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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22화)
Chapter 10 백작가의 무도회(5)


“잘 지냈어?”
어제 본 사람처럼 제이가 물어왔다. 차니 또한 헤어진 지 몇 시간 안 되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덕분에. 너는 어땠어?”
얼굴 가득 피어나는 미소를 굳이 감추지 않으며 제이가 말을 이었다.
“잘 지내다 못해 지루할 지경이지. 무료해.”
“귀하디귀한 페르마 후작 가문의 후계자께서 무료하다고 이렇게 멀리까지 놀러 다니실 것 같진 않은데?”
“사돈 남 말하고 있네. 후후.”
“하긴.”
“내년 작위 수여식에서나 볼 줄 알았더니.”
“아. 그냥 수도까지 가는 건 재미없잖아.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도 좀 하고 그러려고.”
“역시, 너도 말 못할 사연이 있다는 거군.”
“흐흐. 구경 다니는 거라고 방금 말했잖아.”
“그래. 그럼 8달 동안 구경 다니는 걸로 정정하지. 후후.”
“하여간, 지 맘대로 생각하는 건 여전하구만. 크크.”
“그게 내 개성이라서. 그건 그렇고 검사 주제에 웬 로브야?”
“잊었어? 난 마법사로도 그리 나쁜 실력이 아니라고.”
“네, 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물론이지.”
“딱 봐도 누구 하나 족치러 오신 복장이구만, 허세는.”
“티 나냐?”
“바보냐?”
“그러는 넌? 너도 딱 보니 누구 하나 잡아갈 모양새로 보이던데?”
“눈치 빠른 놈.”
“니 성질에 아까 그 버릇없는 놈들 곱게 놔준 거 보면 뻔하잖아.”
“하긴. 크크. 그건 그렇고 뭔 놈의 폐관 수련을 그렇게 오래 하냐?”
“연락 여러 번 했단 소리 들었다. 바로 연락 못해서 미안.”
“니가 그렇지 뭘. 인정머리 없는 놈.”
어린 시절 아카데미에서 만난 차니 드 몬테규에게 유일한 친구인 제이였기에 살가운 둘의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이번 생에서의 최대 목표인 벗에 가장 가까운 아니 어쩌면 이미 벗이라 부르기에 무리가 없는 제이였다.
지난 생에서는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우정이란 감정이 어쩔 땐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차니는 그런 감정을 느끼는 지금이 고맙고 좋았다.
원래, 무도회의 테라스는 로맨스가 시작된다는 낭만적인 곳이었지만 무도회보단 다른 데 용건이 있는 남자 둘이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대화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공간이었다.
어느덧 시끄러운 팡파르 소리가 들리고 무도회장 안이 소란스러워지자 차니가 조용히 말했다.
“드디어 집주인이 등장했나 보군.”
“너도 저놈한테 용건 있는 거냐?”
“너도냐? 어쨌든 순서를 지키라고. 참고로, 난 초저녁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뭐, 좋도록 해. 이쪽은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는 상태거든.”
의미심장한 둘의 대화가 오고 갔다. 잠깐의 침묵을 깬 건 제니스로 위장하고 있는 차니였다.
“크로아 백작 말이야. 평판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던데 니 생각은 어때?”
“글쎄.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는 상태라. 흐흐.”
“충분하지 충분해. 파운드 제국 최고의 마법사인 페르마 백작의 심증이면 그걸로 충분하니 아는 게 있으면 어서 말해 봐.”
“뭐… 어쩌면 말 같지도 않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 저 백작 놈. 아마 몬스터들과 거래 따윌 하고 있는 거 같아.”
“거래? 그것도 몬스터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아니면 정황만으로 추측한 건지는 몰라도 역시 무서운 놈이란 생각을 하는 차니였다.
“응. 사실 그것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여기를 들렀는데 말이야. 우리 가문 영지에서 오랫동안 운영되고 있는 상인길드에서 재밌는 소리를 들었거든.”
“그래? 어떤?”
“킬리만 산 근처에 고블린과 트롤들이 지나가는 상단이나 사람들을 많이 공격한다는.”
“5백년 가까이 된 그 사. 실. 을 말하는 거냐?”
“아냐. 분명히 예전과는 달라.”
“오호. 뭔가 알아낸 게 있단 소리군. 근데, 뭐가 다르단 거야?”
“몬스터들이 상단이나 사람을 죽이고 뺏는 물건이 달라.”
제이의 말에 제니스의 눈빛이 달라지며 급히 되물었다.
“무슨 뜻이야?”
“몬스터들이 사람을 공격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고 알고 있어.”
“그렇지. 식량을 뺏거나 사람 그 자체를 식량으로 삼거나.”
“그런데, 이놈들은 돈 되는 걸 뺏어 가.”
“돈 되는 거?”
“응, 돈은 물론이고 장신구와 무기 심지어 갑옷까지.”
“뭐? 갑옷?”
갑옷이란 제이의 말에 제니스가 깜짝 놀랐다. 몬스터가 갑옷도 입나?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다. 갑옷은 고사하고 몬스터들이 사용하는 무기도 단순하기 짝이 없기 때문인데, 일반적으로 고블린이나 그보다 덩치가 큰 트롤, 오크 모두 사용하는 무기는 나무 몽둥이였고 다만 몬스터들의 덩치에 따라 그 나무 몽둥이의 크기가 달라질 뿐이었다.
그런 단순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 갑옷이라니.
그러고 보니 킬리만 산에서 제니스를 공격한 오크들은 분명 창을 들고 있었다. 쇠를 다룰 줄 모르는 오크가 직접 창의 촉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제니스의 얼굴은 점점 차갑게 변해 갔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이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너도 그게 용건인가 보군.”
“여행 경비 마련을 위해 부업을 좀 하려는데 오크들이 방해하더라고.”
“뭐? 부업? 하하하.”
둘의 의미심장하지만 즐거운 듯 이어지는 대화가 끊어진 건 무도회장 안에서 들려오는 앙칼진 소리 때문이었다.
“평민 주제에 여기 앉아 있었다고?”
“죄송합니다, 백작님. 제가 너무 오고 싶어 해서 저희 삼촌께서 저를 데리고 와주셨는데 실례가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부모에게 교육받은 대로 고개를 힘없이 숙이며 대사를 외듯 말하는 케이트였다. 재밌는 일이라도 생긴 듯 그 광경을 구경하던 이들의 표정이 흥미진진해졌다.
매일 거의 비슷한 사람만 참석하던 무도회에 새로운 얼굴의 그것도 어린 여성이 나타나자 백작은 호기심에 다가가 함께 춤춰 줄 것을 부탁했고 곧바로 퇴짜를 맞은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평민이라는 이유를 대며.
“경비병들 뭘 하고 있나? 어서 이 계집을 끌어내 가둬. 감히 내 무도회에 평민을 데리고 온 그 간 큰 삼촌이란 놈도 찾아내!”
“예!”
집주인이 고함치듯 명령했고 집주인의 충실한 개들 몇 마리가 달려 나와 우악스레 소녀의 양팔을 잡아당기며 어디론가 끌고 가려 했다. 곧이어 경비대장이란 자의 외침이 들려왔다.
“저 소녀를 데려온 분께서는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새 악사들이 내는 음악소리는 멈춰 버렸고 무도회장은 뒤숭숭해졌다.
물론, 귀족들의 사교장인 무도회에 평민이 참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참가한 평민을 굳이 무안 주는 경우도 드문 일이었다.
그것은 평민을 데리고 온 귀족에 대한 배려이자 평생 다시없을 기회를 가진 평민 참가자가 좋은 추억을 가지기를 바라는 사회지도층의 선심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한창 잘나가는 대단한(?) 크로아 백작가에는 그런 배려 따윈 없어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는 몇몇 귀족이 있을 뿐 누구 하나 나서서 그 상황을 중재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다시 경비대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저 소녀를 데려오신 분은 어서 나와 저희와 잠시 동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테라스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느긋하게 걸어 나오며 대답했다.
“거 참 소란스럽군.”
자신이 주최한 무도회를 망친 주인공이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백작이 참지 못하고 경비대장을 다그쳤다.
“뭐하고 있는 거냐. 얼른 저놈도 끌어내 같이 가둬라.”
명령을 들은 경비대장이 턱짓으로 부하들에게 지시하자 경비병들이 황급히 로브를 쓴 사내를 향해 뛰어갔다.
“어쩔 거냐?”
그 상황에서도 느긋한 목소리가 테라스 뒤편에서 들려왔고 역시 느긋한 목소리로 로브 쓴 사내가 대답했다.
“끌려가 단 둘이 오붓하게 얘기를 나누는 게 목격자가 없어 좋긴 하겠지만, 어린 소녀를 고생시킬 수는 없으니.”
“하긴. 그럼 저기 니 조카라는 소녀는 내가 데려오지.”
“그래주면 고맙고.”
누군지 모를 하급(?) 귀족의 체면이 구겨질 희귀한 다음 순간을 기대하고 있는 구경꾼들은 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를 불쌍하게 여겼지만 정작 명령을 내린 백작은 왠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저놈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이 상황에서 너무 태연한데?’
어느새 거리를 좁힌 경비병들이 양옆에서 로브 쓴 사내의 팔을 잡으려는 찰나 로브 쓴 사내가
쏜살처럼 앞으로 뛰어갔다. 깜짝 놀란 경비대장이 황급히 크로아 백작의 앞으로 뛰어나가 검을 뽑아들었다.
“멈추시오!”
“자네에겐 볼 일 없으니 비키게.”
차가운 제니스의 말에 순간 경비대장이 움찔했으나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분께서는 크로아 백작님이시오. 섣부른 행동은 후회를 낳을 뿐이니 더 이상 소란 부리지 마시오.”
경비대장의 말에 싱긋 웃음을 보인 제니스가 말해다.
“원망하지 말게. 난 분명 자네에게 기회를 줬었어.”
제니스의 말에 심한 위기감을 느낀 경비대장이 명령했다.
“경비대 전원을 소집하고 남은 인원은 모두 저 로브 쓴 사내를 제압하라.”
“예.”
“예.”
경비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작의 명령이 이어졌다.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백작의 말을 들은 구경꾼들의 표정에 당혹감이 묻어나왔다. 하필 이런 자리에 참석하다니!
원래 귀족의 목숨은 단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황제의 것이었다.
황제가 직접 작위를 수여한 귀족을 다른 사람이 죽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다만, 예외를 인정하는 두 가지의 경우는 귀족 간의 결투와 자기보다 높은 귀족에 대한 하극상뿐이었다.
그런데, 고작 평민을 무도회에 참석시켰다는 이유로 귀족을 죽이는 일은 분명 뒤탈이 걱정되는 것이었고 모르긴 해도 아마 자신들은 황제 직속 감찰단에게 조사를 받게 될 것이었다.
“죽여도 좋다라……. 아주 짜증나게 하는군. 흐흐.”
조용한 제니스의 목소리였지만 얼마나 많은 마나가 실려 있었던지 무도회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니스가 허공을 향해 오른손이 빗자루인 양 쓸어내자 제니스를 향해 달려가던 경비대가 한 방에 반대로 튕겨져 나가는 희귀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쾅!
쾅! 쾅!
순식간에 8명의 경비대가 벽에 처박혀 쓰러져 있었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의 구경꾼들만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다시 옮기는 제니스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