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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12화)
4장 토룡의 왕(3)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늪 속에서 수십 마리의 팔뚝 길이의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몰려들고 있었다.
“크큭. 성공이야!”
마초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놈들을 한 마리씩 잡아 통속에 집어넣으면 되는 것이다.
‘히야. 근데 언제 봐도 크네? 대체 몇 년을 묵어야 저리 크냐?’
옛글에는 천 년을 산 토룡이 비룡이 되어 하늘을 승천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마초가 그 생각을 하면서 어깨에 멘 녹슨 칼을 꺼내었다.
손으로 놈들을 잡기보다는 칼로 살살 긁어 담을 생각을 한 것이다.
파박!
마초가 바닥에 칼을 박아 꿈틀거리는 놈들을 통 쪽으로 밀어붙이려고 할 때, 타락! 하는 소리와 함께 진흙더미가 마초의 얼굴로 쏘아 올랐다.
‘쳇! 갑자기 흙더미가 날아들다니.’
마초가 진흙이 튄 얼굴을 소매로 훔치다가 갑자기 돌풍이 불었나 하고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면서 진흙이 날아오른 곳을 보았다.
‘어? 토룡 놈들이 다 어디 갔지?’
마초는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바닥에 꽂은 칼을 이리저리 움직여 봤지만, 칼에 걸리는 것은 흙 알갱이뿐이었다.
‘그렇구나! 이놈들이 내가 놈들을 밀어붙이려고 하니까 진흙을 튕기면서 도망쳐 버린 거야.’
마초는 너무 아쉬웠다. 대체 이해가 안 갈 만큼 영악하고 재빠른 놈들이었다.
‘이놈들이 혹 최소한 백 년 이상씩 묵은 놈들 아냐? 오래 살다 보니 영성(靈性)이 생긴지도 모르고…….’
마초는 쓸데없는 생각이란 걸 알았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가만있어 봐. 혹시 먹다 남은 음식이 없을까?’
어차피 자신이 토룡을 잡지 못하면, 사진이 먹을 것을 줄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떡하든 밤을 새워서라도 토룡 한 마리를 잡아야 했다.
사진의 두 칸 모옥은 마초의 마가장 숲 속의 집을 보는 것처럼 작았다. 그중에서 부엌이 있는 곳을 찾아든 마초는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싹싹 긁어먹었는지 그릇에는 밥 한 톨, 고기 쪼가리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겨우 남은 거라곤 시든 시금치 한 뿌리뿐이었다.
와락…….
시금치를 손에 든 마초가 잎사귀 한쪽을 씹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놈들은 사람이 먹는 음식이라면 대부분 다 먹으니까 이것도 미끼가 될지 몰라.’
마초가 소리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조용히 부엌을 벗어났다.
‘저 녀석이 부엌에는 왜?’
부엌 옆방의 침대에 누워 있던 사진은 마초가 모옥에 들어온 것을 알고 있었다.
한창 격정을 자제하기 힘든 사춘기의 나이. 놈이 혹시 자신의 딸에게 음심을 품었거나, 아니면 쌀쌀맞게 대하는 딸 아이게 해를 끼치려나 했더니 부엌에 들어가 뭔가를 찾는 눈치다.
‘그 새끼,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으러 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진은 침대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음식이 있지도 않으니 놈은 이내 실망을 하고 부엌을 나갈 것은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이내 부엌을 나가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자그맣게 귓전에 와 닿았다.
‘크흐흐. 새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네가 할 짓이라곤 토룡을 잡는 수밖에 없어.’
사진은 그러다 보니 녀석이 어떤 방법으로 토룡을 잡을지 궁금해졌다.
사진이 마초를 따라 나선 것은 금방이었다.
무인이 집 안 침대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는 일이 드문 것처럼, 잠을 잘 때 겉옷을 벗고 속옷차림으로 편안하게 잠들 수 없다.
최소한 사진은 그것이 무림인의 본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엉? 저 자식이 지금 장난치나?’
사진은 마초가 손에 든 시금치 같은 야채를 북북 찢더니 그 위에다 늪의 흙을 살짝 덮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도대체 뭐하는……?’
바락 소리를 내지르려던 사진이 그만 속으로 무릎을 치고 말았다.
‘그, 그래! 토룡 놈들이 과일이나 채소를 워낙 좋아하잖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하, 이것 참…….’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괜히 장독까지 감수하면서 토룡을 잡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사진이 복잡한 마음으로 마초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미끼를 내걸었으면 토룡들이 우르르 몰릴 텐데 단 한 마리! 단 한 마리가 시금치가 있는 곳으로 기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헝? 저거 토룡이 아니란 말인가?’
시금치 위에 똬리를 친 놈은 길이가 한 뼘 정도 되는 놈이었는데, 머리 부분 양쪽에서 시퍼렇게 빛나는 청광을 내쏘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토룡이 서식하는 늪에 두 눈 시퍼렇게 뜬 뱀 같은 놈이 있다니.
‘햐아. 그것참, 다른 놈들은 쥐죽은 듯 고요한 걸 보니, 혹시 저놈이 토룡의 왕이 아닐까?’
마초는 이놈을 덮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몸뚱이를 보니 불그죽죽한 것이 토룡이 틀림없지만, 대가리 양쪽에 녹용처럼 도톰하니 생긴 게 돋아나 있고, 쭉 째진 양 눈에 청광이 번뜩거린다.
눈 밑에 점처럼 찍힌 두 개의 구멍은 콧구멍처럼 보였다.
놈이 위치한 거리라 봤자 겨우 손을 뻗으면 너끈히 닿을 정도.
마초가 주춤거리는 사이에 어느덧 놈이 늪 속으로 스스륵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다음 날 새벽, 토룡연에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운 마초가 모옥으로 터덜터덜 다가왔다.
“아함!”
한 손으로 입술을 토닥이며 하품을 한 사미련이 방문을 열고 나온 것은 그때였다.
“너, 토룡은 잡았어?”
보자마자 그것부터 뾰족한 목소리로 묻다가 바로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럼 그렇지. 네 주제에 토룡을 어떻게 잡아? 밖으로 나가서 쌀하고 고기나 가져와.”
“아, 알겠소.”
마초가 비칠거리면서 계곡으로 내려갔다.

‘미치겠군. 이렇게 밥 냄새가 구수할 줄이야…….’
솥에서 익어 가는 밥 냄새와 고기 굽는 냄새에 마초의 목울대가 꿀꺽꿀꺽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마초는 사미련이 사진의 방에 밥상을 들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따라 들어가지 못했다.
“토룡을 못 잡았으니 약속대로 굶는 거다.”
사진이 이미 쐐기를 박은 것이다.

“꺼억. 아, 잘 먹었다.”
사진이 손가락으로 이빨을 쑤시면서 나오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춘양루에 가서 돈이나 벌어 오너라.”
그 말만 하고는 사진이 휑하니 토룡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먹다 남은 고기 몇 점이 들려 있었다.
‘오늘은 이걸 가지고 그 괴상한 놈을 유인해 보자.’
사진은 밤새도록 놈이 천 년을 묵은 토룡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천년을 묵은 토룡은 비룡이 되어 승천한다.

옛 문헌에 나온 글귀. 만약 그렇다면 놈이 승천하기 직전에 내단을 뽑아 먹는다면 고금제일의 내공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내단을 딸아이에게 먹일 수만 있다면 괜히 마초를 훈련시켜 오 년 후의 결전에 내보낼 것도 없다. 사진은 하늘을 떠다니는 몽상에 기분 좋게 젖어 있었다.


5장 눈만 보면 안다(1)


해가 동녘을 넘어 온전한 대가리를 드러내자, 사막은 찌는 듯한 열기로 무거운 신음을 토했다.
“후아. 정말 덥구나.”
마초는 땀으로 온몸을 목욕을 한 듯 푹 젖은 상태로 신목원으로 들어섰다.
다행히 신목원 주변은 워낙 녹음이 짙어 몸속을 달구던 열기가 빠르게 사그라지면서 젖은 옷이 조금씩 마르고 있었다.

‘어라? 저 자식, 일을 그만둔 줄 알았더니?’
춘양루의 정문에서 할 일 없이 얼쩡거리던 조비는 익숙한 얼굴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춘양루에 놈의 소문이 자자한 것은 당연했다.
힘이 장사다!
서너 사람이 달려들어야 들 수 있는 쌀가마를 번쩍 들어 창고에 착착 쌓으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더라는 소문에 조비는 간담이 서늘했다.
‘무식한 놈이 힘은 세다고, 본래 멍청한 놈이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서였다.
그런데 놈이 어제 안 보이기에 놈도 무거운 쌀가마니를 무식하게 나르다 몸에 이상이 생겼나 보다 했더니, 저렇게 멀쩡하게 돌아온 것이다.
“헤에, 안녕하세요?”
마초가 조비를 보자 넙죽 인사하면서 멍청한 웃음을 흘렸다.
‘아니, 저 새끼, 이제 보니 몸이 축 처져서 힘 하나 없어 보이잖아?’
조비는 그걸 보자 사라졌던 용기가 불쑥 솟구쳐 올랐다.
“이 새끼! 직장이란 게 네 마음대로 쉴 수 있는 곳이야? 새끼! 다리몽둥이를 확 분질러 버릴까 보다!”
조비가 삿대질하면서 소리치자, 춘양루 안에서 얼굴을 빼꼼 내미는 이십 대의 여인이 있었다.
속이 비칠 듯 투명한 살결에 보름달처럼 둥글고 커다란 눈동자, 사슴처럼 긴 목이 수려한 천하의 미녀였다.
“얘, 무슨 일이야?”
“아, 앵앵 누님. 저…… 저 마초란 놈이…….”
“어마! 마초라고……?”
조비가 떠듬거리며 말을 하는 찰나, 하얀 궁장을 걸치고 머리를 구름처럼 틀어 올린 미녀가 사뿐 주렴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늘씬한 체구에 나긋나긋 걷는 걸음에는 청초함과 더불어 왠지 요기가 물씬 풍겨 나오는 듯하다.
‘햐아. 진짜 눈이 부실 것 같은 미녀네? 그런데 이름이 앵앵이라고?’
어디서 들어 본 이름에 마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아! 맞아. 그러고 보니 대공자가 항시 입에 올리던 그 여인이로구나.’
마초가 엉거주춤 서 있기만 하자, 그녀가 방긋 미소를 흘리며 마초를 쳐다보았다.
수백 송이의 백합꽃이 일시에 만발한 듯한 아찔한 느낌. 조비는 어느새 입을 헤벌리고 정신을 놓고 있었다.
“네가 마초라는 아이야?”
그녀가 살짝 혀로 꽃잎 같은 입술을 축이며 입을 열자, 벌꿀 같은 달콤한 체향이 코끝으로 훅 끼친다.
“아? 네, 네…….”
“홋호호. 네가 힘이 천하장사라고 하던데…… 음. 이 마른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놀라운 힘이 날 수 있을까?”
그녀가 마초의 어깨를 살며시 만지다가 어멋!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깨 근육이 돌처럼 딱딱하네?”
천하의 미녀가 몸을 만지면서 달콤한 소리를 하면 백이면 백 다 정신이 나갈 것이다.
그런데 마초는 눈만 멀뚱거리면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귀찮은 표정이었다.
“깔깔깔. 힘이 센 만큼 우직하다더니 정말 그러네?”
앵앵이 호들갑스럽게 웃다가 마초의 단단한 팔을 슬쩍 한 번 더 만지더니 옆으로 물러섰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한테 찾아와. 알겠지? 내 거처는 삼 층에 있어.”
“네? 네네…….”
마초가 떨떠름하게 대답하면서 멍청하게 눈만 끔뻑거렸다.
‘어럽쇼? 저 멍청한 놈이 뭐가 좋다고 꼬리를 치는 거야?’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니, 이건 멍청한 어린놈을 끼고 은밀한 짓거리를 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대놓고 말은 못하겠고, 조비는 질투심으로 눈알이 팽글 도는 것 같았다.
춘양루의 요화(妖花) 앵앵. 어디서 왔는지 몰라도 그녀가 삼 년 전부터 춘양루의 기녀로 일하면서 졸지에 손님이 배는 늘었다.
그녀가 총관 송결의 조카딸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관계는 무덤덤할 뿐이었다.
그러나 얼굴값을 하는 걸까. 모습은 백합처럼 우아하고 얌전하면서도 한 번 밉보이면 춘양루에서 쫓겨날 각오를 해야 했다.
‘새끼! 진짜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서 나돌아 다니지 못하게 하겠어.’
앙심을 품은 조비가 주렴을 걷고 들어가는 마초의 등을 무섭게 째려보았다.
조비가 그러고 있을 때, 그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치는 손이 있었다.
‘어느 자식이?’
성질이 난 김에 거칠게 돌아보던 조비는 아차 했다.
“어쭈, 이 새끼 봐라? 넌 뭐하는 새끼기에 손님이 와도 아는 척도 안 해?”
‘으으. 이 자식은 또 웬일이야?’
마가제일장 대공자 마조린, 그였다. 한동안 돈이 없어 발을 끊더니 오늘은 웬일로 아침부터 춘양루를 찾는다.
“너 당장 앵앵에게 알려라. 서방님이 왔다고 말이야.”
오늘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지 보자마자 앵앵을 찾는다.
‘쳇. 서방님은 무슨?’
속으론 배알이 꼴렸지만, 조비는 싹싹하게 태도를 바꾸었다.
자식이 술에 취하면 점소이에게도 하사금이라는 명목으로 솔솔찮은 돈을 안겨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당장 확인할 것이 있다.
“저어…….”
조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조린이 억세게 조비의 어깨를 두드렸다.
“야, 인마! 여기 있다.”
그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바로 금화 몇 닢.
품속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닐 것이다.
“헤헤. 대공자님. 이리 들어오시죠.”
조비가 마조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부리나케 총관 송결에게 쫓아갔다. 이 일은 송결이 전담해서 처리할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