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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18화)
Chapter 9 트롤 따위!(3)


그날 밤, 이제 안심하고 긴장을 풀어 버린 니켈 상단은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이 취해 버렸다. 반면, 카스티유 용병단에겐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는 임무를 맡은 그들이기에 일정이 끝나기 전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본부에서 대기 중일 때에는 기강이란 게 존재하는 것인지조차 의문스러운 용병단이었지만 일단, 임무에 들어가면 그들은 목숨 걸고 명령에 복종했다.
바로 그 부분이 대부분의 다른 용병단과 구별되는 카스티유 용병단만이 가진 철저한 프로정신이었다.
얼큰하게 취한 촌장이 제니스와 로스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나으리들 덕분에 마을이 오랜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로스가 별 거 아니라는 듯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대답한다.
“저희야말로, 묵어갈 수 있는 곳을 제공해 주시고 또 이리 배불리 먹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약소한 사례였으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약소하다니요. 정말 큰 은혜를 입었으니 돌아가실 때도 들러 주셔서 다시 대접할 수 있게 되길 마을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상단에 일러 다음 번에도 이 근처로 일정이 생기면 반드시 이 마을에 머물라 전하겠습니다.”
“아이고, 정말 그리해 주신다면 저희에게 그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두 노인네의 겸양이 지속되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제니스가 문득 끼어들었다.
“그런데, 촌장 어른.”
“아이고, 나으리. 말씀 낮추십시오. 저는 그저 시골 한구석에서 농사나 짓고 사는 노인네일 뿐입니다.”
“아닙니다. 연로하신 분께 그럴 수야 없지요. 다만,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려 했을 뿐입니다.”
“편하게 물어보십시오.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보아하니, 대부분이 농민이고 마을 근처에서 넓은 논밭을 본 거 같은데 어찌 오래 굶주렸다고 하시는지……. 저는 이해가 되질 않아서요.”
제니스의 물음에 잠시 당황하던 촌장은 이내 저 인심 좋은 이방인들에게 사정을 털어놓기로 결심한 듯 말했다.
“에휴∼. 이게 다 몬스터들 때문입죠. 말씀하신대로, 저희 마을은 땅이 기름져 굶주림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근처의 마을들이 힘들 때 아끼지 않고 식량을 베풀곤 했었죠.”
술에 취한 탓인지 그동안 쌓인 게 많은 탓인지 촌장은 지금 마을의 현실을 기탄없이 토해냈다. 촌장의 이야기는 꽤 장시간 이어졌지만,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몇 해 전 겨울, 트롤 부족이 쳐들어와 창고를 약탈해 갔다. 저항하던 주민은 물론이고 눈에 띈 마을 장정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겨우 도망친 마을 사람들 중 일부가 영주에게 사실을 고하고 도와줄 것을 요청했으나 다른 일로 너무 바쁜 영주는 모른 척했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겨우 마을을 수습하고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또 트롤 무리들이 쳐들어와 식량을 모두 가져가고 집집들을 일일이 털어 돈 될 만한 것은 모두 뺏어 갔다.
그때 이후로 몇 년째 농사만 지으면 트롤 무리들이 쳐들어와 약탈해 가고 남자들을 죽였다.
지금은, 노인들과 여자, 아이들만 남아 버려 다른 데로 이주할 엄두도 못 내고 그냥저냥 버티고만 있다는 내용이었다.
가만히, 촌장의 말을 듣던 제니스의 오른쪽 눈썹이 몇 번이나 씰룩거리며 올라가더니 촌장의 말이 끝나자 조용한 목소리로 이상한 점을 물어 왔다.
“트롤들이 돈이 될 만한 물건은 모두 약탈해 갔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놈들이 금과 은 같은 보석이 박힌 장신구는 물론이고 사냥용으로 마련해 둔 검과 석궁 같은 무기까지 남김없이 다 가져가 버렸습니다.”
트롤이 장신구를 가져가? 이건 또 무슨 트롤 귀걸이 차고 다니는 소린가!
물론, 영장류인 인간, 엘프, 드워프는 작고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영장류를 제외하고 보석을 좋아하는 종족은 드래곤뿐이었다. 그렇다고, 폴리모프(마법으로 육체의 형태를 다른 생명체로 바꾸는 것)한 드래곤이 침략한 트롤 집단에 있을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뻔했다. 트롤들의 배후에 인간이 있든지, 트롤이 인간과 거래를 하고 있든지.
“그럴 때마다 분명히 영주님께 고하셨다고 하셨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영주님께 저희의 고단함을 알리고 사태를 해결해 달라 청했읍죠. 하지만, 워낙 넓은 영지이고 다른 일로 너무 바쁘시다 보니 아직 저희 마을까지는 신경 써 주지 못하고 계신 듯합니다.”
“대체 영지민이 죽고 영지가 몬스터에게 약탈당하는 것보다 큰일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제니스가 마음을 숨기지 않고 비아냥거리자 술에 취한 듯 비틀거렸던 촌장이 어느새 전혀 술 마시지 않은 사람처럼 정색하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나으리! 저희 마을을 위해 많은 재물을 주신 것은 백 번 감사하오나 저희 영주님을 비난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지금은 비록 다른 일이 너무 바쁘셔서 저희를 구해 주지 못하고 계시나 그 분은 분명 저희를 누구보다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가요?”
“물론입죠. 지금 영주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님이시던 크로아 백작님을 따라 전 영지를 자주 시찰하시며 영지민의 삶을 구석구석 살펴주시던 분이시니까요. 다만, 지금은 다른 급한 업무로 저희를 도와주지 못하실 뿐입니다. 그러니, 저희 영주님을 나쁘게 말씀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 정도로 단호한 어조는 분명 영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제니스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그들이 받은 은혜는 전대 영주였던 크로아 백작에게서였고 지금 영주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억지로 영지 시찰을 다니던 철부지가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 듯했다.
함께 다녔던 아버지와 아들이기에 영지민들의 사랑이 자연스레 아들에게로 옮겨간 것일 뿐. 무지한 영지민들의 믿음을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촌장을 향해 화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잘못하고 있는 것은 영주이지 촌장이 아니니까.
봉건제도의 맹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주군을 도와 평생토록 큰 공을 세운 신하는 영지를 하사받는다. 처음 영지를 하사받은 영주는 주군에 대한 충성과 영지민들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극진한 정성으로 영지를 다스린다. 그런데, 그게 자식, 손자로 이어지면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날 때부터 영주의 자식이었고 풍족하기만 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영지와 영지민을 소중하게 여기기보다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삼아 버리는 것이다. 그만큼 가진 사람이 뭘 더 가지고 싶어 그러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인간의 욕심은 대개 끝이 없는 것이기에. 아마 크로아 백작가도 그럴 것이다.
선대 영주까지는 초대 몬테규 대공에게 하사받은 영지를 제 살처럼 아껴왔으나 현재의 크로아 백작의 마음은 변해 버린 것이다.
사실 여부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제니스가 억지로 목소리를 한층 누그러트려 촌장에게 물었다.
“영주님이 계신 곳은 이곳에서 얼마나 걸립니까?”
“도시인 닉스 시까지만 가시면 마법진을 통해 금방 영주님이 계신 버나드 시까지 가실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닉스 시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말을 이용하신다면 반나절이 채 안 걸립죠. 그런데, 나으리께선 혹시 저희 영주님과도 잘 아시는 사이십니까?”
자신들에게 많은 돈을 주긴 했지만, 어쨌든 상단 무리 주제에 파운드 제국의 백작가에게 항의를 하러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백작가의 위치를 묻는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이일 가능성이 컸고 백작과의 친분이 있을 정도라면 상대도 고위 귀족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고 보니 제니스는 상단과 연관도 없는 것 같고 용병단과도 크게 상관있는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혹시나 싶어 촌장은 제니스에게 자기네 영주와 친분이 있냐고 물어본 것이었다.
“네, 조금.”
물론 친분 따위가 있을 리 없었지만 일단, 촌장을 안심시키기 위해 제니스가 얼버무렸다.
그 날 밤이 지나고 체력을 회복한 일행은 서둘러 목적지로 향했다.
근처 몇몇 마을을 들러 지친 말과 노새를 팔고 모조리 새로운 말을 구입해 관도로 이동하자 반나절이 채 안 걸려 목적지인 나헬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한 내에 도착했군요.”
로스가 그간 수고 많았다는 뜻을 에둘러 담아 제니스에게 말했다.
“다행입니다. 조금 전에 애덤한테 들으니 니켈 상단과의 거래는 이미 마무리됐다고 하더군요.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제니스가 고객의 대표인 로스에게 인사를 하며 돌아서자 다급해진 로스가 말을 이었다.
“제니스님, 잠깐만!”
“예? 말씀하십시오.”
“시간이 없어 보이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니켈 상단 호위대의 대장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네?”
예기치 못한 제안에 잠시 당황한 제니스는 이내 단호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만 저는 카스티유 용병단에 묶여 있는 몸이라.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얼마입니까?”
“네?”
“용병단에 묶여 있으시다는 말씀은 용병단에 빚이 있다는 뜻이 아니십니까? 저희가 대신 갚아 드리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노련한 장사꾼답게 로스는 이미 셈을 마치고 있었다. 저 정도의 실력자를 데려오는 데 드는 비용은 아까울 게 없었다.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거래라도 용병단을 고용하지 않고 자체 병력으로 거래를 끝낼 수 있게 될 테니 용병단 고용에 드는 비용을 생각한다면 시간이 문제일 뿐 본전을 찾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스는 제니스의 다음 말에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돈을 빚진 게 아니라 마음을 빚진 것이라……. 죄송합니다.”
“아… 그러시다면 할 수 없군요. 혹시 수도를 방문하실 때면 잊지 마시고 저희 상단을 한번 찾아주십시오.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물론이죠. 그리하겠습니다.”
노련한 장사꾼답게 불발된 거래도 훈훈한 마무리로 다시 볼 때 낯을 붉히지 않게 만드는 로스였다.



Chapter 10 백작가의 무도회(1)


닉스 시로 이동한 뒤 마법진을 통해 영주에게 가려던 제니스는 생각을 바꿨다. 나헬 항구에도 마법진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파운드 제국의 최대 맹점이 빈약한 마법 인프라였다. 마법이란 게 다수의 힘을 모아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단 한 명의 천재가 모든 것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제국 내에 차고 넘치도록 엘프가 있지만 그들이 가진 마법 수준은 3써클 정도였기에 일반 백성들이 사용할 영구 마법진이란 인프라를 구축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위대한 엘프인 보나페트 같은 마법사에게 마법진 구축을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은거중이기도 했지만 엘프 역사상 전무후무한 8써클의 대마법사에게 영구 이동 마법진을 구축해 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마법진을 통해 이동할 때엔 마법 주문을 시동시킬 마나가 반드시 필요한데, 이때 소모되는 마나는 이동 거리, 이동하는 물체의 크기와 수 등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대부분의 경우엔 주문을 외치는 마법사가 주문에 필요한 마나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마법사가 없다면 아무리 마법진이 있더라도 무용지물이란 뜻이다. 하지만, 그 귀한 마법사를 항시 대기시킬 수는 없는 법이었고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마법사들의 정서에도 그건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영구 마법진이었다. 마법사가 마법진을 만들고 그 마법진의 시전에 소모될 마나를 다른 방식으로 공급시켜 마법사가 없더라도 주문만 외면 마법진이 구동되게 만든 말하자면 마법계의 아방가르드(?)였다.
니켈 상단과 헤어진 얼마 뒤 카스티유 용병단과도 작별한 제니스는 마법진을 통해 곧장 버나드 시(市)로 향하고 있었다.
그 도시를 알기 위해서는 시장과 하수도를 가 보라고 했던가? 영주가 사는 큰 도시답게 버나드 시는 활기차고 생기 넘치는 곳이라는 게 로브를 덮어쓴 제니스가 시장을 둘러보고 느낀 감상이었다.
그런데, 하수도에서 느낀 감상은 조금 달랐다. 위생 관리가 엉망이었던 것이다. 쥐들이 사방에 터를 잡아 수를 헤아리기 힘들었고 오염의 정도도 극심했다. 관리에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수도가 더러운 게 무슨 대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수도는 결코 하찮게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수도의 위생 관리가 되지 않을 때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버려 엄청난 수의 희생자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힘쓰면 저절로 발전하는 시장과 달리 하수도는 철저히 중앙에서 관리해 줘야만 하는데 이곳 영주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제 영주의 정치 철학에 애민(愛民)이 없다는 확신을 가진 제니스는 마지막으로 영주의 평판을 점검해 보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