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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10화)
Chapter 5 론리 섬(3)


초대 몬테규 대공의 입지적인 전과를 기록하기 위해 세운 ‘전쟁기념관’. 그 안으로 파운드 제국 최고의 실력자들이 모이고 있었다. 아스카 제국 수도 타격이라는 죽기 딱 좋은 슬로건을 내건 동원령에 그것도 겨우 반나절 만에 집합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자들이었다.
이상한 건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는 것이었다. 대륙제일검인 몬테규 대공이 베일에 싸여 있는 몬테규 기사단을 이끌고 적국을 치러가는 길이니 겁낼 것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파운드 제국 대대로 최고의 기사를 배출한 몬테규 대공가는 그 핏줄만으로도 분명한 제국의 상징이었지만 그만큼이나 명성을 가진 존재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몬테규 기사단이었다. 초대 몬테규 대공이 이끌었던 기사단 역시 그 아들의 아들로 영광스런 기사단의 작위가 이어져 왔는데 그들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당연히 그들의 실력도 베일에 싸여 있었다.
활동이 전혀 없는 몬테규 기사단이기에 다른 제국에서는 아예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만 파운드 제국, 적어도 몬테규 공국에서는 그들의 실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백 년 동안 제국의 위기 상황이 생길 때면 그들은 어김없이 등장했고 믿을 수 없는 전과를 올린 채 유유히 사라지기를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몬테규 대공과 함께 전쟁기념관 대강당의 단상에 올라 자리를 지키던 차니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반가운 인물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 있어 대강당으로 들어오는 무리 중 제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아들의 낌새를 눈치 챈 몬테규 대공이 말했다.
“반가운 사람이라도 보았느냐?”
“네. 꽤나 성가신 녀석이죠. 흐흐.”
“하하하. 그래? 어디 같이 한번 가 보자꾸나.”
“네. 가시죠.”
곧 있을 전투에 대한 부담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부자 간의 대화였다. 말을 마친 부자는 느긋하게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인사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여어∼. 여긴 핏덩어리가 올 곳이 아닌데… 혹시 잘못 온 거 아니야?”
잔뜩 심술궂은 차니의 말이 울려 퍼졌고 아랑곳하지 않는 제이의 묵직한 한 방이 이어졌다.
“뭐래는 거야. 아직 소드 마스터도 못 이룬 짝퉁 몬테규 주제에.”
“큭. 그새 네놈 혀는 어째 더 지독해졌냐. 짝퉁 페르마야.”
“뭐래는 거야. 나 진품 페르마 된 지 오래됐거든?”
아카데미 시절부터 서로 놀려온 패턴이었다. 소드 마스터로 유명한 몬테규 가문이니 소드 마스터가 아니면 가차 없이 짝퉁 취급하는 제이와 마법으로 유명한 페르마 가문이니 5써클의 마법사가 아니면 역시 가차 없이 짝퉁 취급하는 차니였다. 그런데, 제이가 진품으로 바뀌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내뱉고 있는 것이다.
“지, 진품? 에이∼ 설마.”
“못 믿으면 5써클 화염구로 통구이 한번 만들어 줘?”
그들의 독기(?) 어린 대화에 어느새 다가온 몬테규 대공이 동참했다.
“5써클이라고 했나?”
새로운 관객의 등장과 시선의 집중을 느끼며 제이가 주인공이 된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데 걸린 시간은 3초. 질문의 주인공을 확인하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는 데 걸린 시간은 1초.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하하하. 일어나시게.”
“감사합니다.”
갑자기 아버지 옆으로 가 같이 무게 잡는 차니의 태도에 몬테규 대공은 피식 웃음 지으며 질문을 이어 갔다.
“다시 한번 묻지. 5써클이라고 했나?”
“예, 전하. 그렇습니다.”
“이런 경사가 있나! 자네 같은 젊은이가 있다니 제국의 앞날이 훤해지는구먼.”
“과찬이십니다, 전하.”
“아니야. 과찬은커녕 모자란 감이 없지 않거늘. 그래, 자네 이름이 뭔가?”
“제이 폰 페르마입니다.”
“아…….”
한참 기분 좋게 웃던 몬테규 대공이 페르마란 성을 듣자 안타까운 탄성을 냈다. 거의 20여 년 전 그 성을 가진 전도유망했던 후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스카 제국과의 국지전에서 단신으로 적군을 물리친 페르마 후작, 바로 제이의 부친이었다. 자신이 기사단을 이끌고 도착했을 때엔 이미 적군은 괴멸되었고 페르마 후작 역시 과도한 마나 소모로 생명을 잃은 상태였다.
짧은 회상을 마친 몬테규 대공이 제이를 향해 물어왔다.
“지난 아스카 제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신 분은…….”
“선친이십니다.”
덤덤한 제이의 대답을 듣자 얼굴 가득 애통한 빛을 드러낸 몬테규 대공은 잠시 뒤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 선친께서 살아 계셨다면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을 거야. 그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더욱 정진하시게.”
“예. 전하.”
“그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끼리 얘기 나누게.”
“예. 전하.”
잠시 제이의 어깨를 그 큰 손으로 쓰다듬던 몬테규 대공이 자리를 뜨자 기다렸다는 듯 차니의 물음이 이어졌다.
“야, 벌써 5써클은 심한 거 아냐?”
“재능이지, 암. 후후.”
“이런 빌어먹을.”
“억울하면 너도 얼른 소드 마스터가 되던가!”
“으으으.”
“뭔가 시작되나 보다. 다들 정렬하시는 거 같은데? 나중에 보자.”
분해서 다음 말을 잇지도 못하는 차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정렬하기 위해 사라지는 제이. 그런 제이의 등짝에 눈빛으로 9써클 마법인 헬파이어를 쏟아 붓는 차니.

“갑작스런 소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속히 참석해줘 고맙네. 이미 다 들었겠지만 오늘 아침에 본국 론리 섬이 아스카 제국의 침공을 받았다네.”
단상 위에서 몬테규 대공이 연설을 시작하자 집합한 인원들은 곧 이어질 명령을 기다리며 귀를 기울였다.
“애석하고 분한 일이지만 론리 섬을 지키던 우리 군은 전멸하고 말았네. 그리고 아스카 제국의 함대는 아직도 물러나지 않고 본국 해협에 머물고 있다네.”
여기저기서 비통한 심정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그들을 둘러본 몬테규 대공이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의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을 생각이네. 임무를 수행하다 전사한 12명의 피 값은 원수들의 피로 받음이 옳지 않겠나! 이에 나는 존경하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아스카 제국의 수도를 공격할 것이네. 혹시 전혀 모르고 참석했다거나 특별한 사정이 있어 이번 작전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집으로 돌아가도 좋네.”
잠시 뜸을 들인 몬테규 대공이 가다듬은 목소리로 힘차게 외쳤다.
“혹시 불가피한 사정을 가진 사람 있는가?”
몬테규 대공이 작전 개시에 앞서 단합을 촉구하자 집합한 인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우렁차게 한목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없습니다!”
전원이 작전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내자 몬테규 대공은 목소리를 바꾸어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좋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모인 전원은 이번 작전에 동원된다.”
“예!”
“이번 작전은 상주전이 아닌 게릴라전이다. 우리는 적국 수도에 최대한 큰 피해를 입히며 황궁으로 돌격할 것이다. 황궁 경비를 뚫든 뚫지 못하든 작전 개시 후 정확히 2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이동 마법진을 통해 다시 본국으로 귀환한다. 적국의 함대가 물러나기 전까지 우리는 적의 수도를 같은 방식으로 몇 번이고 공격할 것이다. 혹시 작전에 대해 궁금한 사항 있는가?”
“없습니다!”
“좋다. 그럼 작전명 발키리. 지금 즉시 시작한다. 전군, 나를 따르라!”
말을 마친 몬테규 대공이 단상에서 나는 듯 내려와 강당 밖으로 뛰어가자 정렬해 있던 인원들이 오와 열을 맞춰 신속히 그 뒤를 따랐다. 전쟁기념관 정원에는 어느새 여러 개의 이동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대기 중이던 마법사들이 황급히 작전 참여 인원을 맞았다. 눈 깜빡할 새 마법진 위로 인원들이 모두 나눠서는 것이 보였고 뒤이어 몬테규 대공의 외침이 들렸다.
“발키리 작전 개시!”
곧이어 그들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잠시 후 모두 사라졌다.

아스카 제국의 수도 비에리.
땡! 땡! 땡! 땡! 땡!
적의 침입을 알리는 마법 알람이 도시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즐기던 도시 전체가 발칵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이어서 ‘으악, 아, 안 돼!’하며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며 황궁을 향해 200여 명의 무리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망치처럼 강하게 돌격하고 있었다. 그 앞을 막아섰던 수도 경비대는 마치 호두 껍데기처럼 으스러지고 있었다. 선두에서 금발을 흩날리며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몬테규 대공과 그 뒤를 마치 한몸인 듯 받치고 있는 몬테규 기사단의 활약이 눈부셨다. 어느새 그들은 아스카 제국의 황궁 앞까지 진격했고 드디어 적의 주력부대와 전투다운 전투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스캇!”
날카로운 목소리로 몬테규 대공이 스캇 백작을 찾았다.
“네!”
기다렸다는 듯 스캇 백작의 대답이 들려오자 몬테규 대공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하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현재까지 소요 시간은?”
“30분이 소요되었고 작전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반입니다.”
수도로 이동하여 황궁까지 진격하는 데 걸린 시간이 고작 30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작전 진행 사항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던 몬테규 대공이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작전을 변경한다. 정면에 보이는 장애물을 뚫고 아스카 황제의 신병을 구속한다. 알았나?”
“예!”
“작전 개시! 전원 돌격 앞으로!”
“와∼!!!”
한편, 아스카 제국의 수도 경비대와 황실 근위대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작 저 인원으로 감히 뭘 하겠다고? 저 같잖은 것들의 정체가 궁금하지만 일단 다 죽여 놓고 알아보겠다는 생각을 하며 검을 뽑아드는 그들이었다.
수도 경비대의 인원은 대략 3천여 명이고 황실 근위대의 인원은 5백여 명에 이른다. 인원도 인원이지만 제국 내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가득 차 있던 같잖음이 두려움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몬테규 대공의 검이 3미터짜리 핏빛 오러를 뿜어내자 아스카 제국의 수도 경비대원들과 근위 기사단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도 일생을 검과 함께한 자들이라 3미터에 이르는 오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소드 스피릿. 바로 소드 마스터만이 시전할 수 있는 지고한 경지였다.
“소드 스피릿이다! 피해랏!”
몬테규 대공이 검을 수평으로 휘두르자 검에서 뿜어져 나오던 핏빛 오러가 반월형을 그리며 정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낫처럼 보였다. 그 거대한 낫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모든 것을 베어내고 도도히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것은 몸이 반으로 분리된 수십 명의 시체뿐이었다.
그때까지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아스카 제국의 황실 근위대장인 프라임 공작이 어느새 정면으로 뛰어나와 몬테규 대공의 앞에 섰다.
“여전하시군요. 몬테규 대공.”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가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프라임 공작. 벌써 자네가 나설 땐가?”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면 부하들의 피해만 커질 뿐이니 초반부터 나설 수밖에요.”
“오호. 좋은 마음가짐이네. 그럼 어디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볼까?”
“얼마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