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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13화)
Chapter 6 대동신공(2)


처음 다른 세계로 왔을 때 항우는 환생에 대한 당혹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유소년 시절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던 것이다.
사실, 자신을 항상 따뜻하게 바라보는 몬테규 대공 내외에게 고마움이 컸지만 거부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돌아와 10여 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지난 생에서 겪어 보지 못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어느덧 마음의 문이 열렸고 그들에게 진실한 아들로 다가갈 수 있었다.
폐관 수련장에서 보냈던 처음 2년 동안 항우는 봉인한 기억을 모조리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중원제일검으로 불리던 때의 ‘대동신공’을 다시 손에 넣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 온 마나를 ‘대동신공’으로 다시 정립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껏 쌓은 마나를 모두 흩어 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이라 그때까지 쌓은 마나는 기경팔맥으로 이동시키고 ‘대동신공’을 통해 단전에 내공을 쌓기 시작했다.
천만다행인 것은 중원보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가진 마나의 양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었고 고작 3년간 대동신공을 운용해 내공을 쌓았을 뿐이지만 어느새 전생의 자신이 가진 공력 중 1/3을 회복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로 3년만 더 ‘대동신공’을 운용하면 아마 전생의 내공을 모두 회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처음 단전을 채우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 일단 단전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훨씬 더 빠른 시간에 단전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항우였기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이번 생의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느니 차라리 약속한 날짜에 폐관 수련을 끝내는 것을 택했다.
우유부단의 극치를 보여줬던 전생의 항우를 생각한다면 놀랍도록 달라진 행동이었다. 초나라의 항우는 그 강력한 힘으로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을 가졌었고 그런 자신감은 항우를 세상에 급한 일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폐관 수련 기간에 대동신공을 회복한 항우는 이번 생에서도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매일 밤 전생을 반추했었고 새롭게 깨달은 것이 바로 자신의 우유부단함이었다.
홍문지회 때 군사였던 범증의 말을 따라 한왕을 죽여 버렸다면 자신을 따르던 그 많은 부하를 잃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그리고 우희와 죽음으로 이별하게 되는 일도 없었으리라.
적을 과감히 처단치 못해 오히려 자신의 부하가 죽게 되는 건 변명의 여지도 없는 지도자의 무능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결코 우유부단하게 살지 않겠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생각이 정리되면 곧바로 실천하리라!’
폐관 수련을 하며 단단히 결심한 차니의 삶은 전생의 항우와는 극명하게 다른 과감함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 * *

화려했던 연회는 밤늦도록 끝나지 않았기에 피곤할 법도 했건만 몬테규 대공 내외는 아침부터 차니의 방 앞에서 서성이며 그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밤새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지 모르잖아요? 우리 들어가 봐요. 네?”
“그릴 리가 없잖소, 부인. 보고 싶은 마음이야 나도 굴뚝같소만 오랜 수련을 거치고 온 녀석이 조금 더 자도록 놔둡시다. 일어나면 어련히 우리에게 오지 않겠소?”
“그야 그렇지만…….”
아침부터 아들의 방 앞을 서성이던 아내를 겨우 달래 몬테규 대공이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드디어 방문이 열리며 차니가 기분 좋은 웃음으로 부모에게 인사했다.
“아까부터 깨 있었다구요. 들어오시면 되지 왜 밖에서 그러고 계세요?”
“아니… 그게… 너 더 자라고 기다리고 있었지.”
당황한 듯 몬테규 대공이 말을 얼버무렸다.
“에이∼ 그러시면서 저한테 그렇게 마나를 쏘아대셨어요? 그것도 얼음의 기운을 담. 으. 셔. 서?”
“아니다. 아니야. 그런데 너 그게 느껴지던? 허허.”
“그렇게 노골적으로 쏘아대시는데 제가 어떻게 몰라요. 쳇.”
눈을 흘기는 24살짜리 아들의 애교가 귀여워 쓰러지는 60대 후반의 노부부였다.
대공 내외가 자리를 잡고 앉자 차니가 드디어 정식으로 폐관 수련이 끝났음을 부모에게 인사했다.
“못난 아들, 이제야 폐관 수련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랜 시간 집을 비워 죄송합니다.”
“아니야. 무사히 돌아와 주어 고맙다.”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하던 아들을 얼른 안아 일으켜 세우며 대공 부인이 말을 이었다.
“3년이라 하고 5년이 걸렸으니 이제 당분간 폐관 수련은 미뤄주길 바란다. 엄마는 이제 한동안 또 너 없는 시간을 겪기 싫구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머님. 아마 이제 장기간의 폐관 수련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감 있는 눈빛으로 담담히 말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몬테규 대공은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자신의 저 잘난 아들놈이 더 이상 폐관 수련이 필요치 않다고 하는 말은 이미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일 테니까.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마스터는 너무 이르지, 생각하면서도 믿고 싶었다.
전 대륙에 단 몇 명만 현존하는 지고한 경지인 소드 마스터. 파운드 제국이 지속된 거의 5백 년의 시간 동안 마스터를 배출해낸 가문은 몬테규 가가 유일했다.
폐관 수련장은 가문 내에 혈족만이 출입할 수 있도록 엄격히 통제된 곳으로 그곳은 역대 조상들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데 도움이 됐던 무공과 깨달음을 동굴 곳곳에 새겨둔 곳이었다. 몬테규 대공 자신도 바로 그 폐관 수련장을 세 번이나 드나들며 마침내 마스터의 경지를 이룩했었다. 그런데, 저 잘난 아들놈이 한 번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면 이보다 기쁜 일이 없었다.
“그 말은 나와 비무를 겨뤄도 손색이 없다는 뜻이렷다?”
“에이∼. 아버님, 어찌 제가 감히. 오해십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무례라던데 아비에게 계속 무례할 예정이냐?”
“아, 진짜. 아빠, 우리 사이에 너무 혹독한 검증시스템이 있는 거 아세요?”
삐진 척하는 24살 아들의 애교에 60대 노부부는 또 녹아내렸다.
“그러게, 여보. 왜 이제 막 일어난 애를 다그치세요. 성장이 빠른 아이지만 당신은 소드 마스터라구요. 체통을 좀 지켜 주세요.”
“아니야, 여보. 저놈 분명히 더 이상 폐관 수련이 필요 없다고 했어. 검사에게 그런 경우란 하나뿐이라고.”
“네? 그럼, 차니가 벌써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단 말씀이세요? 차니야, 그러니?”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기분 좋은 흥분을 내보인 대공부인을 향해 씨익 웃던 차니가 몬테규 대공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버님, 부족하지만 이 정도면 설명이 될까요?”
말을 마친 차니가 창 쪽으로 한걸음 내딛으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 있지도 않는 검을 뽑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엄지손가락 위로 바다처럼 파란 마나의 검이 뿜어져 나왔다. 바로 마스터만 시전할 수 있다는 마나의 검이었다.
“부족하지. 부족해. 그럼 어디…….”
말끝을 흐린 몬테규 대공이 순식간에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허공을 베었다. 그 순간 놀랍게도 몬테규 대공의 손 위로 용암처럼 붉은 마나의 검이 형성되며 차니가 만든 새파란 마나의 검을 두드렸다.
챙.
신기하게도 마나끼리의 충돌은 폭발음 대신 정말 칼이 부딪혔을 때의 소리를 냈다.
이윽고, 두 부자가 소리 높여 웃기 시작했고 자세한 영문은 모르지만 대공부인도 곧 그 웃음에 합류했다. 한창 소리 높여 웃던 순간 방문이 예고 없이 활짝 열리며 앤이 뛰어들어와 차니를 덥석 안았다.
“오빠∼”
“어이쿠, 우리 공주. 많이 컸네. 미모도 여전하시고.”
“왜 나는 부르지도 않고 셋이서만 즐거운 거야!”
“아니야∼ 오빠는 일어나자마자 너한테 가려고 했어. 근데, 아버지가 한사코 못 가게 했어.”
삐치기 일보 직전의 동생의 성화를 아버지인 몬테규 대공에게 토스하자 당황한 몬테규 대공이 급히 말을 받았다.
“아니야, 앤. 아빠는 억울해. 사실 아빠는 너를 깨워서 같이 오려고 했는데 너희 엄마가 한사코 못하게 한 거야.”
“네? 뭐라구요? 호호호.”
가만히 서 있다 봉변당한 대공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앤을 바라보더니 아니라며 손사래 쳤다.
“몰라, 아무튼 다음번에도 이런 소외감을 느끼게 하면 나 삐뚤어져 버릴 테야.”
토라진 막내를 보며 다른 세 명이 더 크게 웃다 앤이 다시 한 번 눈을 흘기자 부랴부랴 달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한 하루는 마치 폐관 수련 동굴에서 보낸 5년을 보상해 주는 신의 배려처럼 느껴질 정도로 따스하고 즐거웠다. 몬테규 대공 내외는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여전한 사랑을 보내고 있었고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란 것을 차니 아니 항우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차니는 5년 전의 그때와 많은 부분이 달랐다. 유아 시절 미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그리고 이번 생에서의 첫 번째 목표인 벗을 만나기 위해 억지로 봉인해 두었던 전생의 압도적인 힘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리라.
대동신공의 봉인이 풀린 3년 전 차니는 항우로 살았던 전생의 기억을 완벽히 되찾았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밤이 되면 심란해지는 마음을 돌보기 힘들었다. 어쩔 수 없다고 아무런 방법이 없지 않냐며 수없이 자신을 타일러도 머릿속에는 ‘우희’란 이름이 지워지지 않았다.
이미 달은 차서 기울고 있지만 그때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한 차니였다. 한참을 뒤척거리더니 조금 전부터는 숫제 잠드는 걸 포기한 듯 창턱에 걸터앉아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귀를 간질인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어느새 기억 속 그때로 돌아가 차니는 마주잡은 손으로 우희의 따스함을 느낀다. 그도 안다. 세상에는 되돌릴 수 없는 이별이 있다는 것을. 우희와도 그런 이별을 했음을.
그래도 차니는 홀로 있는 늦은 밤 불쑥 찾아오는 그리움을 애써 거부하지는 않는다. 당사자 중 다른 한 명이 없는 지금, 남은 한 명한테까지 거부당해 버린다면 오갈 때가 없어진 추억이란 녀석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오늘도 매우 긴 밤이 될 것 같은 기분이지만 그런 기분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