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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1권(23화)
Chapter 10 백작가의 무도회(6)


저벅 저벅.
“경비대장은 뭐하고 있나! 어서 가서 저놈을 막아라!”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백작이 명령했고 경비대장은 좌우에 있던 두 명의 경비대원과 함께 제니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곧이어 당황은커녕 무표정한 제니스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스 애로우.”
제니스가 양손을 정면으로 펼치자 수십 개의 얼음 화살이 쏟아져 나와 경비대장과 경비병 둘을 덮쳐갔다.
콰과과쾅!
어느새 경비대장과 경비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얼음으로 굳어 버렸다.
채 1분도 안 되는 순간에 상황을 정리한 제니스가 심드렁한 말투로 백작에게 말했다.
“자, 대단한 백작 나으리. 이제 우리 대화를 좀 나눠 보자고.”
말을 마친 제니스가 백작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기자 다급한 목소리로 백작이 외쳤다.
“저, 저, 저 조카년을 죽여 버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백작은 문제의 원흉이 된 꼬마를 끌고 가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곳에는 기분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바닥에 기절해 있는 경비병 둘만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백작의 코앞까지 다가온 제니스가 더욱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 사람 목숨은 그리 큰 의미가 없나 보군.”
뒤통수에서부터 찌르르 긴장이 흘렀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백작이 대답했다.
“흥. 천한 것들의 목숨 따위.”
짝!
어느새 제니스의 손바닥이 크로아 백작의 따귀를 후려 갈겼다.
“더 짖어봐.”
“뭐라고 네놈 따위가 감히.”
철썩!
다시 한 번 제니스의 손이 크로아 백작의 뺨을 후렸다.
“내가 누군 줄 알고 니 놈 따위가.”
“피스 반 크로아. 작위는 백작이었던가?”
“그걸 알면서도 감히!”
퍽!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뺨을 후려칠 때와는 전혀 다른 강도의 발길질이 크로아 백작의 복부에 날아갔다.
“시끄럽군. 시끄러워.”
말하는 것도 귀찮다는 듯한 표정의 제니스를 보며 바닥에 쓰러졌던 백작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네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곱게 살아남진 못할 것이다. 니가 지금 행패를 부리는 땅이 어딘지는 알고 있겠지?”
“어딘데?”
“대륙제일검이신 몬테규 대공이 다스리시는 몬테규 공국이다. 이제 정신이 좀 드나? 뜨내기 녀석아!”
퍽!
다시 한 번 제니스의 강도 높은 발길질이 복부에 꽂히자 크로아 백작이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정말 귀찮게 말이 많은 놈이군.”
바닥에 쓰러진 백작을 보며 제니스가 차갑게 말을 뱉는 순간 무도회장의 문이 활짝 열리며 입구에 서 있던 집사와 경비대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제니스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늦었군.”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백작을 본 집사는 뭐가 잘못되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의 주인이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경비병들 뭘 하고 있나! 어서 저 불한당을 끌어내!”
“경고하겠는데 지금부터는 감히 내게 대적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
집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니스가 경비병들을 향해 외쳤다.
그 말을 들은 경비병들이 주저하는 찰나 문제의 원인이 된 소녀의 손을 잡고 테라스에서 한 명이 걸어 나오며 차분한 목소리로 제니스에게 말을 건넸다.
“저들도 영지의 백성입니다. 다만, 주인을 잘못 만나 무례를 범한 것이니 그만 용서해 주시는 게 어떠십니까? 차니 드 몬테규 공작 전하.”
자리에 있던 모두가 뜨악하는 표정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 * *

한가로운 햇살이 촘촘한 나뭇잎을 뚫지 못해 생긴 그늘 아래서 사내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얼핏 보면 연인들을 위한 공간이고 자세히 봐도 연인들을 위한 분위기였지만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윈 전혀 신경 쓰고 살아본 적이 없는 듯한 두 사내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면 단순히 돈에 눈이 멀어 몬스터들과 손잡은 게 아니란 뜻이야?”
“정확하진 않지만 배후가 있는 것 같아. 크로아 백작 저놈은 그저 꼬리이거나 잘해 봤자 다리 중에 하나일 뿐 결코 몸통은 아니야. 물론, 심증만 있을 뿐이지만.”
“파운드 제국 최고의 마법사가 가진 심증이라면 충분한 근거가 되지. 암, 되고 남지.”
“칭찬이냐?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너 임마, 비꼬는 거지?”
“그럴 리가. 하하하.”
“웃지 마. 죽는다. 너!”
공식석상에서는 칼 같이 차니의 신분을 존중해 주는 제이지만 둘이 있는 자리에서는 결코 져 주는 법이 없는 친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 수도의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둘은 라이벌이자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다른 동급생들은 도저히 저 둘을 따라갈 수 없었고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채 1년이 지나기 전에 그 둘은 전 과정을 이미 패스했었다. 그 다음부터는 그들 둘만을 위한 강의가 남은 5년 동안 이어졌고 자연스레 둘은 단짝이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둘이 죽이 잘 맞아 서로에게 엄청난 시너지를 주며 서로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둘 다 하도 괴짜라 마음먹고 함께 사고를 치기 시작하면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악동들이란 게 문제이긴 했지만.
하지만, 그들은 서로가 있기 때문에 매우 운이 좋은 것이었다.
어느 시대에 태어난 천재라도 피해갈 수 없다는 외로움이 다행히 그들을 비켜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법이란 부분에서 유례없는 재능을 가진 제이와 명문 기사 가문의 후계자다운 차니의 시너지는 이미 그것으로 완벽에 가까운 스스로의 재능에 상대의 기술까지 더해주었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마법과 검을 동시에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긴 했으나 분명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마법과 검을 모두 극성으로 연마한 사람은 아마 이 둘이 전부일 것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두 사람 모두 전공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제이는 5써클의 마법사지만 검은 레이더스 급이었고 차니는 소드 마스터이지만 마법은 4써클까지밖에 달성하지 못했다.
티격태격 한창 재밌게 놀고 있는 둘에게 검은 양복을 잘 차려입은 백작가의 집사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대화를 멈춘 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뒤 제이가 뒤를 돌아보며 집사에게 물었다.
“백작은 깨어났나?”
“네. 일어나 두 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사건 당일 몇 시간 기절했다 깨어난 크로아 백작은 다시 악을 쓰며 차니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지만 황급히 백작의 입을 막으며 귓속말로 차니의 신분을 알려준 잘 키운(?) 집사 덕에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자신이 한 짓과 아는 바를 숨김없이 털어놓으며 차니와 제이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차니와 제이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자 방 가운데 차려진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크로아 백작은 다른 시종들과 같이 문가에 서서 차니와 제이를 맞았다.
“산책은 즐거우셨습니까?”
“시끄럽고 저쪽으로 가 서 있어.”
“……네.”
“대답이 늦다? 기분 나쁘냐?”
“아닙니다. 그, 그럴 리가요.”
“그래야지. 어차피 수도로 이송되도 죽을 테지만 당장 죽는 것보단 나을 테니 거슬리게 하지 마.”
“그럼요. 물론입죠.”
웃는 얼굴로 자신들을 맞은 백작을 까칠하게 몰아붙이는 제이였다.
“그러지 말고 일단 식사부터 하자.”
자기는 참 성격이 좋은 편이란 혼잣말을 하며 제이를 말리는 차니와 의외로 순순히 친구 말을 따라주는 제이의 모습은 참 죽이 잘 맞아 보였다.
“하긴. 그러자.”
식사를 시중드는 하인들과 나란히 서서 대기하는 크로아 백작의 추락한 위세가 안쓰러웠다.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래자 차니가 크로아 백작을 불렀다.
“오후쯤에 수도에서 근위 기사 몇 명이 올 거야. 물론, 자네를 수도로 이송하기 위해서지.”
“그렇… 군요.”
“너무 걱정하지는 마. 아마 자네 정도의 죄질이면 고문이나 다른 형벌 없이 바로 사형될 테니 고통의 시간이 길진 않을 거야.”
“네…….”
“뭐, 이제와서 달라질 건 없지만 몬스터와 거래하게 된 건 저번에 말한 그 이유가 다였나?”
“네.”
“영지민을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영주 하나가 재물에 눈이 먼 나머지 몬스터와 손을 잡고 영지민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챘다는 뻔한 스토리 그대로란 거지?”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에 사는 누가 들어도 생전 처음 들어볼 듯한 황당한 내용이었지만 그것을 뻔한 스토리라 말하며 그 외의 것들을 물어보는 차니와 차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는 제이였다.

식사를 마친 차니와 제이가 주인 없는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창밖을 보며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차니의 표정이 점점 험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며 제이가 물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차니가 슬쩍 고개를 돌려 제이를 보며 말했다.
“급한 순서대로 하나씩 처리해야겠지.”
“그럼, 트롤 마을부터?”
“어. 킬리만 산 전체는 무리겠지만 마을 인근에 있는 놈들은 씨를 말려 버려야겠지.”
“도와줘?”
“괜찮아.”
“내 일정을 걱정해 주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내년 작위 수여식까진 여행기간이거든.”
제이의 말에 차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곧이어 차니가 말을 꺼냈다.
“페르마 가문의 후계자가 그렇게 긴 휴가를 즐겨도 돼? 그 가문도 참, 널널하구만.”
“사돈 남 말 하긴. 우리 가문의 영지는 몬테규 공국 1/3도 안 되거든?”
“그, 그런가?”
“거기다 넌 외동이고 난 심지어 4남매나 되지!”
“험, 험. 우리 가문이 좀 널널하긴 해.”
“됐고. 계획이나 말해 봐.”
“마음 같아선 제국 중앙군을 동원해 산 전체를 포위한 다음 몬스터 전체를 소탕하면 좋겠지만, 저 백작 놈 배후에 있는 놈의 귀에까지 소문이 들어갈 테니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겠어.”
“그러면 일단 킬리만 산 입구 쪽에 있는 몬스터들만 처리하자는 거지?”
“그럴 리가?”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겠다며?”
“페르마 백작님께서 도와주신다면 킬리만 산 전체라도 조용히 처리 못할 이유가 없지. 후후.”
“미친! 킬리만 산에 봉우리가 몇 개나 되는 줄이나 아냐?”
“알 게 뭐야. 어차피 서로 시간도 널널한데. 흐흐.”
의뭉스러운 웃음을 날리는 차니를 보며 제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게 문제가 아냐. 너도 그 날 밤 무도회장에서 들었잖아.”
“뭘?”
“니케아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그게 뭐? 니케아는 몬스터 아니냐?”
“에휴∼ 무식한 놈.”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제이가 한숨을 쉬자 차니가 못 참고 다그치며 말을 이었다.
“니케아란 놈한테 겁이라도 먹은 거냐?”
“답답하다. 답답해! 너 니케아를 다른 말로 뭐라고 부르는지 아냐?”
“그놈은 몬스터 주제에 별명도 있냐? 뭔데?”
“가디언(guardian).”
“서, 설마?”
“맞아. 드래곤이 자신의 레어를 지키라며 특별히 임명하는 존재. 그게 니케아야.”
“빌어먹을. 그래서 지난 4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킬리만 산을 토벌하지 못한 거였구나.”
“이제 이해가 가냐?”
제이의 분명한 지적에 고개를 끄덕인 차니의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겪어 보지 않은 생명체에 겁부터 먹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니케아가 나타나도 당연히 토벌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드래곤이 있다면 이건 전혀 다른 내용의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