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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11화)
4장 토룡의 왕(2)


‘아니, 저 자식은?’
소녀의 눈빛이 앙칼지게 바뀌었다.
“너 이 새끼, 네가 여긴 웬일이야?”
다짜고짜 반말을 하면서 삿대질하는 비슷한 나이의 소녀였다.
마초가 벙 찐 눈으로 소녀를 직시했다.
여자 중에 마초에게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마가장의 피 부인밖에 없다. 그런데 처음 만난 소녀가 자신에게 아는 척하면서 욕설을 하다니.
마초의 눈이 깊어졌다.
윤기 흐르는 머리칼을 목 뒤로 늘어뜨린 소녀. 희고 반듯한 이마에 흑진주 같은 눈망울이 인상적인 미소녀였다.
‘저거 혹시…… 그 도둑놈?’
과일을 훔치고, 자신의 발에 걸려 좌판 밑으로 넘어졌다가 골목길로 사라진 어린아이.
그러고 보니 머리칼 속에 반짝이던 눈매가 익숙하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마초가 어눌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 저기요. 난 낭자를 처음 보는데, 소, 소생한테 무슨 감정이라도…….”
떠듬거리는 음성에 왠지 겁먹은 듯한 표정.
이번에는 소녀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이상한데? 저 새끼는 바로 그때 그놈 같은데, 어째 인상이 다르네?’
도망치기 바쁜 터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던 소년의 눈빛은 그녀의 기억 속에 아로 새겨져 있었던 거다.
“흥! 멍청하게 생긴 애새끼…….”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상한 사미련(史美蓮)이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부친을 보았다.
“아버지, 저 애는 심부름시키려고 데려온 건가요?”
“엉? 아아, 그래. 요즘 우리 련이가 심심한 것 같아서 말동무도 하고…… 허허. 나이도 동갑이니 잘 지내 봐라.”
사진이 슬쩍 말을 돌렸다. 딸자식 대신에 마초를 내세우기로 했다고 말하면, 아마 얼굴에 손톱자국이 고랑을 만들 것은 뻔했다.
‘쯧. 딸자식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자존심이나 강하고, 성질이 앙칼지기나 하니…….’
그게 다 어미 없이 애를 키운 탓이라고 생각하니 사진의 속마음이 씁쓸해졌다.
딸자식에 약한 것이 아비의 마음이라 호통 한 번 안 치고 길러 온 것이 완전 선 머슴아이로 만든 것이다.
“흐흥! 그래요? 응…… 근데 사 오신 건 다 어디 있어요?”
사미련이 두 사람 옆에 아무런 물건도 보이지 않자 찾는 시늉을 하면서 물었다.
“헛허. 소 옆의 바위굴에다 집어넣었다. 쌀도 사고, 고기도 사고, 양념도 거기에 다 집어넣었거든?”
마초를 대할 때와는 달리 사진의 목소리는 온유하고 자애롭다. 전혀 딴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아유! 음식이 다 떨어졌단 말이에요. 조금이라도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야죠.”
“걱정 마라. 저 녀석에게 시키면 되지 그게 무슨 걱정이냐.”
“어머! 그럼 되겠네요.”
“헛헛허. 녀석을 그래서 데려온 것 아니냐.”
그러면서 사진이 마초를 손짓해 불렀다.
“괜히 나갔다가 길을 잃으면 안 되니까…….”
그러면서 사진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가까워 보이지만 사실 토룡소의 입구에서 여기까지는 최소한 오 리가 넘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 몸에 근력이 붙고, 팔다리에 힘이 생기는 거야. 알겠냐?”
“예, 예…….”
마초가 알아듣겠다는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그리고 너 말이다. 절대 토룡을 반쯤 잃어 먹었다고 얘기하면 안 돼. 알겠냐?”
“아, 그야…….”
“됐다. 음, 그리고 가거든 절대 많이 가져오면 안 돼. 이곳은 워낙 습기가 많아서 꼭 한 끼 먹을 만큼 가져와야지, 남기면 썩고 상한단 말이다.”

마초가 계곡에서 다시 동굴을 통해 소로 내려갔다. 사실 길만 알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마초가 속의 물속을 빠져나와 양식과 고기를 집어넣은 동굴로 들어가다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차갑다.
동굴은 냉굴이었다. 동굴 속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바람은 전신을 얼릴 것처럼 극성스러웠다.
“흐웁.”
그러나 마초는 그 차가운 공기가 오히려 청량한 느낌이 들어 마음껏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몇 번을 심호흡하니, 몸속에 진력이 휘돌면서 지쳤던 몸에 활력이 돌아오는 거다.
‘햐아. 이거 정말 좋은걸.’
마초의 얼굴에 오랜만에 스스럼없는 표정이 돌아왔다. 장난기 서린 표정을 지은 마초가 들어가는 곳을 막은 쌀가마를 넘어 밑으로 내려갔다.
그 순간 마초는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한 발짝만 내디디면 사람 몸 너비의 끝이 안 보이는 구멍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무저갱일까, 더욱이 구멍 속에서 솟아나오는 뼈골을 얼릴 것 같은 찬바람은 지극냉기(地極冷氣)일지도 모른다.
땅속으로 일만 리를 들어가면 세상의 모든 음한기의 근원인 지극냉기가 생멸한다고 했던가.
어디선가 들은 옛 얘기를 떠올리던 마초는 피식하고 입가에 웃음을 매달았다.
‘큭. 그럴 리가 없어.’
땅속으로 깊이 뚫린 냉굴을 보니 별 잡다한 상상력이 나래를 펴는 것이다.
마초가 양곡과 양고기를 포대에 집어넣어 묶다가 울퉁불퉁한 윤곽이 밖에서 보이는 포대 자루를 보았다.
‘이건 감자인 모양이군.’
마초가 포대 자루를 열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감자 몇 개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음? 자식이 길은 똑바로 찾네?’
혹시 마초가 도망칠까 봐 뒤를 따라 나온 사진은 그렇기에 더욱 놈을 알 수 없었다. 저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도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물길을 찾아 오르는 것이다.
사실 야광어들이 돌아다닌다고 해도 각종 부유물들이 물을 잔뜩 흐리고 있어 수십 개의 수로들이 다 비슷하게 보인다.
그런데 놈은 눈으로 보는 것인지 아니면 감각으로 느끼는 건지 한 번 온 길을 쉽게 찾는 것이다.

마초가 자루에 넣어 온 쌀과 고기를 내밀자, 사미련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면서 얼른 자리를 떴다. 겉으로는 사진에게 투정을 부리지만, 부친에게 빨리 따뜻한 밥과 반찬을 먹이고 싶은 생각에서이리라.

계곡 사이의 길은 꼬불꼬불 이어져 있었다. 좌우로 번갈아 방향을 바꾸다 끝이 막혔나 싶으면 뒤로 돌아가는 작은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리를 모르면 헤매다 지칠 것 같은 종잡기 어려운 미로였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갑자기 사방이 확 트이면서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촤아아악!
“앗, 차거!”
마초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물보라가 덮치는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조하면서도 따스하던 공기가 갑자기 식으면서 몸이 습하고 차가운 공기에 으슬으슬 떨렸다.
그렇게 다시 한 굽이를 돌아드니, 시야가 탁 트이면서 뱀 꼬리처럼 비비 꼬이며 바닥을 부숴 버릴 듯 떨어지는 폭포수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짙은 녹색의 소에 잠겨 들고 있었다.
콰르르릉!
마치 천룡이 용트림을 하는 것처럼 천지 사방을 호령하는 물소리는 심신을 말아 올려 십 리 밖으로 내팽개칠 듯하였다.
“야아! 멋있다!”
마초가 경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 댔다.
입에서 나온 고함 소리는 폭포수 소리에 잠겨 사라지고, 다시 그들의 귓전을 굉렬하게 두드리는 폭포 소리였다.
“새끼, 시끄러워!”
어떤 때는 의뭉스러워 보이던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환성을 지르자, 사진은 골이 지끈지끈 아팠다.
‘아구. 저걸 순진해야 하는지 아니면 멍청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도무지 아이는 제집에 온 것처럼 걱정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자꾸만 고민에 잠기는 사진 자신이 오히려 이상스러운건 아닌지.
“우와아!”
빠악!
“새끼, 입 다물라고 했다.”
사진의 화가 폭발했다. 그의 주먹이 마초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엉덩이를 냅다 걷어찼다.
“새끼. 들어가!”
반쯤 의식을 잃은 마초의 몸이 폭포수 밑의 소로 빠져 들어갔다.
“새끼! 정신을 잃은 척하지 마. 그 죄로 오늘 밥은 없다. 네가 먹을 것은 물속에서 해결해. 알겠어?”

어떻게 시간이 지난 건지도 모른다. 마초가 용소라고 이름을 붙인 물에서 나온 것은 해가 꼴깍 넘어갈 때였다.
쪼로록…….
마초는 배가 환장할 만큼 고팠다.
용소의 깊은 물속에는 눈에서 광채를 내는 어류가 꽤 나돌아 다니고 있었지만, 마초는 놈들의 몸에 손도 대지 못했다. 기괴하게 생긴데다 처음 보는 놈들이라 무서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배가 워낙 고픈 상황이라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문제는 놈들이 움직이는 속도가 번개처럼 빠르다는 것이었다.
“에이 참, 크기만 해도 팔뚝처럼 큰 놈들이었는데…….”
그러나 이미 날이 어둡다. 마초는 주린 배를 움켜잡고 어기적거리며 발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마초가 용소를 벗어나 산등성이 쪽으로 다가가니 버섯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 밑에 작은 움막이 있었다. 움막 마루에 나와 있던 사진이 꽥 소리를 질렀다.
“너, 커다란 물고기를 잡아먹으니 배가 부르지? 배가 부른데 몸을 쉬면 똥배밖에 나오지 않는 법이야.”
그러면서 사진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바위 옆으로 돌아가니 십여 장 크기의 호로병처럼 생긴 늪이 있었다. 키가 넘어가는 물풀들이 늪을 대부분 가리고 있었고, 거기에서 코를 뭉갤 버릴 듯한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어험. 여기가 바로 우리가 토룡연(土龍淵)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네 할아버지 주걸 덕분에 나는 얼굴도 역용하고 여기서 숨어 살아야 했어. 무슨 소린지 알겠지? 할아버지가 지은 죄를 손자가 대를 이어 갚는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이겠어?”
‘큭. 대를 이어 갚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마초는 참았다.
저렇게 못되게 굴어도 사람을 종으로 부려 먹으려고 데려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목적은 무얼까.
마초는 그가 속마음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들어가서 지렁이를 잡아라. 네가 지렁이를 한 마리라도 잡으면 내일 아침밥을 주겠어.”
선심을 쓰듯 사진의 음성이 은근해졌다. 사실 하루 종일 수레를 끌면서 점심을 건너뛰고, 저녁마저 먹지 못한 채 용소 속에서 물고기를 잡느라고 난리쳤으니, 힘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마초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으으윽. 진짜 온갖 시체가 잡탕으로 썩어 버리는 것 같군.’
마초는 늪에 다가갈수록 너무 냄새가 심해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사진이 여기서 토룡을 잡았으니, 자신이라고 해도 못 잡을 것도 없다.
‘끼끼, 새끼. 거기 들어갔다가는 최소한 나흘은 밥이 안 들어갈걸?’
사진은 속으로 기분 좋게 웃었다.
이 년 전 이곳에 왔을 때 맨몸으로 늪 속에 들어가 토룡을 잡다가 열흘간 생고생한 적이 있었다. 냄새도 냄새지만, 온몸이 푸르뎅뎅하게 변색되는 것이 틀림없이 장독에 중독된 현상이었다.
몸의 독기를 내모느라 거의 사흘은 꼼짝도 못하고 굶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렇기 때문에 토룡을 잡을 때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로 만들어진 어피의(魚皮衣)를 입고 들어가는 것이다.
‘이 냄새는 장독이 틀림없어.’
마초는 그러다가 문득 품속의 감자를 떠올렸다. 원래 지렁이는 과일이나 감자껍질 같은 것을 잘 먹는다지 않는가.
‘에이, 그 새끼. 참으로 꾸물거리는 것이 보기 싫군. 뒤에서 확 밀어 버려?’
사진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쩝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아이가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토룡을 안 잡겠다고 항거하지는 않을 것이다.
‘에이 놔두자. 잔머리를 굴리는 놈이 아니니 알아서 하겠지.’
사진은 밤사이에 아이가 토룡을 잡다가 아침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찾아올 것을 생각하고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크크. 놈의 몸에서 독기를 몰아내 주면 놈이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느냐고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감격하겠지?’
그렇지만 그런다고 해도 금방 독기를 내몰아 줄 생각은 없다. 며칠간 고생 꽤나 하게 한 다음에 손을 쓰는 것이 효과가 만점일 것이다.
“인마! 토룡을 잡으면 늪 속의 흙과 함께 이 통에다 넣는 거야. 알았어?”
사진이 사라지자, 그제야 마초가 행동을 시작했다.
먼저 손으로 여러 개의 감자를 으깨어서 골고루 뿌린 다음 흙으로 살짝 덮었다.
‘이거 하나는 먹어 치우자.’
마초는 흙 묻은 감자의 껍질을 손톱으로 벗겨 낸 다음에 씹어 먹었다. 감자를 굽거나 삶아서는 많이 먹었지만, 생감자를 먹는 건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아린 맛이 씹을수록 달착지근해지면서 먹을 만했다.
어른 주먹 크기의 감자를 모두 먹은 것은 거의 일각이 흐른 뒤였다.
생감자를 모두 먹어 치운 마초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구름에 가려 컴컴하기만 하고, 멀리 어디선가 끼이이히! 하고 새끼 호랑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큭. 이거 웬 물이지?’
마초는 소매를 들어 눈가를 조금씩 번지는 눈물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