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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20화)
Chapter 10 백작가의 무도회(3)
해가 뉘엿뉘엿 사라져 가며 노을을 보일 때 달의 요정으로 향하는 마차소리가 들렸고 마차소리보다 더 크게 아이의 노래 소리가 따라 들렸다. 마차 안의 풍경은 단순했다. 아주 신나서 들떠 있는 아이와 자제시키는 부모.
“케이트. 엄마가 뭐라고 했지?”
“알아. 벌써 다 외웠다구!”
“그럼 말해 보렴.”
“주의 사항! 성질 급한 귀족도 많으니 무조건 말조심해라. 그리고 누가 춤추자고 하면 평민이라고 꼭 말해라. 맞지?”
“옳지. 꼭 명심해야 한다.”
“알았어. 근데 엄마.”
“응?”
“그래도 나랑 같이 춤추고 싶다 그러면 어떡해?”
“그럴 리 없어.”
“그래도 혹시나! 나한테 반했을 수도 있잖아!”
“뭐? 호호호.”
두 여자의 대화를 무거운 표정으로 듣고 있던 아이 아빠로 보이는 남자의 입에서도 어느새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그럼, 그럴 수 있지! 우리 딸이 얼마나 예쁜데.”
“그치, 아빠?”
“그럼∼”
“그러니까! 그럼 어떡해? 그냥 같이 춤춰 줄까?”
한껏 들떠 아양을 부리며 아빠에게 묻고 있는 케이트에게 얼음장 같은 엄마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도 안 돼.”
“자꾸 거절하면 실례잖아. 성질 급한 귀족도 많다면서!”
“그, 그러면 너를 데리고 가 주시는 그분께 말씀드려.”
“뭐라고 말해?”
“곤란한 상황에 처했으니 도와달라고 해야지.”
“쳇.”
잘생긴 귀족과의 로맨스를 기대하던 케이트에게는 한없이 맥 빠지는 소리였다. 거기에 쐐기를 박는 아빠의 말이 이어졌다.
“케이트, 아빠 생각에도 그러는 게 좋겠구나.”
끝이 뻔한 로맨스라면 사양하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었다. 자신들이 살아온 시간 동안 보고 들은 결론은 ‘평민 여성은 귀족 남성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평민 여성은 결코 귀족 남성과 결혼할 수 없다.’였다. 딸이 그토록 원하던 무도회에 가게 된 것은 좋았지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의 가슴에 상처가 생기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달의 요정으로 들어가자 낮에 보았던 친절한 귀족이 구석진 창가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었다.
지금부터 정확한 사람 판단이 요구되는 상황이라 아이의 아빠는 침을 꼴깍 삼키며 아이와 아내가 가리키는 사람을 향해 앞장서 걸어갔다. 상대가 아무리 고위 귀족이고 친절한 사람이라지만 생판 남을 믿고 잠시나마 딸을 맡겨야 한다는 건 여간 불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당신 누구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불안하셨나 보군요.”
한눈에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는 미지의 귀족과 머쓱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의 중년. 잠깐 동안의 침묵을 먼저 깬 건 미지의 귀족이었다.
“늦지 않게 다시 데려다 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딸아이가 오늘 처음 본 분께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거 같아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별 말씀을. 그리고 아마 처음 본 사람이 아닐 겁니다.”
그럴 것이다. 제니스 아니 차니 드 몬테규가 마침내 태어났을 때 몬테규 공국 내의 어느 누가 그를 축복하지 않았겠는가! 그 후에도 수십 번 몬테규 대공의 영지 순례에 동행했으니 못 봤다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다만, 얼마큼 가까이서 봤느냐가 문제일 뿐.
무슨 뜻인지 몰라 기억의 저편을 마구 헤집고 있는 중년을 뒤로한 채 어느새 일어선 제니스가 케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케이트, 준비됐니?”
“그럼요. 아저씨!”
“좋아. 그럼 가 보자.”
여관 앞에는 어느 새 준비해 둔 마차가 케이트네 마차 앞에 서 있었다. 마차 문을 열어 케이트를 먼저 태우고 제니스가 막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여전히 불안한 맘을 감추지 못하던 중년인이 그럴듯한 핑계를 생각해냈다.
“다시 데려다 주시는 건 너무 큰 실례인 것 같습니다. 저희가 시간 맞춰 크로아 백작님 댁으로 가 있겠습니다.”
“그리하셔도 좋구요.”
제니스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윽고 케이트가 탄 마차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영특한 딸의 질문이 들려왔다.
“아저씨∼ 근데 누가 물으면 아저씨를 누구라고 소개해요?”
“삼촌이라고 하면 되지.”
“그냥 삼촌요? 이름도 없이?”
“아. 차니 삼촌.”
어느새 마차 문이 닫히고 케이트를 태운 마차는 경쾌하게 출발하고 부부는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여보, 당신은 사업을 하시니 저보다 훨씬 많은 귀족을 아시지 않겠어요?”
“그, 그렇지. 그런데 갑자기 왜?”
“귀족 중에 차니라는 이름을 쓰는 분이 또 계신가요?”
“아니, 없어. 어떤 미친놈이 대공전하의 유일한 아드님 이름을 따라 쓰겠어.”
“그럼 저분, 설마…….”
“설마……. 우리가 잘못 들었을 거야.”
* * *
마법의 힘으로 형형색색 멋을 낸 조명이 백작가의 성을 대낮처럼 환히 밝히고 있다. 성의 입구에서부터 철저한 통제가 이뤄질 거란 예상과 달리 차니와 케이트가 탄 마차는 한번 멈추는 일 없이 무도회가 열리는 별관 입구까지 들어왔다. 아마도 무도회가 매달 열리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했기에 자연스레 경계가 느슨해진 듯했다. 오랜 시간 지방의 영주로 자리 잡은 크로아 백작가의 행사답게 무도회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몬테규 공국 서쪽 지역의 사교계는 분명 이곳이 중심인 듯했다.
“우와. 삼촌, 저기 호수 좀 봐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처음 보는 마법 조명에 눈이 휘둥그레진 케이트가 즐거워하고 있었다.
크로아 백작가는 정성스레 가꾼 넓은 정원이 유명했지만 야밤에 정원 자랑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갖가지 색의 마법 조명으로 그 정원을 비추는 것이었는데 정원 가운데 파놓은 조그만 호수가 그 빛을 은은하게 반사하며 더욱 낭만 있는 분위기를 연출해 주고 있었다. 여전히 로브를 뒤집어쓴 제니스가 잔잔히 웃으며 들뜬 케이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마 안으로 들어가면 더 멋질 거 같은데?”
“그래요? 그럼 우리 어서 들어가요.”
어느새 케이트는 제니스의 팔을 끌며 앞장섰고, 제니스는 그런 그녀가 귀여운 듯 즐겁게 웃으며 끌려갔다. 하지만, 몇 발 못 가 둘은 입구에서 제지당했다. 방문객의 편의상 고급 마차는 사전 검사 없이 성의 정문을 통과시켰지만 무도회장 입구에서까지 신분 확인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 초대장을 보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집사치고는 젊고 일반 시종이라 보기엔 너무 여유 가득한 30대 후반의 남자가 형식적인 미소를 보이며 새로운 방문객을 맞았다. 초대장 따위가 있을 리 없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한 걸음 나아가며 제니스가 말했다.
“급하게 오느라 미처 초대장을 챙기지 못했군요.”
“죄송합니다만 손님, 이번 연회는 초대장이 있으신 분만 참석이 가능합니다.”
딱딱한 거절의 말이지만 하도 공손한 목소리로 말하니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기는커녕 되레 자신의 칠칠맞음을 탓하게 되는 말투였다. 젊은 사람치고는 대단한 수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별 문제 없다는 듯 제니스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이분께서는 몬테규 공작님의 질녀(여자 조카)이십니다.”
듣자마자 남자는 흠칫 놀라며 최대한 공손히 케이트에게 절했다. 사실, 그는 처음 보는 마차가 무도회가 열리는 건물로 들어올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열리는 무도회이니만큼 단골손님보다 새로운 손님이 누구냐가 더 중요한 것이었으니. 그런데, 마차에서 내리는 잘 차려입은 꼬마 숙녀와 마법사처럼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의 조합이 그로서는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공국의 주인이 되실 몬테규 공작의 조카니만큼 마법사를 개인 경호원으로 부려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동안 무도회를 방문한 사람들 중에서도 손으로 꼽을 만큼 지체 높은 귀족이니까.
“실례 많았습니다, 레이디.”
정말 죄송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케이트에게 말을 건네는 문지기 대장과 그런 그를 보며 생긋 웃어 주는 케이트였다.
“어서 문을 열어 드리게.”
문지기 대장이 출입구를 맡고 있는 시종을 재촉하자 제니스가 급히 말을 이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네?”
문지기 대장이 손을 들어 문이 열리는 것을 제지하자 제니스가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비공식 일정입니다. 신분을 밝히지 말아 주십시오.”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문지기 대장이었다.
무도회를 출입하는 룰은 이랬다. 방문자가 처음 무도회장으로 입장할 때 출입문을 담당하는 자는 지금 들어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미리 큰 소리로 외친 다음 출입문을 열었다.
이때, 입장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데 무도회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보다 높은 신분을 가진 자가 입장할 경우에는 악사들이 연주를 잠시 멈추고 대신 짧은 팡파르를 울려 지체 높은 분이 왔음을 알린다.
예를 들어,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 중 최고의 신분이 백작인데 후작이 방문했다면 놀던 사람들은 잠시 연회를 멈추고 새로운 방문객을 맞이하는 것이다. 노는 데 정신 팔려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의 귀족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으려는 그들 나름대로의 룰이었다.
남자들은 직접 작위를 받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의 작위가 기준이지만 작위를 받지 못하는 여자들은 어느 댁 자제인지 혹은 누구의 아내인지가 신분의 기준이었다.
몬테규 공작의 여자 조카라면 당연히 몬테규 공작이 신분의 기준이 될 터였고 자연스레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바로 그 룰을 잠시 적용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다시 연회장에 들어가는 사람처럼 말없이 조용히 문만 열어달라는.
노련한 자답게 말귀를 잘 알아먹은 문지기 대장이 눈짓으로 지시하자 출입문을 잡고 대기 중이던 시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문을 열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