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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17화)
Chapter 9 트롤 따위!(2)
마차로 돌아온 로스는 도무지 혼란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며칠 전 오크 무리를 만났을 때 그는 사실 생을 포기했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너무 큰 오크 무리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그곳을 벗어났고 바로 그 다음 순간 정말 신기하게도 생에 대한 애착이 화산의 용암처럼 활활 끓어올랐다. 그런데, 또 몬스터 아가리로 들어가자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제니스님, 모든 분대장들이 모였습니다.”
“수고했네, 애덤. 그럼 가 보세.”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 놈의 너무 자연스러운 하대에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출발하기 전에 들은 용병단장의 말과 며칠 전에 들은 2분대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마법으로 외모를 바꾼 노친네가 틀림없고 마법의 수준으로 짐작건대 적어도 100살은 넘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자, 시간 없으니 간단히 말하지. 1, 3분대장은 분대원들을 데리고 마을로 가서 협상을 시도해 보게.”
“협… 상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
“트롤이 물론 지능이 뛰어나고 무리 생활을 한다지만, 트롤과 거래한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봅니다. 그리고, 대체 우리가 뭘 주면 저들이 마을을 지나가는 걸 허락할는지도 감이 안 잡힙니다.”
“어차피 우린 하루 반나절의 식량만 있으면 되니 나머지 식량을 다 줘 버려. 짐도 덜고 일석이조 아닌가? 하하.”
파티장, 저 미친놈은 정말 될 거란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제니스의 기분 좋은 웃음을 억지웃음으로 받으며 1분대장이 할 수 없이 대답했다.
“하. 하. 하, 그러면 되겠군요.(될 리가 있냐고!)”
“물론이지, 혹시 협상이 결렬되면 자네들은 최대한 신속히 본진으로 합류하도록 하게.”
“네.(안 시켜도 당연히 미친 듯이 도망칠 예정이다!)”
“그럼 다녀들 오시게. 5분대가 경계 근무를 서고 나머지는 대기하도록. 이상.”
“예.”
“예.”
명령을 받은 분대장들이 모두 임무 수행을 위해 자리를 뜨자 애덤이 조용히 제니스 곁에 다가왔다.
“제니스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을 해도 될는지요?”
“애덤, 자네가 묻지 못할 것은 없네. 자네는 부파티장이지 않은가.”
“정말로 협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반이지.”
“그러시다면 협상이 결렬되면 정말 마을 하나 전체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실 예정이십니까?”
“글쎄.”
“차라리, 조금 우회해서 산을 벗어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런데 애덤, 우회하다 더 큰 트롤 마을이나 오크 마을이 나오면 어쩌나?”
“그…, 그건.”
“그렇지? 그리고 우리의 계획은 최단 직선 코스였지 않나. 그대로 가 보자고.”
“많은 사상자가 생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임무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자네, 큰 착각을 하고 있구먼. 상대는 다른 제국의 기사단이 아니야. 그저 트롤 무리일 뿐이지.”
“그 말씀은… 별다른 피해 없이 저들을 물리칠 수 있는 작전이 있으시다는 거군요.”
“작전? 트롤 따위에 작전은 무슨. 자네 농담도 참. 하하하.”
“그, 그렇죠. 제 농담이 좀 과했습니다. 하하.”
역시 어색한 웃음으로 대화가 끝났고 애덤의 불안은 다시 시작됐다. 2분대원들이 공포로 헛것을 본 게 아니라 그들이 본 게 진실이라 믿으며 있는 힘껏 마음을 추슬렀다.
“1, 3분대가 복귀합니다.”
경계를 서던 5분대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걸어서 오고 있나 아니면 뛰어서 오고 있나?”
애덤이 급히 되물었다. 협상의 성공 여부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미친 듯이 뛰어오고 있습니다.”
“에휴∼. 전 부대원 전투 준비!”
“예.”
“예.”
곧이어 1, 3분대장이 제니스에게 협상 과정을 보고했다.
“불행히도 저 마을엔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는 트롤이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그래? 그럼 어떻게 협상을 진행한 건가?”
“손짓으로 가져간 식량 마차를 보여주고 역시 손짓으로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그놈들이 식량만 내려놓고 가라는 손짓을 보이더군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보단 일단 부대에 복귀하는 걸 택했습니다.”
“오호. 그놈들. 욕심에 체하겠군.”
순간 제니스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사람들이 사는 곳과 꽤 가까운 곳에 있는 트롤 마을이라 근처의 사람들과 호의적으로 지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다. 실제로, 지능이 높은 트롤은 몇몇 상인들과 지속적인 거래를 하기도 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가기에 너무 위험한 곳에 있는 약초나 생물을 트롤들이 구해 사람들에게 파는 형태의 매우 기본적인 거래였지만 사람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 거래의 핵심이었다. 또한, 거래가 지속적으로 이뤄지면 결국엔 더 지능이 높은 쪽이 이익을 보는 게 자명한 이치였다. 그런데, 사람과의 거래가 없는 트롤 부족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 근처에 있다는 건 대개 하나의 이유였다.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약탈해 가기 편한 곳에 입지를 형성했다는 것. 불행히도, 그 지역 영주는 그 마을 사람들의 안전과 평화가 안중에 없다는 것. 그 지역 영주가 군대를 동원해 토벌을 시도했다면 트롤들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버젓이 눌러 살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제니스란 이름으로 비공식 영지 순방을 하고 있는 차니 드 몬테규 공작에겐 여러 가지로 짜증나는 상황이었다. 이 지역 영주에게도 사연이 있을 수 있으니 기회를 한 번 줘 보느냐? 아니면, 불문곡직하고 트롤 마을을 쓸어버리고 영주도 쓸어버리느냐? 갈등의 연속이었다. 생각을 마친 제니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전 분대는 흩어져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찾아라. 복귀시간은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다. 반드시, 산을 완전히 벗어나는 길임을 확인하고 보고하도록. 이상.”
“예.”
“예.”
제니스와 애덤을 제외한 전 분대가 길을 찾기 위해 흩어졌다. 전면전을 피해 다행이라 생각하던 애덤이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제니스에게 말했다.
“제니스님. 혹시 트롤 부족이 딴 마음을 먹고 이쪽으로 공격해 올 수도 있으니 몇몇 분대는 다시 불러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혹시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자네는 상단 호위대를 도와 피해를 줄이는 데만 신경 쓰면 되네.”
“네.”
지극히 차가운 제니스의 목소리에 더 이상의 대꾸를 포기한 애덤이 힘없이 물러섰다.
트롤 무리를 피해 산을 내려가는 길은 의외로 여러 개가 있었다. 길목마다 몇 마리의 트롤이 경계를 서고 있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달이 뜨면 4분대가 발견한 길로 신속히 이동해 산을 벗어난다. 모두들 든든히 먹고 초저녁에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두라고 전하시게.”
“예.”
“예.”
제니스가 분대장들을 소집해 하산 작전 명령을 내렸다.
* * *
“드디어 해가 뜨는군.”
“눈부셔.”
“아. 드디어 벗어났구나. 저놈에 킬리만 산.”
니켈 상단과 카스티유 용병단이 한목소리를 내며 안도했다. 일행은 이미 큰 길로 이동을 시작했고 별 탈이 없다면 내일 낮에는 일정이 완료될 것이었다.
사실 관도에는 경계병들의 초소가 있어 경계를 서고 있기 때문에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나타났다.
“모두들 밤새 이동해서 몸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마을에서 잠시 머무르다 출발하심이 어떠신지요?”
니켈 상단의 부단장이자 이번 임무의 책임을 맡고 있는 로스가 카스티유 용병단으로 사람을 보내 쉬어갈 것을 요청했다.
“말씀대로 하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제니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령에게 말했다. 사실 관도라는 게 야간이 오히려 더 안전할 수도 있었다. 주간에는 비어 있는 초소가 대부분이었지만 야간이 되면 정규군이 초소를 지키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때문이었다.
3백여 명의 대규모 인원이 묵을 숙소를 찾으려 해도 워낙 조그만 마을이라 손님을 받을 여관이 하나뿐이었다.
하긴, 전체 인구가 5백여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소규모 마을에 3백여 명의 방문객이 들이닥쳤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역시 니켈 상단이었다. 로스를 보좌하던 찰리라는 사람이 촌장을 찾아 몇 마디 나누고 온 직후 어느새 촌장 주도하에 마을 한 귀퉁이의 집들을 통째 비워 주고 그걸로도 모자라 점심을 대접한다며 숫제 마을 잔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세상, 어느 시대나 통한다는 자본의 힘인 듯했다. 어차피 기한은 4일이나 남았고 한나절이면 일정이 끝날 거리니 일행들은 하루를 푹 머무르며 체력을 회복하고 다음 날 출발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