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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21화)
Chapter 10 백작가의 무도회(4)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기저기를 분주히 고개를 돌리며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모습을 신이나 구경하던 케이트가 까치발을 들어 제니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삼촌, 나 발 아파요.”
제니스는 잔잔한 미소를 보이며 케이트를 데리고 연회장 한편에 마련된 테이블로 갔다.
그곳에선 삼삼오오 모여 앉은 참석자들이 누가 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자기들만의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제니스는 적당히 사람들이 많아 자신들에게 굳이 말을 걸지 않을 것 같은 테이블로 가 케이트를 앉혔다.
“그래서 내가 시간이 없어 도저히 참석할 수 없다 그랬는데도 꼭 좀 와달라며 다시 사람을 보내 이 귀걸이를 주시더라니까.”
“어머, 그럼 그 루비 귀걸이가 크로아 백작님한테 선물 받은 거였구나. 어쩐지 기품 있게 보이더라.”
“뭐 굳이 큰 의미를 담아 보내진 않으셨을 테지만, 뭐 그래도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시는데 내 일정만 고집할 수는 없는 거잖니? 호호호.”
제니스와 케이트가 자리 잡은 테이블에선 백작에게 받은 루비 귀걸이를 지인들 틈에서 마구 자랑하고 있는 금발의 여성과 그녀를 부러운 듯 바라보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 푼수들의 모임이 한창이었다. 입조심 따윈 하지 않고 이 얘기 저 얘기를 다 할 것 같은. 정확히 제니스가 원하는 모임이었다.
당장 찾아가 크로아 백작을 심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굳이 그걸 참고 무도회 참석이란 우회적인 방문을 택한 것은 공국의 오랜 충신인 크로아 백작 가문을 존중하는 의미도 있었고, 속단을 자제하고 찬찬히 내막을 알아보려는 의중이 더 컸다.
사실 바로 이런 점이 봉건제도의 폐단이기도 했다. 지역의 관리를 직접 파견하는 중앙관리제도와 달리 봉건제는 믿을 만한 부하에게 작위를 하사하고 그 지역의 총괄책임을 일임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광범위한 재량권을 같이 주는 것이었다.
다만 영지를 하사받은 부하는 주군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만 충성을 다해 보좌하는 것으로 충분했고 그 외의 순간에는 자신의 영지에서 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런 지방 영주를 사건 하나하나마다 간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번처럼 총체적인 관리 능력이 의심되는 사건이라면 다른 얘기지만.
“얘, 엘린. 너도 너희 오빠 얘기 좀 해봐. 루이 남작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셔?”
“그래, 맞어.”
“엘린, 니 얘기도 좀 들려줘 봐.”
“응? 오빠?”
금발 가발을 뒤집어 쓴 푼수 무리들이 새로운 화제에 다시 왁자지껄해지기 시작했다.
“오빤 맨날 똑같지 뭐.”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말을 아끼는 엘린이 못마땅했지만 궁금증을 풀고 싶은 여성들은 엘린의 옆에 붙어 앉아 이야기를 졸랐다.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해줘. 나의 잘∼생긴 루이님의 일상에 관해 말야.”
“어머, 웃겨.”
“내 말이! 엇다대고 자기 루이님이래.”
귀걸이 선물을 자랑하던 여성의 자신감 넘친 표현에 격렬히 저항하는 여성들의 대화가 소란스레 이어졌다.
“알았어. 알았다구.”
극성 팬 길드 조합원처럼 날뛰는 그녀들의 공세에 체념한 듯 엘린이 말을 꺼냈다.
“잘나신 너희들의 루이님께서는 킬리만 산에 있는 몬스터를 토벌하러 가셨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요양 중이셔.”
“꺅∼”
“안 돼∼”
“왜 몬스터 따윌 토벌하러 직접 가셨다니! 넌 안 말리고 뭐한 거야!”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격렬한 반응으로 미뤄볼 때 루이란 이름의 사내는 이 지역 사교계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고 있는 듯했다.
“어쩔 수 없었어. 우리 마을의 상인 길드에서 정식으로 요청했었거든. 요즘 킬리만 산에 있는 몬스터들이 산 아래 마을까지 내려와 사람들을 괴롭히곤 하는데 그때 거길 지나가던 우리 마을 상인들도 여러 명 당했나 봐.”
“어머, 흉측해라.”
“그러게. 웬일이니.”
여성들의 대화에 한번 껴들지 않고 시큰둥하게 있던 남자들 몇 명이 드디어 대화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루이님이 킬리만 산까지 가셔서 크게 다치셨다고요?”
“네, 사제님들 말로는 두세 달은 누워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루이님은 그레듀에이트신데…….”
“킬리만 산에 대체 어떤 몬스터가 사는 거야?”
사내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위협할 만한 개체 수를 자랑하는 몬스터는 고블린, 트롤, 오크 세 종족이 전부였는데 그 세 종족 중 소드 그레듀에이트가 치명상을 입을 만큼 위협적인 상대는 없었다. 물론, 상대의 머릿수가 얼만큼이였냐가 변수이긴 했지만.
“킬리만 산이 워낙 험하고 넓으니 니케아가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뭐? 니케아? 설마.”
“소드 그레듀에이트를 위협할 몬스터가 또 있냐?”
“하긴…….”
남자들의 대화에 궁금함을 참지 못한 금발 여성 중 하나가 물었다.
“니케아가 뭐예요?”
“아. 니케아도 몬스터예요.”
“몬스터요?”
“네, 희귀한 몬스터지요. 다른 몬스터들은 수십, 수백이 모여 무리 생활을 하지만 니케아는 오직 자기 가족들끼리만 함께 살죠. 일반적으로 니케아 한 쌍이 자식 두세 마리를 데리고 살아요.”
“그럼 겨우 5마리의 몬스터와 싸우다 루이님이 부상당하신 거란 말씀이세요?”
“아냐. 그럴 리 없어.”
여기저기서 여자들의 실망과 분노에 찬 말들이 터져 나왔다.
그런 여성들의 태도에 남자들은 답답한 듯 급히 말을 이었다.
“레이디들께서 뭔가 오해가 있으시군요. 니케아는 5마리가 아니라 1마리도 그레듀에이트 혼자 상대하기 힘든 몬스터예요.”
“맞습니다. 그 녀석의 덩치는 아무리 작아 봐야 5미터 이상의 크기거든요.”
“그뿐 아니라, 굉장히 두꺼운 피부와 철사 같은 털을 가지고 있어서 어지간한 칼에는 상처도 나지 않아요.”
“니케아 1마리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그레듀에이트 12명의 포위 공격이 필요하죠. 하지만, 2마리 이상이 있을 땐 그레듀에이트가 몇 명이 있더라도 상대가 안 되죠. 도망칠 수밖에 없어요.”
남자들의 설명이 끝나자 여자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그렇게 무서운 몬스터도 있군요.”
“그럼 그렇지. 루이님께서 흔해빠진 몬스터 따위에 당하셨을 리 없었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멋대로 지껄이는 이들 틈에서 누군가 엘린에게 물었다.
“그래서, 루이님의 복수는 어떻게 됐어?”
“그렇잖아도 그래서 오늘 아버지랑 같이 왔어. 아무래도, 킬리만 산의 대부분은 크로아 백작님의 영지니까.”
“어머? 리스본 백작님께서 오셨다구?”
“정규군으로 킬리만 산을 토벌하겠군요.”
“네, 아마도 그럴 것 같아요. 오빠가 회복되면 저희 영지의 군인들을 이끌고 크로아 백작님을 도와 킬리만 산의 몬스터들을 토벌하시려나 봐요.”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킬리만 산의 몬스터들에게서 해방되는군요.”
“아닌 게 아니라, 그놈들 때문에 제국의 모든 백성들이 길을 돌아가는 건 너무 심한 낭비였어.”
정규군이 동원된다는 사실만으로 킬리만 산에 오랫동안 뿌리내려 온 몬스터의 토벌이 아주 쉽게 이루어질 거라 확신하는 안일한 귀족 무리였다.
“아마, 실현되기 어려울 거야. 그 계획.”
한창 화기애애해지려는 분위기에 애써 찬물을 끼얹은 남자에게 모두의 질타 어린 시선이 쏠렸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국 내 모든 사람이 몇 백 년 전부터 적어도 킬리만 산과 노르망디 반도의 몬스터가 얼마나 위협적인지 알고 있어. 그런데도 아직 그대로라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는 거지.”
꽤나 많은 걸 알고 있는 듯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붉은 머리가 못마땅한지 남자들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며 붉은 머리 사내의 말을 잘랐다.
“실례지만 저는 오늘 당신을 처음 보는 것 같군요. 저는 베르만 백작가의 장남인 스테판이라 하는데, 당신은 누구십니까?”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 알 만한 집 자식이니 깜도 안 되는 놈이 분위기 잡치지 말고 어서 꺼지란 소리처럼 들렸다.
붉은 머리의 남성은 피식 웃더니 잘 알아들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그렇지 하는 득의양양한 표정의 무리들이 쫓겨나는 그를 힐끗거렸다.
그는 다른 테이블로 갈까 테라스로 가서 머리를 식힐까 갈등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반대편에서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마법사처럼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자기를 쳐다보며 기분 좋게 생글거리고 있었다.
곧이어 음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누. 추. 한. 곳에서 뵐 줄 몰랐군요.”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먼저 말을 걸어오자. 붉은 머리의 사내도 역시 음흉(?)하게 혹은 기분 좋게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자리를 옮기시죠. 백작님.”
“그러세.”
성큼 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두 사내를 바라보며 뜨악한 표정을 짓는 무리. 그중에서도 가장 밉살맞은 금발 여성이 냉큼 발을 빼는 한마디를 내던졌다.
“스테판님, 너무 무례하셨어요. 아무리 처음 본 사람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듯 대부분의 여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금발 여성을 거들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맞아요. 너무 무례하셨어요.”
상대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나 저 나이에 백작이라면 적어도 후작 가문의 후계자, 자칫하면 공작 가문의 아들을 상대로 행패를 부린 것이리라.
다 같이 짜증내던 분위기였고 다만 자신의 입을 통해 그 짜증이 표출됐을 뿐이었는데 미련 없이 등을 돌려버리는 무리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스테판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이 그런 걸.
지금은 ‘백작’으로 밝혀진 사내가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반가워 서둘러 자리를 떴지만 금방 마음이 변해 무리를 향해 분노를 나타낼 수도 있으니 살아남으려면 그 분노의 대상을 특정인으로 한정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