그럼 이제 내가 너희들 누나 해줄게. 오래오래.”
그 날부터 한 명이 늘어 3인조가 된 패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몇 해 뒤 로체가 떠나던 그 날까지.
* * *
“차니야, 그럼 잘 있어.”
소녀치고는 이미 성숙한 아름다움을 물씬 풍기는 로체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누나.”
가지 말라며 붙잡고 싶은 7살짜리 마음을 사나이 자존심으로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얼마나 혼란스럽고 번잡했던가. 다시 태어났을 때만큼이나 큰 결심이 필요했던 생활이었지만 그녀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3살 위의 로체는 차니가 아카데미 생활에 적응하며 즐길 수 있도록 거의 모든 부분에서 도왔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5살짜리도 알 수 있을 만큼 예쁜 외모의 소유자였다. 싸우기만 했던 첫 만남 때와 달리 이젠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인 제이도 그녀가 없었더라면 이토록 친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셋이서 얼마나 즐겁게 웃고 다녔는지 왕립 아카데미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삼남매로 불렀다. 그런 그녀가 오늘 왕립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그것은 이변이 없는 한 남은 3년 동안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이야, 그만 울어야 착하지.”
로체가 다정하게 웃으며 눈물범벅 홍당무가 된 제이를 안고 달래 주었다.
“누나, 가지 마. 안 가면 안 돼? 우리랑 같이 있다가 우리가 졸업할 때 같이 가자, 응? 그렇게 해줄 거지?”
안 된다는 것, 말 같지도 않은 말이라는 걸 영특한 제이가 모를 리 없지만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누나 없이도 너희가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면 누나가 너희 졸업식 때 칭찬하러 올게. 사이좋게 함께 잘할 수 있지?”
남겨진 동생들이 걱정되는 친누나처럼 로체가 말을 이어가며 제이를 달랬다.
“제이야, 그만 누나 보내주자.”
최대한 덤덤한 척 제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고 있지만 간신히 울음을 참아내는 차니의 얼굴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래, 제이야. 누난 너희가 잘 해낼 거라 믿어.”
다시 한 번 두 팔을 힘껏 벌려 두 동생을 끌어안은 로체가 다짐받듯 타일렀다.
“응, 누나. 졸업식에 꼭 와야 해.”
“누나, 잘 지내세요.”
최대한 의젓한 척 말하는 차니와 제이에게 웃어주며 로체는 마차에 올랐다.
창을 열어 보니 애꿎은 나뭇가지와 돌멩이들이 차니와 제이에게 마구 밟히고 있었고 구경하던 구름도 서둘러 멀어지고 있었다.
Chapter 4 마법이냐 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1)
뙤약볕이 독수리 부리처럼 무섭게 피부를 쪼아댔지만 날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이 왕립 아카데미의 방침이었다. 당연히, 매일 오후에 예정된 실외 검술 교육도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상단 찌르기. 구령 맞춰서 시작!”
검술 교관은 청년층 최고 그룹에 속해 있는 제임스 남작이었다. 30살도 되지 않았지만 이미 그레듀에이트란 칭호를 받은 그였다.
검술의 경지는 4등급으로 나뉘는데 스승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경지란 뜻의 ‘그레듀에이트’가 있고 그 위로 마나를 검에 실어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레이더스’ 그 다음으로 마나의 지배자라 불리는 ‘마스터’ 그리고 지금껏 누구도 도달하지 못해 아무런 자료가 없는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가 있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세 나라는 비슷한 수의 검사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 중 마스터는 비잔틴 제국에 두 명과 파운드 제국에 한 명이 존재했고 아스카 제국은 마스터의 대가 끊어진 상태였다.
“조금 더 힘차게 구호 붙여서 못하겠나? 다시 처음부터!”
제임스가 위엄을 실어 한껏 부풀린 목소리로 외쳤다.
“하나! 둘!”
훈련생들은 또다시 처음부터 할 수 없다는 듯 전보다 더 큰 기합을 내며 진지하게 연습에 임했다. 그들 중에서도 유달리 튀는 자가 둘이었는데 바로 차니와 제이였다.
“차니야, 상단 찌르기로 정말 다른 기사들을 제압할 수 있을까?”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 몸과는 달리 제이의 입에서는 의심이 튀어나왔다.
“아니, 없어.”
차니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확신하면서 넌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
제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건 확실하거든.”
차니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뭐? 하하. 이런 치사한 놈.”
제이가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물론, 너한테 그렇다는 뜻이야. 나는 상단 찌르기 하나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거든.”
차니가 다시 덤덤한 말투로 제이의 자존심에 비수를 꽂았다.
“그래, 너 잘났다.”
사실, 차니가 아닌 항우에게 상단 찌르기란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니의 경우는 다르다. 항우의 강인한 육체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된 수련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많은 방법을 알고 있더라도 손발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쓸데없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항우는 새로이 얻은 육체를 쉼 없이 단련하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10세부터 수련을 혼자 시작했지만 지금은 5세부터 엄선된 스승에게 배울 수 있으니 항우에게 이것은 지루한 것이 아닌 오히려 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