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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12화)
Chapter 5 론리 섬(5)


한편, 프라임 공작을 상대하던 몬테규 대공은 제이가 들쳐 메고 오는 사람이 차니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보고 다급하게 제이를 향해 외쳤다.
“차니의 상태는?”
“치료가 시급합니다. 저는 먼저 차니를 데리고 본국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부탁하네.”
말을 마친 몬테규 대공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스카 황제의 신병을 구속하니 어쩌니 했어도 사실상 이번 작전의 목적은 해안을 점거 중인 아스카 제국 함선의 회항이었기 때문에 일이 커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래서 프라임 공작을 상대하면서도 살수를 쓰기보다는 그를 제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국의 공작을 죽이기라도 하면 확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같은 소드 마스터를 제압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고 무엇보다 상대가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통에 전장을 둘러보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인 차니의 초죽음 상태는 몬테규 대공의 생각을 ‘까짓 전쟁하지 뭐’로 아예 바꿔놓았다. 몬테규 대공의 기도가 바뀐 것을 느낀 프라임 공작이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런 프라임 공작의 회피본능에 몬테규 대공이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
“우리 제국의 공작이 초죽음이 된 상태로 실려 왔구려.”
프라임 공작은 몬테규 대공의 기세에 지지 않으려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죽지는 않은 것 같으니 이쯤에서 물러가심이 어떻소?”
다시 한 번 피식 웃으며 몬테규 대공이 말을 이어갔다.
“아니. 귀국의 공작도 초죽음을 맞아야 끝이 날 듯하오.”
심장이 서늘해짐을 느낀 프라임 공작이 뒤편에 서 있던 마법사들에게 고함치며 뒷걸음 쳤다.
“뭣들 하느냐? 이 미친 늙은이를 향해 공격 주문을 쏟아부으란 말이다!”
프라임 공작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앞으로 나아가는 몬테규 대공의 걸음은 여유롭기만 했다.
‘자, 그럼 어디.’라는 말과 함께 몬테규 대공의 검무(劍舞)가 시작되었다.
먼저 자신을 향해 쏟아져 오는 수많은 화염구와 석궁 공격을 마치 바람처럼 휘리리릭 피해 가며 한 명씩 철저히 숨통을 끊어 버렸다. 그의 검은 한결같이 아스카 제국 마법사의 심장을 향했고 어김없이 그 심장을 관통했다.
그동안 프라임 공작은 황궁 안으로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도망쳤다. 어느새 마법사와 석궁 궁수를 모두 제거한 몬테규 대공이 피식 웃으며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너무 열심히 뛰어가는군’하며 천천히 황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몬테규 대공이 황궁 안으로 진입하자 파운드 제국의 정예가 그 뒤를 따라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이윽고 황궁이 떠날 새라 울려 퍼지는 몬테규 대공의 외침.
“몬테규 기사단은 신속히 본대로 귀환하라!”
몬테규 대공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한두 명의 몬테규 기사단원이 본대로 복귀하기 시작하더니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듀발의 완료 보고가 올라왔다.
“몬테규 기사단 전원 본대 복귀를 완료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몬테규 대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스캇! 남은 작전시간은?”
“10분입니다. 전하.”
스캇 백작의 대답이 들리자 몬테규 대공이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아스카 제국은 들으라! 본국 해협에 주둔 중인 함대가 물러가지 않는다면 몇 번이고 다시 올 것이다!”
몬테규 대공이 몸을 휙 돌려 본대를 바라보며 명령했다.
“본국으로 신속히 귀환한다.”
몬테규 대공의 명령에 파운드 제국의 군사들은 나타났을 때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단 한 사람 몬테규 대공을 제외하고는.
이동 마법진이 성공적으로 구동되는 것을 확인한 몬테규 대공은 방향을 틀어 다시 아스카 제국의 황궁을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토록 귀한 자신의 아들을 생사기로에 서게 한 아스카 제국 기사단을 용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운드 제국의 기사들이 모두 퇴각한 것으로 생각했던 아스카 제국의 병력들은 그 잠깐 사이에 생긴 엄청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준비가 한창이었다.



Chapter 6 대동신공(1)


제법 마음에 드는 먹이라도 발견한 듯 아침부터 종달새가 소리 높여 울어댄다.
사방이 우거진 숲으로 뒤덮인 몬테규 대공 성의 북쪽 끝에도 여름을 알리는 녹음이 짙게 퍼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대공 부인은 폐관 수련 동굴의 입구에 서서 하염없이 동굴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몬테규 대공이 그런 아내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다가왔다.
“여보, 여름이 시작됐다지만 아직 새벽에는 날이 차구려.”
“일어나셨어요? 내 정신 좀 봐. 올라가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식사를 준비할게요.”
몬테규 공국은 물론이고 파운드 제국 귀족 전체를 통틀어도 귀족 부인이 직접 식사 준비를 하는 가문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귀족들의 일상은 잠자리에 일어나자마자 시종들이 준비해 준 식사를 침대에서 먹는 것으로 시작되니까. 하지만, 소탈한 몬테규 가의 가풍은 아침만은 대공 부인이 직접 준비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자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그 가문만의 방식이었다.
“그럽시다. 차니 이 녀석은 언제쯤 수련을 끝내려는지 원.”
“내일이 약속한 5년째 날이니 내일은 볼 수 있을 거예요, 내일 저녁은 만찬을 준비해야겠어요.”
“그래요. 약속은 틀림없이 지키는 녀석이니 우리 하루만 더 참읍시다.”
론리 섬 사건으로 아스카 제국에 침투했다 초죽음이 되어 돌아온 후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한 차니는 몬테규 대공 내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가문의 명성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 폐관 수련에 들어가겠노라고.
3년을 계획하지만 새로운 깨달음이 있다면 5년을 채우고 나오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3년이 지나 약속한 날이 되었을 때 떠들썩한 파티를 벌였지만 결국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3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니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부모에게 자식의 오랜 부재는 마냥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드디어 약속한 5년째의 날이 다가왔다.
대공 가문은 물론이고 영지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썩거렸다. 타고난 무골인 차니 드 몬테규 공작은 이미 10세 이전에 소드 그레듀에이트의 경지였다. 성인식을 치르던 해에는 등급 심사를 받지 않았을 뿐 소드 레이더스 경지를 이뤘을 거란 소문이 온 제국 내에 파다했었다. 그런 그가 5년의 폐관 수련을 했다. 어쩌면, 파운드 제국은 역대 최연소 소드 마스터를 맞이할 것이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 * *

접시를 나르다 말고 멍하니 서 있는 소녀에게 조금 더 나이 많아 보이는 소년이 다그치듯 말했다.
“이봐, 서둘러 움직이라고. 집사님께서 자꾸 우리 쪽을 쳐다보시잖아.”
접시를 나르던 소녀가 잠에서 깬 듯 화들짝 놀라며 바삐 몸을 움직였다.
“네? 네.”
“카스, 너 또 켈리 괴롭히고 있지?”
어느새 다가왔는지 대공가의 막내딸인 앤이 소년을 다그쳤다.
“아, 아닙니다, 아가씨. 그럴 리가요.”
“아니면 어서 가서 일 봐.”
“네, 아가씨.”
접시가 부족하단 말을 지껄이며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카스를 보며 앤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멍하게 서 있던 시종의 이름은 켈리.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계곡물에 흘러가는 나뭇잎처럼 떠돌다 대공가로 거두어진 시종이었다. 10여 년 전, 대공가의 막내딸인 앤을 시중들기 위해 비슷한 또래인 하녀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는 무작정 대공가의 문을 두드렸었다. 배고픔과 추운 길거리가 싫었던 그녀의 희망을 대공가는 외면치 않았고 다행히 아직까지 그녀를 따뜻하게 돌봐주고 있었다. 특히, 대공가의 막내딸인 앤은 주인이 아닌 친언니처럼 시종인 자신을 신경 쓰며 보살펴 주고 있었다.
“켈리야, 힘들면 들어가서 좀 쉬어.”
“아, 아니에요. 아가씨.”
“아니긴, 너 피곤해서 일도 못하고 자꾸 멍하게 있는 거잖어.”
“그게 아니라, 공작님 생각이 자꾸 나서…….”
“역시∼ 너도 그렇구나. 나도 오랜만에 뵐 오빠 생각에 너무 기대돼. 더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시겠지?”
“그럼요∼”
“잘생긴 얼굴이 못난이로 변했으면 어쩌나 걱정이야.”
틈만 나면 수다쟁이로 변하는 앤이 또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영지 전체에 축제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던 저녁.
폐관 수련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가 자신의 키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붉은 깃발을 힘껏 휘둘렀고 성의 꼭대기에서 그를 지켜보던 악사들이 드디어 팡파르를 울렸다.
영지민 전체가 알고 있는 대로 그것은 차니 드 몬테규의 폐관 수련이 드디어 끝났다는 뜻이었다. 누구보다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는 몬테규 대공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오. 드디어.”
당장 뛰어나가 아들을 보고 끌어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오늘의 연회를 축하해 주기 위해 방문한 수많은 귀족들이 보고 있었다. 그는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애써 표정 관리에 열심이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대공부인의 표정도 가히 침작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주인과 손님 모두가 건성으로 연회를 즐기며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시간 전만 해도 감탄을 자아내던 미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이 막연한 침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는 배경음악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5년의 폐관 수련이니 그동안 묵은 때를 벗겨내고 의복을 갖춰 입고 나오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었지만 다들 자리를 지키며 옆에 앉은 사람과 조그만 목소리로 담소를 나눌 뿐 전혀 연회를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이런 침묵의 분위기라면 주인공이 너무 부담되고 어색해 들어오다 도로 나가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할 수 없이 대공 내외가 직접 나섰다.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니 앉아만 계시지 말고 좀 더 연회를 즐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보, 오랜만에 우리도 왈츠 대열에 어울려 보는 것이 어떻겠소?”
“물론 찬성이에요.”
대공부인이 흔쾌히 웃으며 의자에 앉은 채로 오른손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몬테규 대공이 왼손으로 대공부인의 내민 손을 잡고 단상을 내려와 맨 앞에 자리 잡자,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황급히 뛰어나와 대공 내외 뒤쪽으로 자리했다.
왈츠란 왼쪽 편에 남자가 서고 오른쪽 편에는 여자가 자리해 단체로 추는 춤을 말한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단체로 춤을 추다가 악장이 바뀌면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발씩 이동하는데 이때 남녀의 파트너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바뀌게 될 파트너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엔 귀족다운 고상한 매너로 거절을 알려야하는데 그때 쓰는 방법이 바로 턴이었다. 오른쪽으로 한발 내딛고 음악에 맞춰 몸을 한 바퀴 돌리면 자연스레 그 파트너를 지나쳐 그 다음 파트너에게 가는 방식이다. 귀족들의 단체 춤이니 만큼 마주잡은 두 손을 제외하고는 터치가 엄격히 제한되지만 항상 단상에서 자리만 지키고 있던 몬테규 대공과 대공부인의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것이 아니었다.
최고의 날을 위해 특별히 초빙한 미니 오케스트라의 훌륭한 연주에 사람들은 어느새 왈츠에 집중하고 있었다. 또한, 오늘 연회는 귀빈들이 대거 참석한 만큼 매력적인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여럿 있었다. 강렬하게 높은 음을 내던 바이올린 소리가 다시 차분해지며 새로운 악장을 예고하자 왈츠 참석자들이 다시 오른쪽으로 한 발 내딛었다. 대공부인 역시 허리에 양손을 얹고 오른쪽으로 한 발을 내딛는데 누군가 그녀의 오른손을 부드럽게 낚아채며 턴을 유도하더니 마주보기도 전에 한 발 앞으로 다가가 끌어안았다. 손쓸 새도 없이 곧이어 다음 악장이 시작되자 그 뻔뻔한 젊은이가 능숙한 발놀림으로 춤을 리드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화들짝 놀라 그 간 큰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더 아름다우십니다. 마담.”
귓속말로 그 젊은이가 말하자 대공부인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퍼졌다.
어느새 연주가 그치자 두 번의 악장이 바뀌도록 끝내 대공부인을 놓아주지 않던 젊은이가 포옹을 풀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춤의 마침 인사를 건넸고 대공부인은 여전히 흠뻑 취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몬테규 대공이 좌중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제 아들 차니 드 몬테규를 소개합니다.”
짙은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에 깊고 푸른 눈망울을 가진 청년이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향해 크게 인사했다.
“차니 드 몬테규입니다.”
그제야, 안심한 듯 연회 참석자들의 환호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