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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19화)
Chapter 10 백작가의 무도회(2)
제니스는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시에서 가장 번성한 곳으로 가 숙소를 정했다.
‘달의 요정’이란 여관이었다. 1, 2층은 식당이고 3, 4, 5층은 숙소로 구성된 나름대로 운치 있는 5층짜리 목조 건물이었다.
가벼운 샤워로 묵은 때를 씻어내고 새 로브를 눌러쓴 제니스가 저녁을 먹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갔다. 숙소로 올라갈 때 보니 1층에는 25개의 테이블이 있고 2층에는 채 10개가 되지 않던 걸로 미뤄 짐작건대 일반 시민들은 아무래도 1층을 이용할 공산이 컸다. 테이블 수가 적다는 건 이곳에서 파는 음식 값이 그만큼 비싸단 뜻일 테니까.
계단을 내려오는 제니스를 보고 웨이터가 가까이 와 말했다.
“손님, 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네. 공기도 쾌적하고 전망도 마음에 드는군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점잖은 미소로 응대하는 웨이터는 40대 초반쯤으로 보였고 소매 끝에 있는 흰색 단추까지 깨끗한 걸로 미뤄볼 때 강한 직업의식의 소유자로 보였다. 제니스는 그런 프로정신을 좋아했다. 직업이나 신분보다 중요한 것은 ‘삶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영위하고 있느냐.’는 것이니까.
숙소를 잘 정했다는 생각이 든 제니스는 한결 누그러진 기분으로 창가 쪽에 있는 테이블로 가 앉았다. 그런 그를 조용히 따라온 웨이터가 물었다.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네, 출출하군요.”
제니스의 대답이 떨어짐과 거의 동시에 웨이터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메뉴판을 펼쳐 제니스 앞에 펼쳐 놓았다.
“저희 달의 요정에서는 숙박하시는 모든 손님들께 조식과 석식을 무료로 한 번씩 제공하니 메뉴 옆에 적힌 가격은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들은 말 중 가장 반가운 소리군요.”
가벼운 미소로 호의에 응답하며 메뉴를 살펴보던 제니스는 30여 종에 이르는 요리 수에 놀라 대체 뭘 먹을까 하는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노련한 웨이터가 거들기 시작했다.
“저희 달의 요정은 최고급 식재료만을 사용해 해당 요리 전문가가 빠른 시간에 준비하기 때문에 어떤 메뉴를 고르셔도 손님의 저녁을 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호, 그래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들어온 랍스터가 최근 1년 내에 들어 온 바다가재 중 가장 신선한 건 사실입니다.”
“하하하. 좋습니다. 전 그럼 랍스터 정식으로 하겠습니다.”
능숙한 웨이터의 추천 메뉴를 기꺼이 선택한 제니스는 이 시(市)가 그리 심하게 망가진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아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느긋하게 식사를 마친 후 제니스는 홍차를 마시며 창밖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구경했다. 웨이터는 그런 그에게 다시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차는 입맛에 맞으십니까?”
“네, 좋군요.”
“창밖의 풍경은 마음에 드십니까?”
“글쎄요. 다만 꽤나 번잡한 곳이라는 느낌이군요. 버나드 시라는 곳.”
“평소에는 이렇게까지 붐비지 않습니다만 내일이 바로 무도회 날이라 그렇습니다.”
“무도회요?”
“모르셨습니까? 저는 손님께서도 무도회에 참석차 이곳을 방문하신 줄 알았습니다.”
“하하, 전혀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볼 일이 좀 있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무도회는 어디서 열리는지 혹시 아시는지?”
“그럼요. 저희 영주이신 크로아 백작가에서 매년 주최하는 정기 무도회입니다.”
“오호, 매년 이맘때쯤 무도회를 여는군요.”
“요즘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비정기 무도회가 거의 매달 있거든요.”
“거의 매달요?”
“네. 영주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이 즐겁게 모이는 것을 참 좋아하시거든요.”
제니스는 기쁜 듯 웃으며 대답하는 웨이터를 뒤로하고 숙소로 올라갔다.
일반적으로 무도회라 함은 3일에 걸쳐 진행된다. 그 기간 동안 참가자들에게 식사와 술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악사들을 고용하는 비용 등의 경비 일체를 주최자가 모두 부담한다.
참가자들은 그저 즐기기만 할 뿐이다. 당연히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기념할 일이 있을 때에만 열리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런데, 거의 매달 무도회를 주최한다고 하니 제니스는 그만 맥이 빠져 버렸다. 얼마나 많은 비용이 필요할지 안 봐도 뻔했다. 그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는 것이리라.
어쨌든 제니스는 영주를 찾아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만일 그럴듯한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면!
다음 날, 제니스는 새벽부터 1층에 내려와 몇 시간째 차를 즐기고 있었다. 웨이터가 보기에 지겨울 정도로 창밖을 바라보며 벌써 몇 잔째인지 모를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달라진 거라고는 처음 홍차를 주문할 땐 드미타스 컵(일반적인 커피 컵의 절반 크기인 컵) 한 잔의 우유를 넣었지만 지금은 우유가 홍차보다 많다는 것뿐이었다. 차라리 우유랑 토스트를 먹던가! 조식이 무료로 제공되는 달의 요정은 당연히 식사 전의 홍차도 무료였던 것이다.
“엄마, 나도 갈래. 나도 가고 싶다구∼”
“케이트, 아가야. 엄마가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거긴, 높으신 분들만 갈 수 있는 곳이란다. 우린, 평민이라서 무도회 같은데 참석할 수가 없단다.”
“싫어, 나도 갈래. 갈래. 그냥 갈래∼”
12살쯤 됐으려나? 창밖에서는 꼬마 숙녀와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의 실랑이가 한창이었다. 뺨 가득 주근깨가 보이는 꼬마 숙녀는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무도회의 환상에 빠져 버린 듯했다. 처음엔 호기심에 그 광경을 스쳐보던 제니스는 어느새 한참을 유심히 바라보며 어떤 결론이 날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혹시 가더라도 어차피 넌 아는 사람이 없어서 심심하기만 할 거야. 그리고 니 신분을 알고 나면 남자들은 아무도 너랑 춤춰 주지 않을 거고. 그러니, 케이트 고집 그만 부리고 어서 니 생일에 입을 옷이나 사러 가자꾸나. 내일 니 생일파티는 무도회만큼 근사할 거야.”
“싫어. 싫어. 엄마, 난 무도회가 가고 싶은 거라구!”
한참을 동네가 떠나갈 듯 시끄럽게 하던 꼬마 숙녀가 엄마한테 손을 잡혀 어디론가 질질 끌려가는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구경꾼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신분… 그게 대체 뭐라고.
무도회란 사교계의 한 부분이었다. 사교계란, 귀족들이 그들만의 친목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장한 인적 네트워크로 귀족 여성은 16세 생일부터, 귀족 남성은 18세 생일부터 공식적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웃긴 건, 그 안에서의 평판에 따라 남자들은 중앙 정부 내에서의 직급이 결정되었고 여자들은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사교계를 바라보는 평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지만 평민들 중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친분 있는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그 속에 한 번이라도 참석해 보고 싶은 욕망으로 번뇌하고 있었다.
“엄마, 나 이게 이뻐! 이걸로 할래!”
어느새 어린이 옷 가게에서 생글거리고 있는 아까 그 꼬마 숙녀였다.
“아, 케이트야. 그건 드레스잖니. 학교 다닐 때 입을 수 있는 옷으로 고르렴.”
차분하게 타이르는 엄마와 아까부터 드레스만 고르는 딸이었다. 아직은 애써 친절한 웃음을 보이고 있는 가게 주인도 그녀들의 실랑이에 슬슬 짜증이 나려던 찰나, 언제 왔는지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마음에 드는군. 이걸로 포장해 주시게.”
언제 왔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와 가게에서 가장 비싼 드레스를 골라주는 인심 좋은 손님이었다.
“네, 손님.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따님이 핑크색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딸은 아니지만 핑크색을 좋아해 보여서.”
“아. 그러시군요. 선물을 하실 거면 선물 포장을 해드릴까요?”
“그러는 게 좋겠군.”
솜씨 좋은 주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부리나케 핑크색 드레스를 커다란 상자에 담고 색색의 비닐로 감싸더니 리본으로 마무리했다.
“70실버입니다. 손님.”
“여기.”
35실버짜리 옷이었지만 고급스런 로브를 둘러싼 사람이라 70실버를 불러봤는데 두말없이 1골드를 쥐어주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주인은 행여나 비싸단 소리라도 들을까 얼른 거스름돈을 챙겨 호구(?)에게 건넸다.
“거스름돈 먼저 받으십시오, 손님. 30실버입니다.”
“비싼 만큼 질이 좋았으면 하네.”
“물론입죠. 저희 가게에서는 고급 원단만 사용하여 30년 경력의 드레스 장인이 직접 제작하고 있으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오호. 그렇다면 결코 비싼 게 아니군.”
‘그럴 리 없지 않냐. 호구야.’라는 말을 간신히 삼키며 포장한 드레스를 건네는 주인이었다.
“아, 그건 이 숙녀분께 드리게.”
“네?”
“네?”
주인과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아이 엄마가 동시에 놀라 되물었다.
한 박자 뒤에 눈을 동그랗게 뜬 꼬마 숙녀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와∼∼, 아저씨.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물론이지. 꼬마 아가씨.”
놀라며 좋아하는 딸을 보며 퍼뜩 정신이 든 아이 엄마가 급히 껴들었다.
“친절은 감사합니다만 오늘 처음 뵌 분의 호의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비싼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케이트, 어서 신사분께 돌려드려.”
“싫어. 싫어. 나 입을래. 입고 싶어.”
“엄마가 다른 걸로 사줄 테니까. 일단, 그건 신사분께 돌려드려.”
시종일관 온화하게 딸을 달래던 엄마가 전에 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아이를 다그쳤다.
케이트의 얼굴은 울상으로 변해 버렸지만 그에 아랑곳없이 제니스가 케이트에게 다가갔다.
“무도회에 가려면 드레스가 있어야지. 있다가 아저씨랑 같이 가 보자꾸나.”
순간 당황하는 두 어른과 달리 케이트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무도회에 데려가 주겠다는 것은 귀족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백작가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초청받지 않은 평민을 데려가겠다는 것은 주최한 백작보다 높은 작위이거나 최소한 동급의 작위에 있는 고위 귀족이란 소리였다. 바가지를 씌운 주인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평민에게 가장 무서운 게 귀족 눈 밖에 나서 받는 괘씸죄인데 감히 귀족한테 사기를 쳤으니.
“달의 요정이란 곳에 묵고 있는데 6시쯤 아이를 데리고 오도록 하세요. 불안하면 남편과 같이 와도 좋습니다.”
“하지만, 나으리. 분에 넘치는 친절이라 저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상대가 고위 귀족이란 생각이 들자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아이 엄마가 말했다.
“사실, 아까 여관 앞에서 저 꼬마 숙녀가 하는 말을 들어 버렸다오. 부담 갖지 말고 오지랖 넓은 사람의 호의쯤으로 여겨주시면 좋겠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나으리.”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Yes란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