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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10화)
4장 토룡의 왕(1)


“야, 인마, 빨리 묻고 가자!”
“싫습니다.”
“엉? 너 인마, 네 할아버지가 너를 내게 맡긴다고……?”
“그건 할아버지의 생각일 뿐이죠.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면 그만 가시죠. 난 할아버지와 마지막 밤을 함께해야 해요.”
내일은 날이 밝는 대로 주걸의 시신을 묻어야 한다. 할아버지를 넣을 관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당장 어디서 관을 구할 데도 없다.
그러나 이렇게 잠자듯 누운 할아버지를 보는 것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
“쯧! 인석아, 하룻밤 새우는 건 좋은데 할아버지를 그냥 눕혀 두면 어떻게 하냐?”
마초가 설핏 고개를 돌리자, 사진이 밖으로 나가 호두나무 숲 속을 뱅 돌더니 손바닥에 퉤퉤 침을 뱉었다.
그가 선 곳은 수십 년을 묵은 듯한 아름드리 향나무였는데, 나무에서 나는 알싸한 향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물러서라!”
사진이 기형도를 비스듬히 들어 향나무를 가리켰다.
‘저걸 베려고 하나? 에이, 설마.’
마초는 사진의 자세가 빈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뿐이라고 비웃었다.
한 번 겨루어 봤지만, 사진의 도술은 그리 뛰어난 바가 없었다. 마초가 패한 것은 아무래도 내공의 차이일 뿐인데, 조잡스럽게 생긴 뭉툭한 칼로 거대한 향나무를 벨 수 있으랴.
마초의 생각은 그랬지만, 사진은 자세를 취하자마자 몸을 날렸다.
사진의 기형도와 향나무의 밑동이 닿았다 싶은 순간, 싸악! 하고 칼날이 숫돌에 갈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향나무가 넘어지고 있었다.
퍽썩, 쿠웅!
넘어진 향나무가 옆 나무의 자잘한 가지를 짓누르며 땅바닥에 누웠다.
‘저런!’
마초는 예상치 못한 엄청난 광경에 그만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향나무의 밑동뿐 아니라, 위에서 네 자 길이의 부분도 잘라져 두 동강이 난 것이다. 겨우 한 번의 칼질에 위아래가 동시에 베어 나가는 무공은 확실히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타타타탁!
나무가 눕자마자 사진의 기형도가 눈부신 속도로 향나무의 가지를 쳐 내려갔다.
이내 매끈해진 향나무 통나무를 내려다보던 사진이 옆에 우두커니 선 마초를 넘겨다보았다.
“자, 이젠 이걸 판자로 잘라야 하는데 말이다. 어떡하면 좋겠냐?”
“나무를 가로로 자른 것처럼 세로로 자르면 되겠죠.”
마초가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향나무를 칼로 잘랐는데, 이제 와서 톱으로 썬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인석이, 멍청이가 아니잖아?’
일부러 마초의 반응을 시험했던 사진이 고개를 끄덕하더니 말했다.
“그래, 내가 전개한 도법은 바로 비류도(飛流刀)라는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봐라!”
사진의 칼이 하늘로 들리는 순간, 세로로 십여 번의 칼질이 이어졌다.
싸싸싸싹!
소리가 나는 순간 몇 조각으로 잘라진 나무통이 가지런히 누웠다.
통나무가 순식간에 결이 고른 나무판자로 변한 것이다. 실로 깨끗한 솜씨였다.
“와아!”
이번에는 마초의 입이 딱 벌어졌다. 톱으로 베어 그럴듯한 판자로 만들려면 숙련된 목수도 하루 종일 걸릴 일이다. 그런데 몇 번의 칼질로 통나무를 판자로 만들다니.
“들어라.”
사진이 옆구리에 기형도를 끼워 넣고 앞장을 섰다. 판자를 나르든 말든 알아서 하란 기색이다.
그의 뒷모습만 응시하던 마초가 큭 하고 웃음을 흘리며 나무판자를 둘러메었다.
잠시 후, 마초보다 옆서 가던 사진이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어떠냐? 너도 주 영감에게 무공의 기초를 배운 모양인데, 한번 제대로 배워 보지 않겠냐?”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말씨, 사람이 변한 것 같은 그 모습에 마초가 얼떨떨하니 대답했다.
“그, 그래 주시면…….”
“됐다! 남아일언 중천금이야!”
“아, 네네…….”
마초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린 사진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인생에는 하고 싶지도 않아도 해야 할 일이 있단다.”

주걸의 음성이 내내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오두막집의 뒤에, 마초의 어머니가 묻힌 봉분 옆에 무덤을 판 마초가 주걸이 누운 관 뚜껑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이내 흙을 덮어 자그마한 봉분을 만들었다. 그러곤 두 번 절을 마친 마초가 몸을 일으켰다.
휘이이…….
스산한 바람이 봉분 주변을 휘돌아 그 앞에 선 두 사람의 옷깃을 날리고 지나갔다.
“할아버지, 그럼 편히 쉬세요.”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마초의 벌게진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새끼! 참 눈물도 흔하구나! 앞으로 나와 함께 있으면서 다시 눈물을 흘린다면 눈깔을 파 버리겠어.”
끔찍한 소리였다. 그러나 무섭게 번뜩이는 사진의 눈은 그것이 단순히 엄포가 아니라는 것을 일러 주고 있었다.
마초는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주걸이 남긴 보퉁이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주걸이 마가장의 병기고에서 주었다는 보잘것없는 칼 하나와 철부채 하나 그리고 그가 심심풀이로 가지고 놀던 투전목과 골패가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속고 속이고, 죽이고 죽는 게 인생 아냐?’
얼핏 드는 그 생각에 마초의 입술이 절로 비틀렸다.
두 사람이 초지의 소로로 나오자, 거기에는 수풀과 나뭇가지로 교묘하게 위장된 수레가 있었다. 수레 안에 몇 섬의 쌀가마니 등 잡다한 물건이 쌓인 걸 보면 지렁이를 춘양루에 납품하고 돈을 받아 물품을 샀다는 얘기다.
마초가 수레 앞에 서자, 사진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소리를 질렀다.
“끌어라! 네 녀석이 수레를 뒤집어엎은 것을 다 알아. 지렁이 삼십 마리 중에 반은 죽거나 놓쳐 버렸어. 이게 무슨 소린지 알아? 네가 우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얘기다.”
내가 아니라 우리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토룡소에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인가.
“헹. 왜 우리라니까 이상하냐? 나한테 딸자식이 하나 있거든? 아참, 너 몇 살이냐?”
“열다섯이요.”
마초가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사진이 풀썩 웃었다.
“킁! 동갑이구나. 새끼! 괜히 도망치려고 수작 부리면, 그날이 네 제삿날이야. 알겠어?”
그 말을 끝으로 사진이 마초의 등을 냅다 떠밀었다.

“허억, 헉!”
거의 한시도 쉬지 못했다. 앞장서 걷는 사진의 발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마초는 거의 반쯤 달리다시피 무거운 수레를 끌어야 했다.
더욱이 조금씩 경사진 길을 오를 때에는 온몸의 기력을 모두 짜내어야 했다.
‘새끼! 진짜 고집 하나는 황소고집이로군.’
축 처진 어깨에 바들바들 떨리는 소리,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뜨거운 숨결을 토해 내면서도 마초는 쉬어 가자는 한 마디 말도 안 했다.
‘아니, 이건 진짜 독종이야.’
독종!
저 게슴츠레 뜬 눈에 흐리멍덩한 눈빛을 가진 녀석에게 독종이라는 말이 어울리기나 할까. 그러나 사진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무래도 딸아이보다는 저 녀석을 내세워야 할 것 같아.’
오 년 후의 일, 남들에겐 별일이 아닐지 몰라도 사진에겐 그렇지 않다.
사진은 품속에 꼭꼭 싸매어 둔 반쪽의 장보도를 떠올렸다.
‘오 년, 오 년이야. 저놈이라면 희망이 있을지도 몰라.’
사진은 징그러운 미소를 흘리며 마초를 곁눈질하였다.
절대 머리가 뛰어난 놈이 아니다. 그러나 놈이 주걸에게 어떤 수련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체력 하나만큼은 대단하다.
‘크흐. 잘되었어. 딸아이 대신 저놈을 내세우는 거야.’
실은 그가 주걸의 부탁을 마다않고 마초를 데려온 이유였다.
사구를 빙글빙글 도는 구릉 길을 지나, 토룡소에 도착한 것은 오정의 햇살이 내려쬐는 시각이었다. 뜨거운 햇빛만큼이나 한증막 같은 기류가 토룡소를 감싸고 있었다.
‘츳. 무척이나 덥군.’
사막의 지하를 타고 들어온 수십 가닥의 작은 도랑들이 세숫대야처럼 생긴 분지에 모였다가 다시 수십 가닥으로 갈라져 깊은 땅속의 수로로 스며든다. 이 분지를 바로 토룡소라고 하는 것이다.
수레에 싣고 온 잡다한 물품을 바위 굴속에 감춘 사진이 손짓을 했다.
“자, 따라 들어오너라!”
풍덩!
마초가 사진의 뒤를 따라 토룡소로 뛰어들었다.

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깊은 물속이다. 하나 물속의 어둠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마초는 주변이 조금씩 환해지는 것을 알았다. 그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는 괴물 같은 물고기들 덕분이었다.
토룡소는 깊었다. 십여 장 깊이에 수십 개의 검은 동굴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고, 그 수중 동굴로 구르릉 소리를 내며 물이 빨려 들고 있었다.
사진이 택한 수로는 그중 가장 후미진 곳에 있는 동굴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밑으로 빨려들기만 하던 마초의 몸이 갑자기 물기둥처럼 튀어 올랐다.
“끄윽.”
암초에 부딪힌 모양이다. 골을 싸매고 아픔을 달래던 마초가 몸이 물 밖으로 나간 것을 깨닫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침침한 동굴은 삐죽빼죽 거칠게 튀어나온 바위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고, 그사이로 작은 도랑물이 흐르고 있었다.
“새끼! 엄살 피우지 말고 벌떡 일어나란 말이야!”
그 바위 틈 사이로 흉측한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으음. 개새끼.’
마초의 희미한 눈빛이 벼락처럼 강렬하게 이미 등을 돌린 사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금세 눈빛이 흐리멍덩하게 변한 마초가 끄응 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뼈마디가 모두 부서진 것 같은 통증이 일었지만, 몸을 일으키고 보니 다행히 부러진 데는 없는 모양이었다.
일각 가까이 이동하니 암동을 벗어났다. 그러자 하늘이 확 터지면서 양쪽으로 가파른 절벽이 나타났다.
‘으음. 동굴을 벗어나니 하늘이 보이다니, 실로 신비로운 곳이구나.’
마초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마도 대부분의 지하 수로는 물로 가득 차서 들어갈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동굴을 빠져나가 지상에 노출된 절벽이 있다니.
그런 마초의 놀라움과 관계없이 사진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끼와 잡풀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가파른 양쪽 절벽 사이로 맑은 계수가 졸졸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물 위에는 굴참나무 낙엽들이 지천으로 뒤덮여 있어 이따금 세찬 바람이 불 때만 잠시 투명한 물줄기의 언저리가 드러나곤 했다.
절벽 아래의 산짐승이 나다닐 것 같은 가파른 길로 들어가니, 숲은 더욱 깊어지고 물줄기는 한층 가늘어졌다.
절벽 틈새로 삐죽이 돌출된 나뭇가지를 움켜잡고, 한 발, 한 발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발길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은 너무 좁아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정도였으니, 까딱하면 넘어져 개울에 처박힐 위험도 여러 번 겪어야 했다.
게다가 가지를 가리던 풍성한 단풍잎도, 나뭇가지마다 퇴색한 잎사귀 몇 개만 남아 잡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따분한 노릇이었다.
마침내 사진이 걸음을 멈춘 곳은 네 활개를 펴고 누운 것 같은 넓은 바위 근처였다. 그 밑으로는 다시 내리막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자식이 진짜 멍청한 건가? 아니면 애답지 않게 속내를 숨길 만큼 신중한 건가?’
사진은 그게 맘에 안 들었다.
어떤 때 보면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멍청이로 보이다가, 어떤 때는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기꾼 같은 냄새를 풍긴다. 도대체 이놈이 어떤 놈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때, 포로롱 산새가 날갯짓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소녀가 뾰족하게 입술을 열었다.
“흥! 술을 억수로 퍼마시고 하룻밤 곯아떨어졌다 오신 건가요?”
부친을 몰아붙이려고 앙칼지게 소리치던 소녀의 아미가 잔뜩 찡그려진 것은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