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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11화)
Chapter 5 론리 섬(4)
짧은 대화가 끝나자 어느새 둘의 검이 상대의 심장을 향해 날아가다 챙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이윽고 끝없이 이어지는 둘의 공방과 그들만의 전투를 뒤로한 채 저벅저벅 앞으로 나아가는 발소리. 그 발소리의 주인공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듀발!”
“몬테규 기사단장 듀발! 공작님의 명을 기다립니다.”
“몬테규 기사단은 나를 따라 황궁 안으로 진입한다.”
“존명.”
“가자!”
말을 마친 차니가 쏜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몬테규 기사단이 차니의 뒤를 받치며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프라임 공작이 전면에 나서자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아스카 제국의 수도 경비대는 다시 돌격해 오는 파운드 제국의 군사들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 엄청난 양의 석궁과 마법 공격을 날렸다. 그런 적의 공격을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차니의 외침이 이어졌다.
“선두는 더 빠른 속도로 돌격해 적의 궁수와 마법사를 제압한다!”
“존명!”
눈 깜짝할 사이 수도 경비대의 코앞까지 거리를 좁힌 차니가 허공을 향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자 시리도록 파란색의 마나 폭풍이 휘몰아쳤다.
“소드 윈드!”
뒤편에 있던 근위 기사단 중 한 명이 놀라 소리쳤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니의 정면에 있던 궁수들의 몸이 어지럽게 조각나며 무너져 내렸다. 소드 레이더스가 구사할 수 있는 마지막 경지인 소드 윈드는 그 앞을 가로막은 사람과 검을 모두 조각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얼마간 일방적인 학살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차니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수도 경비대의 인원은 수 명씩 사라졌고 몬테규 기사단의 검도 그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그렇게 승기를 굳히려는 찰나 몬테규 기사단의 한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깜짝 놀란 차니가 고개를 돌려 무너져 내린 기사단 쪽을 보니 서 있는 인원이 전무했다. 얼핏 봐도 5명 이상의 기사단원이 전사한 듯했다.
몬테규 기사단의 분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스카 제국 근위 기사단의 복장을 한 40대 중후반의 남자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격에 몬테규 기사단 5명을 베어 버린 기술이라면 아마도 소드 스피릿일 가능성이 컸다. 아직까지 몬테규 대공이 이쪽으로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까 나섰던 프라임 공작이란 자도 소드 마스터란 뜻이리라. 대외적으로는 한 명도 없다고 알려진 아스카 제국의 소드 마스터가 어느새 최소 2명으로 늘어난 현실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차니의 눈빛이 차갑게 변하며 다가오는 새로운 인물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니의 움직임을 눈치챈 상대는 느긋하게 차니를 기다려 주었다. 둘이 마주서자 차니가 입을 열었다.
“아스카 제국은 생각보다 준비를 많이 한 것 같군.”
차니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파운드 제국에 워낙 성격 급한 사람이 많으니까.”
“거슬리는 말투군.”
“그런가? 오랜 시간 근위 기사단 부단장을 맡다 보니 듣는 사람 기분 따위를 신경 쓰지 않게 되었나 보군.”
“부단장이라. 생각보다 제법이군.”
“키토라고 한다네. 이만하면 내 소개는 된 것 같은데, 자네는 누군가? 어린 친구.”
“알 거 없어.”
차갑게 내뱉은 말과 함께 차니의 검이 일직선으로 키토의 목을 찔러왔다. 검을 수직으로 세워 차니의 검을 튕겨낸 키토가 그대로 차니의 가슴을 베어오자 황급히 왼쪽으로 몸을 피한 차니가 키토의 옆구리를 다시 찔렀다.
이번에도 차니의 공격을 자신의 검으로 가볍게 튕겨낸 키토가 한걸음 앞으로 나가며 순식간에 차니의 왼쪽 어깨를 찔러왔다. 피하기에는 늦었음을 직감한 차니는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키토의 오른쪽 허벅지를 마주 찔러 버렸다.
“크윽. 어린 친구가 제법이군.”
순간의 방심으로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키토가 차니를 보며 말했다. 사실 조금 전만 해도 키토는 차니를 그저 멋모르고 허우대만 멀쩡한 부잣집 도련님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마스터인 자신이 부상을 입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보여준 한 수는 오랜 시간 전장에서 사선을 넘나들었던 노련한 용병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같이 죽자는 식의 수법이었던 것이다. 순간 키토는 자신이 상대를 잘못 판단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한편, 차니는 차니대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알기로는 아스카 제국은 분명히 소드 마스터가 없었다. 만일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면 비잔틴 제국과 파운드 제국의 비웃음을 사면서까지 삼국 정상회담 때마다 그 많은 수의 병력을 황제 호위에 동원하는 대신 다른 제국들처럼 소드 마스터 한 명만이 황제와 동행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지금 등장한 두 명의 소드 마스터는 최근에서야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소드 마스터와 소드 레이더스는 엄청난 능력 차이가 있지만 어쩌면 상대 스스로도 새롭게 얻은 자신의 힘을 아직까지 세밀하게 컨트롤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차니는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듀발!”
큰 소리로 몬테규 기사단장의 이름을 외친 차니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기사단을 이끌고 황궁 안으로 침투해 임무를 완수하라!”
차니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명을 받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몬테규 기사단이 차니를 남겨둔 채 전진했다. 몬테규 기사단의 이동을 눈치챈 키토가 황실 근위대에 다급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황실 근위대 전원은 적군 기사단의 황궁 침입을 막아라!”
곧이어 사방이 지옥으로 변했다. 차니의 뒤편은 수도 경비대와 파운드 제국 정예들과의 전투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차니의 앞쪽으로는 몬테규 기사단과 아스카 제국 황실 근위대의 살육전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차니는 자신보다 한 끗발 높은 상대를 맞아 발버둥치고 있었다.
서걱.
키토의 검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차니의 옆구리 쪽 어딘가를 베었다. 차니는 아차 싶었지만 옆구리의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미 키토의 공격에 입은 상처가 열 군데도 넘었지만 그때마다 마찬가지였다. 온통 상대에게 쏠려 있는 신경을 조금이라도 다른 데 돌렸다간 다음번에는 아마 자신의 목이 베어질 것이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옆구리 쪽의 상처는 신경 쓰지 말자. 조금만 버티면 된다. 비록 황실 근위 기사단장이란 자가 얼마 전에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는 해도 이미 수십 년 전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신 아버님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버티면 아버지와 우리 제국의 정예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내가 버티면 된다.’
차니는 다시 한 번 어금니를 꽉 물고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런 차니의 마음을 눈치챈 듯 키토의 검은 점점 차니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자, 어린 친구. 내가 급한 일이 생겨 버려서 우리 일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말을 마친 키토의 검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마나의 형상이 화살처럼 쏟아져 나왔다. 소드 마스터만이 시전할 수 있다는 궁극의 경지인 ‘소드 스피릿’이었다. 피하기엔 늦었고 막기에도 역부족으로 보였다. 그 찰나의 순간 차니는 승부수를 던졌다. 있는 힘껏 마나를 모아 주문을 외운 것이다.
“쉴드!”
다음 순간 키토의 검에서 쏘아져 나온 마나 화살은 차니의 보호막과 부딪혀 ‘쾅’하는 엄청난 폭발음을 냈다.
바로 지척에서 엄청난 양의 마나가 충돌했으니 그 파괴력이 엄청났다.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이 그 폭발에 휩쓸려 사라졌고 두 사람이 딛고 서 있던 땅도 2미터 가까이 푹 파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강력한 소드 스피릿을 시전한 키토가 받은 피해가 오히려 차니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마나 폭발을 정면으로 막은 키토와 달리 차니는 쉴드 주문으로 철저히 자신을 보호한 덕분이었다.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자 몬테규 대공은 불안한 생각이 확 떠올랐다. 앞에 있는 상대를 무시한 채 폭발음이 들린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순순히 보내줄 프라임 공작이 아니었다. 프라임 공작은 이미 온몸에 검상을 입었지만 악착같이 몬테규 대공을 붙들어 두고 있었다. 파운드 제국의 유일한 소드 마스터를 자신이 묶어 두고 있으면 상황을 정리한 키토가 곧 합류해 합공으로 몬테규 대공을 무찌를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양국의 자존심을 걸고 대치하고 있는 두 명의 소드 마스터와 달리 폭발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제이였다. 몬테규 대공과 프라임 공작의 대결이 시작되자마자 신속히 돌격했던 차니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후위에서 아군을 돕던 제이는 어느새 검을 뽑아들고 쏜살같이 폭발음이 들린 곳으로 날아갔다.
한편, 키토는 가까스로 저만치 멀어져 가는 정신을 붙들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마나 폭발에 휩쓸려 하마터면 그대로 죽을 뻔한 것이었다. 교활한 어린놈의 술수에 놀아났다는 생각이 들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그는 자신의 몸 상태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 검을 고쳐 잡고 차니를 향해 달려갔다.
차니의 눈에는 자신을 두 조각 내어 버릴 기세로 달려오는 키토의 움직임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두려움에 현실감을 잊은 건지 정신이 없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 제길. 어서 검을 들어야 저놈을 막을 텐데. 어? 저놈 검을 휘두르네? 파, 팔을 움직여야 되는데…….’
어느새 다가온 키토가 머리 위로 높이 든 검을 차니를 향해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차니의 귀에 익숙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앙칼지긴 해도 충분히 믿음직한 목소리였다.
“썬더 애로우(Thunder Arrow)!”
5대 원소를 이용한 마법은 각기 다른 특징이 있는데 번개 종류의 마법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 엄청난 속도였다. 제이는 차니가 위기에 처한 상황을 보자마자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빠른 공격 마법을 시전한 것이었다.
키토는 차니를 향해 검을 내리치려는 순간 자신의 오른쪽에 무언가 날아 들어옴을 느꼈다. 자신을 위협하는 게 무엇인지 고개를 돌려 확인하는 순간 이미 번개 화살은 그의 오른편 옆구리에 부딪히고 있었다.
쾅!
연이은 제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윈드 소드.”
“아이스 스피어.”
썬더 애로우를 맞고 저만큼 튕겨져 나간 키토를 향해 다시 마법 공격이 쏟아지자 차니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렸다.
쾅! 쾅!
마나의 폭발음이 들리는 걸로 봐서 마법 공격이 키토를 관통하지는 못한 것 같지만 그렇잖아도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마법 공격의 방어를 위해 사용한 키토의 몸 상태는 이미 정상이 아닐 것이었다.
어느새 차니의 옆에 선 제이가 차니를 부축했다.
“괜찮냐? 지독하게 당했구나.”
“야, 저놈 소드 마스터다. 정신 차리기 전에 빨리 마무리지어야 돼.”
“뭐? 소드 마스터? 이런 빌어먹을.”
상대가 소드 마스터임을 알자 제이가 재빨리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두 걸음도 못 가 제이를 향해 엄청난 마법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스카 제국의 마법사들이었다. 순간 머뭇거린 제이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부상을 당한 키토와의 일전보다 초죽음이 된 차니의 안전을 택했다.
어느새 다시 차니 옆으로 다가온 제이가 차니를 어깨에 걸쳐 메더니 본진 마법사들이 퇴로를 위해 이동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