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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8화)
Chapter 4 마법이냐 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2)
“모두들 더운 날씨 속에서 수련하느라 수고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이상.”
제임스의 말이 넓은 연병장에 울려 퍼졌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 지르며 기숙사로 뛰어갔고, 차니와 제이는 제일 뒤에서 느긋하게 걸어 올라갔다.
“차니야, 넌 검사가 되고 싶은 거야?”
복잡한 표정으로 제이가 물었다.
“글쎄, 검술도 재밌고 더 많이 배우고 싶긴 한데 지금은 마법이 더 끌려.”
예상외인 차니의 대답이었다. 그렇게 죽자사자 검만 연습하더니!
“그래? 잘됐다. 나도 검술보다 마법이 훨씬 재밌거든.”
같은 길을 함께 갈 동지가 생겼다는 기쁨일까? 제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제이가 마법사를 꿈꾸는 건 어쩌면 당연하게 보였다. 현재까지 그가 보여준 마법에 대한 재능은 매월 황제에게 보고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으니까. 마법을 본격적으로 배운 지 겨우 3년째인 제이지만 이미 3써클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각 나라의 군대에는 무사들과 함께 마법사도 같이 소속되는데 대부분이 바로 3써클의 마법사였고 최상급 부대에서나 4써클 이상의 마법사를 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륙 전체에 5써클 이상의 마법사 수가 100명이 채 안 될 정도로 고위 마법사란 그 수가 적었다.
파운드 제국에는 인간이 이룬 경지라고는 믿기 힘든 6써클의 대마법사가 존재했는데 그가 바로 제이의 부친인 페르마 후작이었다.
마법은 총 12단계로 나뉘며 7써클 이후는 기나긴 수명을 자랑하는 엘프들만의 경지였다. 하지만, 엘프들의 역사서에도 8써클 마법사는 단 2명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9써클부터 12써클은 실존하지 않는 경지가 아니냐는 의문이 들 것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다만, 그 지고한 경지는 신의 축복을 받은 드래곤만을 위한 것이었다.
* * *
“제이란 아이가 4써클 마법을 시전했다고 했나? 마나의 축복을 받은 엘프라면 모를까 어찌 인간이…….”
매월 초에 열리는 왕립 아카데미 보고 회의 중 황제가 깜짝 놀라 보고자에게 되물었다. 보고를 전담하고 있는 이는 30년째 왕립 아카데미의 교장으로 재직 중인 라필드 백작이었다.
“부족한 소견으로는 아마 엘프라도 불가능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는 모두 황제 폐하의 크신 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라필드 백작이 한껏 공손한 자세와 어조로 황제에게 말했다.
“하하,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라필드 백작.”
“예, 폐하.”
“경이 아카데미에 재직하는 동안에 혹시 또 이렇게 성취가 빠른 인재가 있었소?”
과거의 전쟁 영웅들 중 혹시 누군가의 어린 시절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 황제가 물었다.
“제가 아카데미에 있었던 시간은 물론이고 그 이전의 아카데미 역사에도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유일한 인재는 아니옵니다.”
자신의 인재 교육 철학이 오늘에서야 인정받는다는 느낌에 한껏 기분이 좋아진 라필드 백작이 대답했다.
“유일한 인재가 아니다? 그런데 역사상 그런 인재는 없었다면 앞뒤 말이 안 맞는 것처럼 들리는구려.”
설마 하는 마음으로 황제가 라필드 백작을 재촉하듯 말했다. 할 말 있으면 뜸들이지 말고 어서 기쁜 소식을 전해달라는 눈빛과 함께.
“몬테규 공작 또한 4써클의 마법을 시전하였습니다.”
기대에 부응하듯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라필드 백작이 대답했다.
“오오. 몬테규 공작이! 아니, 잠깐. 몬테규 대공 가문은 대대로 검의 고수들이 아니오?”
황제는 기쁘고 설레면서도 아쉬운 듯 말했다. 사실,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전체적인 마법사 수가 부족한 파운드 제국이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압도적인 검사들의 수와 능력이었다. 4백 년 전 대륙제일검의 칭호를 받고 대공 작위를 하사받은 몬테규 대공 이래로 파운드 제국 최고의 검사는 항상 몬테규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자손이 매우 적어 세대가 바뀔 때마다 불안해하며 기다리긴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몬테규 가문에서는 소드 마스터를 배출해 국가의 위상을 유지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몬테규 가문의 유일한 혈통이 검이 아닌 마법의 길로 빠져 버린 것이다. 물론, 6써클 이상의 대마법사까지 성장해 준다면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소드 마스터의 존재는 너무나 절실한 것이었다. 쉬운 예로, 삼국 회담이 열릴 때마다 다른 두 나라와는 달리 아스카 제국의 왕은 수많은 호위 기사와 마법사를 모아 참석했다.
다른 두 나라의 황제 호위는 물론 그 나라의 마스터 혼자면 충분했다. 어쩌면,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 파운드 제국이 아스카 제국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안타까움으로 나타난 것이다.
“폐하, 염려 마시옵소서. 차니 드 몬테규 공작은 이미 소드 그레듀에이트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마치 자신의 업적인 양 한껏 자부심이 느껴지는 라필드 백작의 말이었다.
“무어라? 마법과 검을 동시에 수련하고 있단 말인가? 으하하하, 역시 몬테규 대공가군. 내 왕위에 올라 오늘처럼 우리 제국의 앞날이 환해 보이기는 처음인 듯하구려.”
황제는 자신의 아들을 도와 제국에 큰 힘이 될 두 소년을 생각하며 통쾌한 웃음을 지었다.
“저도 그렇사옵니다. 폐하. 감축 드리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화기애애함은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게 번져 회의 내내 시원한 웃음꽃이 끊이지 않게 했다.
* * *
어느덧 시간이 흘러 차니와 제이는 11살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휴∼ 길었다. 그치?”
11살짜리 제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게. 어느새 졸업이구나.”
차니가 덤덤히 대답했다.
둘은 잠시 몇 해 전 오늘을 회상했다.
로체가 졸업한 후 차니와 제이에게는 공동의 목표가 생겼었다. 아카데미 졸업식 날 누나를 다시 만났을 때 수고했어, 잘했어 라는 칭찬을 듣고 싶다는 소박한 목표였지만 둘은 나라라도 구할 기세로 열심히 아카데미 생활에 임했다.
매사에 말썽꾸러기였던 둘의 태도는 180도 달라져 오히려 너무 진지한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또한, 성취가 워낙 빠른 둘이었기에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었는데 요즘은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이 되레 그들을 핀잔줄 정도로 겸손해져 있었던 것이다.
“로체 누나… 왔을까?”
차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제이가 얼른 말을 이었다.
“야, 누나가 못 왔으면 우리가 찾아가면 되잖어.”
“응? 그래, 그러면 되겠다! 흐흐.”
뭔가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한 차니의 웃음이었다.
아카데미의 공식 행사인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차니와 제이는 황제의 호출을 받았고 약 5분 동안 황제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둘 다 한사코 입을 열지 않았다.
“차니야∼”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들의 아카데미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몬테규 대공 내외였다.
“엄마∼ 아빠∼”
11살짜리 꼬마 차니는 달려가 그들의 품에 안겼다.
“고생 많았지? 우리 아들∼”
“에이∼ 엄마도. 고생은 뭐. 귀족이라면 다 가야 하는 데였는데 뭘.”
자신의 말에 크게 웃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있는 여자아이.
‘응? 여자아이?’
낯선 아이 때문에 화들짝 놀란 차니가 대공부인을 향해 폭풍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어… 엄마? 저 꼬마는 누구야?”
아들의 반응이 재밌는지 대공부인은 그저 웃기만 했다. 답답해하는 차니를 위해 대신 나선 몬테규 대공이 차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차니야. 니 여동생 앤이야. 예쁘지?”
“억! 여동생이요?”
처음 보는 여동생의 존재가 신기하고 반가운지 차니는 재빨리 앤에게로 달려갔다.
“앤∼ 오빠야. 만나서 반가워.”
처음 보는 존재에 거부감을 느낄 만도 하건만 그때까지 엄마의 치마 뒤에 숨어있던 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니를 향해 아장아장 걸어와 덥석 차니를 안으며 옹알이를 내뱉었다.
“오∼빵”
“응. 오빠야.”
몬테규 대공 내외는 오누이의 감격(?)적인 상봉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차니는 가족들에게 그간의 아카데미 생활과 친구들 얘기를 신나게 떠들었고, 가족들은 즐겁게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지는 도중 저편에서 차니를 찾는 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니야∼ 얼른 와! 로체 누나 왔어!”
어느새 쏜살처럼 사라지는 아들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아들과 그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몬테규 대공 내외는 잠시 뒤 차니와 제이를 향해 양팔을 벌리며 눈부시게 웃고 있는 로체를 볼 수 있었다.
Chapter 5 론리 섬(1)
몬테규 대공가의 오랜 전통 중 하나는 다른 귀족가문과는 달리 대공가의 안주인이 직접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온 가족이 참석하는 저녁 식사보다 오히려 아침 식사 시간이 분위기가 좋다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었다. 여러 시종들이 식사를 보조하는 저녁 식사와는 달리 아침 식사는 대공가의 직계가족들끼리만 함께했기 때문이다.
“대공 전하, 스캇 백작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식사 시간에는 그저 문밖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킬 뿐이던 피에르가 웬일로 몬테규 대공가의 아침 식사 도중 방문인의 존재를 알렸다. 대공가에서 나고 자란 그는 50이 넘은 지금 대공가의 집사 직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분별없이 나서는 일 따위는 일절 없다고 믿는 기족들은 순간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더구나 방문자가 스캇 백작이었다. 스캇 백작은 몬테규 공국의 외교와 국방을 아우르고 있는 유능한 40대 후반의 관료였다. 그가 이른 아침부터 방문했다면 필시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스캇 백작이? 들어오라고 하시게.”
몬테규 대공이 무릎 위에 덮어두었던 냅킨을 들어 입 주위를 닦으며 방문자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음을 손짓으로 알리자 곧 문이 열리고 스캇 백작이 들어왔다.
“이른 아침부터 안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와 죄송합니다.”
대공가의 아침 식사를 방해한 그는 다소 송구한 기색을 보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간밤에 아스카 제국의 함대가 쳐들어와 론리 섬을 함락시켰습니다.”
“론리 섬을?”
몬테규 대공이 의외란 듯이 되물었다. 영지 구석구석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몬테규 대공으로서도 론리 섬을 침공하는 건 의외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론리 섬은 바위섬을 겨우 벗어난 수준의 작은 섬으로 전쟁을 하면서까지 빼앗을 만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 전하. 아스카 제국의 함선들은 론리 섬을 함락시킨 후 주변을 경계 중일 뿐 아직까지 내륙으로 다가오지는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