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무신 1권(24화)
Chapter 10 백작가의 무도회(7)


드래곤 슬레이어란 존재도 분명 역사에 기록되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보나마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드래곤일 것이다. 성년이 된 드래곤을 인간이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드래곤의 수명은 보통 7천 년 전후였다.
갓 태어난 드래곤은 500살까지 부모와 함께 살며 드래곤으로서 알아야 할 모든 지식을 습득한다. 이 시기의 드래곤을 해즐링이라 부른다.
500살이 되면 성년식을 한 뒤 부모로부터 독립하는데 미리 살펴둔 곳에 자신만의 터전을 닦아 비로소 제대로 된 인생을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드래곤의 능력은 3천살이 될 때까지(이 시기를 웜급 드래곤이라 부른다) 꾸준히 증가하지만 3천살 이후에 얻는 힘에 비하면 미미하단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3천살에서 5천살까지(이 시기를 에이션트 급 드래곤이라 부른다) 얻는 힘은 가히 신에 필적할 정도였는데 사람들은 그 시기의 드래곤을 두려워하며 신으로 숭배하기도 했다.
5천살이 지난 드래곤(이 시기를 어테인 급이라 부른다)은 더 이상 힘이 강해지지는 않지만 인간처럼 노화가 시작되는 것도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어테인 급 드래곤은 그들의 생을 마감하고 마나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젊은 시절 자신이 이룩해 놓은 힘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갔다.
킬리만 산에 만약 드래곤이 있다면 차니의 몬스터 토벌 계획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인근 마을 주민을 위해 산 전체를 헤집고 다니다 드래곤이 짜증이라도 낸다면 제국 전체가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무리 큰 도시라도 에이션트 급 드래곤의 브레스 한 방이면 잿더미가 되기 충분했다. 그런 드래곤을 상대로 무모한 도박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차니와 제이가 머리를 맞대고 한참을 고민했지만 해결책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차니가 결론짓듯 말했다.
“에잇. 일단 가서 결정하자고!”
머리 복잡하다는 듯 툴툴거리는 차니를 보며 제이가 대답했다.
“하긴, 언제 계획대로 살았다고. 가서 보자는 데 한 표 더!”
혼자 있을 땐 어른스럽더니 같이 있으니 다시 애가 되어버린 듯 구는 얼마나 나이를 더 먹어야 철이 들는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이었다.



Chapter 11 다시 킬리만 산으로!(1)


카스티유 용병단이 니켈 상단과 함께 방문했던 마을은 낯선 방문자들의 도움으로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었다.
하룻밤 그들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한 것치고는 너무 과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들이 주고 간 돈이 그동안 굶주렸던 마을 사람들에게 충분한 양의 식량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기운이 없어 집에만 있던 아이들이 밖으로 나와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예전처럼 마을 인근의 논밭을 경작하지는 못하지만 집 근처의 텃밭이라도 가꾸려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났다.
마을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이 입구가 겨우 보일 정도의 먼 거리였지만 차니도 변화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많이 활기차졌군.”
“그래? 보통 마을들이 다들 저 정도는 되지 않나?”
차니의 감상이 의아한 듯 되묻는 제이였다. 그런 제이를 힐끗 쳐다보며 차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들렀을 때엔 길거리에서 사람 구경하기조차 힘들었거든.”
“무슨 뜻이야?”
“배고픔이 이어지면 사람은 움츠러들기 마련이잖아. 그런데 그 배고픔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거면 아예 활력 따윈 잃어버리게 되는 거지.”
“그 정도였어?”
차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차니를 보며 제이가 말했다.
“아예 몬스터 놈들 씨를 말려 버리자고. 저 사람들이 열심히 농사지어 마음껏 먹으며 살 수 있도록…….”
“시간 맞춰 작위 수여식에 참석할 수 있을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이까짓 킬리만 산 하나 정리하는 데 며칠이면 충분한 거지. 너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냐?”
“예감이 안 좋아. 예감이…….”
“무슨 예감?”
“오래 걸릴 것 같아. 킬리만 산에서의 여정이…….”
생각에 잠긴 듯한 차니를 말없이 바라보며 제이가 가만히 차니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걱정 마. 니 옆에 있는 동료가 누군지 기억하라고.”
제이의 말에 피식 웃으며 차니가 대답했다.
“누구긴. 대 파운드 제국 최고의 대마법사님이시지. 크크크.”
“옳지. 이제야 지가 얼마나 위대한 분과 동행하고 있는지 알아보는구만! 하하하.”
그렇게 일행은 다시 기분을 추스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에 거의 다다를 무렵 제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차니를 보며 뜬금없이 물었다.
“니켈 상단이 마을에 꽤 많은 돈을 준 것 같다고 했지?”
“정확한 액수는 몰라도 촌장이란 사람이 몇 달치 음식을 살 수 있다고 했으니 적지는 않을 거야.”
“대체 얼마나 줬기에 저 정도 수준의 용병을 데려온 거야?”
“용병?”
“저기 봐. 마을 입구에 경계를 서고 있는 저 세 명 말이야.”
차니가 고개를 돌려 마을 입구를 보니 엉성하게 나무로 급조된 초소에 눈에 익은 세 명이 서 있었다. 그런 차니를 보며 제이가 다시 말했다.
“니가 봐도 저 셋 그레듀에이트지?”
“맞아.”
거리가 가까워지자 경계 중이던 세 명이 제이와 차니를 향해 말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실 예정이십니까?”
“나는 그럴 예정이네만 자네들은 언제까지 여기서 지낼 예정인가?”
차니의 대답에 제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아는 사람들이냐?”
“알지.”
“누군데?”
“카스티유 용병단의 오지랖 넓은 삼인방.”
차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 명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서운하게 왜 그러세요?”
“맞아요. 파티장님이 다시 이쪽으로 오실 거라 믿고 얼마나 기다렸는데!”
“안 계신 동안 이 마을 지키느라 무쟈게 고생하고 있었다구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차니가 말했다.
“인사들이나 나눠. 이쪽은 내 친구 제이야.”
차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삼인방이 제이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미라고 합니다. 편하게 짐이라고 불러주세요.”
“저는 케이지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앤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파티장인 제니스의 능력을 지난 임무에서 똑똑히 지켜봤던 삼인방은 제니스의 친구라는 말에 한껏 자신들을 낮추고 있었다. 저 정도의 강자가 아무나 친구로 지낼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이가 기분 좋게 웃으며 화답했다.
“반갑습니다. 제이입니다.”
통성명이 끝나자 차니가 삼인방을 다그쳐 물었다.
“복귀했던 게 아닌가?”
“아무래도 찜찜해서요. 코앞에 트롤 마을이 있는데 마을에 식량이 쌓이면 그놈들이 알고 내려올 것도 같고 해서…….”
삼인방 중에 두뇌를 맡고 있는 지미가 대표로 대답했다.
“별 일은 없었나?”
“예. 오늘 아침만 빼고는.”
“오늘 아침?”
“트롤 몇 마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을로 뛰어들기에 없애 버렸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다른 트롤들이 다시 오지 않을까 싶어서요.”
지미의 얘기를 들은 차니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별일이라고. 트롤 따위. 크크크.”
사실 많은 수의 트롤이 쏟아져 내려올까 걱정하던 찰나에 든든한 지원군이 등장해 별일 아니라며 웃어 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삼인방이었다.
“그렇죠? 하하하.”
차니가 마을로 들어가자 차니를 알아본 마을 사람들이 몰려나와 환대했다. 차니가 없는 동안 촌장이 차니에 대해 말한 게 있어서였다.
잘은 모르지만 차니는 영주인 크로아 백작과 친분이 있는 관계고 자신들을 위해 영주께 군대를 요청해 주러 갔다는 내용이었는데 마을 사람들로서는 그보다 반가울 게 없는 말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왔으니 얼마 안 있어 영주가 보낸 정규군이 도착할거라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누구보다 먼저 나와 차니 아니 제니스를 맞이해야 할 촌장이 보이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촌장은 선뜻 제니스를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만 마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을 뿐 제니스가 다시 마을을 방문해 난처한 상황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 촌장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니스는 마을의 유일한 숙소인 ‘바람의 꿈’이란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촌장을 찾아댔다.
당연히, 마을 사람 몇몇이 촌장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려 뛰어갔고 촌장은 깜짝 놀라는 척 허둥지둥 마을의 은인에게 달려왔다. 촌장을 보자 자리를 권한 차니가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촌장 어른, 그동안 별일 없으셨습니까?”
황망히 고개를 숙이며 촌장이 대답했다.
“네, 모두 나으리 덕분입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보다 뵙자고 한 건 드릴 말씀이 있어서였습니다.”
느긋한 차니의 말에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왔지만 애써 억누르며 촌장이 대답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마을에 장정이 몇이나 남아 있습니까?”
불안이 현실이 된 것일까? 그나마 몇 명 남아 있지도 않은 마을의 젊은 남자들을 어떤 일에 동원하려고 물어보는 걸까? 하는 불안이 들었지만 지체 높아 보이는 귀족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 겨우 30명쯤 남았습니다.”
“음… 3백 명이 사는 마을에 장정이 고작 30이라…….”
차니와 촌장의 대화를 숨죽이며 듣고 있던 마을 사람들 중 하나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차니에게 물었다.
“나으리, 저희를 군대에 동원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한참을 부드럽게 바라보던 차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지나면 우리는 모두 킬리만 산의 몬스터를 잡으러 떠날 예정입니다. 마을 인근의 몬스터부터 처리할 예정이지만 혹시 몬스터들이 이 마을로 도망쳐 내려올 수도 있는 일입니다.”
차니의 말을 듣고 있던 앤드가 갑자기 튀어나오며 말했다.
“제니스님, 마을은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여긴 저희들이 힘닿는 데까지 지키고 있겠습니다.”
호기롭게 말하는 앤드의 옆구리를 지미가 팔꿈치로 사정없이 쳐대며 능청스레 말했다.
“앤드, 무슨 소리하는 거야. 우리도 내일부터 제니스님을 도와 킬리만 산을 오르기로 했잖아.”
눈치 빠른 케이지가 지미를 거들었다.
“그러게, 이 친구 잠시 착각했나 보네.”
이해는 안 가지만 지마와 케이지의 반응을 보고 앤드가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그렇지 참. 내가 잠시 착각했었네.”
그런 삼인방의 만담(?)을 제이가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