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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15화)
5장 눈만 보면 안다(4)


“러, 럴럴럴…….”
고대팔은 절로 노랫가락이 나올 만큼 기분이 째졌다.
손에 쥔 은자는 백오십 냥. 요즘 말 장사도 제대로 안 되는 판국에 그 돈이면 혈통 좋은 망아지 몇 마리 들여놓을 만큼 큰돈이었다.
그중 백 냥은 도박을 주선한 송결에게 주고, 오십 냥은 바람잡이 노릇한 벽창호에게 주었다.
그런 돈은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도박계에서 살아남는 비결이라면 비결인 것이다.
고대팔이 신목원의 남쪽 초지로 막 발길을 들이려다가 움찔 걸음을 멈추었다.
거기, 춘양루의 하인 애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초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고대팔을 보고 있었지만, 언뜻 그 눈엔 복잡한 상념이 교차하고 있었다.
마조린을 부를 때에는 대공자님이라고 부르지만, 그는 어찌 되었던 이복형이다.
그가 고대팔에게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가 되어 허탈해하던 비참한 얼굴. 그리고 쓰러질 듯 비척이면서 춘양루를 나가던 쓸쓸한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큭…… 쓸데없는 생각. 나에겐 그런 생각은 사치일 뿐이야.’
마초는 이를 악물었다. 천한 종년의 자식! 하지만…….
‘두고 봐! 언젠가 나는 천하를 질타하는 대영웅이 될 거야!’

“허허. 네가 여긴 웬일이냐? 설마 나를 기다린 건 아닐 테고…….”
“아뇨. 아저씨를 기다렸습니다.”
고대팔은 아이의 똑똑한 음성에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러나 말은 명쾌한데, 눈빛은 여전히 흐릿한 그대로다.
“어뿌? 이 자식이 토룡탕을 먹었나. 그 이유가 뭐야?”
“아저씨가 사기 도박한 거 압니다. 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뭐, 뭐야? 어린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정당한 승부에 사기라니! 난 단지 그 친구보다 재수가 좋았을 뿐이야.”
고대팔은 자신이 왜 변명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주절주절 떠들었다.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저 어린놈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했다. 저 흐리멍덩한 눈으로 말이다!
자신이 술잔을 기울이는 척하면서 몇 겹으로 접힌 턱살 속에서 골패. 그것도 삼 자가 새겨진 골패를 꺼내고, 대신 원래의 골패짝은 술잔을 엎어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새끼야, 증거를 대 봐!”
고대팔이 돼지 코를 푸르르 떨면서 외치는 찰나, 쑤욱…… 마초가 내민 것은 그가 바꿔치기한 십 자(十字) 골패였다.
“끄으응…….”
고대팔은 똥마려운 강아지가 되어 휘휘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이게 만약 소문나면 귀찮아진다. 그동안 이놈, 저놈과 짜고 잃어 주는 척하면서 호구 노릇을 한 것도 들통이 날지 모른다.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얘야, 네가 원하는 게 뭐냐?”
고대팔은 어느새 인자한 중년인이 되어 아이를 어르고 있었다.
그러나 돼지 눈깔처럼 누렇게 빛나는 눈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살기였다.
“간단해요. 아저씨가 사기로 딴 돈 전부!”
“뭐, 뭐야? 이 새끼 봐라?”
고대팔의 비대한 신형이 한순간 번뜩이는 순간, 빠박! 그의 솥뚜껑 같은 거대한 손이 마초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의외로 그는 상당한 무공을 가진 고수였다.
“끄으윽…….”
“너 이 새끼, 오늘 죽어 봐라! 이 멍청이가 제 분수를 모르고!”
파박, 퍽퍽!
고대팔의 팔과 다리가 쓰러진 마초의 몸을 마구 짓밟았다.
“크으으…….”
마초의 몸이 부평초처럼 흔들리면서 고스란히 고대팔의 매질을 견디고 있었다.
“헉헉. 새끼! 너, 너 한 번만 더 아가리 놀리면 그때는 형체도 없이 뭉개 버리겠어.”
고대팔은 퉤하고 침을 뱉으면서 미동도 없는 마초를 노려보았다.
고대팔이 양손을 툭툭 털면서 돌아서려고 할 때, 꿈틀하던 마초가 허우적대면서 상체를 세웠다.
“엉? 이 자식이……?”
“씨이, 내 돈, 내 돈 내놔!”
“뭐, 뭣? 이 자식아! 내가 딴 돈은 마조린, 그놈의 돈이었어. 근데 네가 마조린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줘, 달란 말이야. 그건 내 돈이야.”
퍽!
화가 다시 치민 고대팔의 발길질에 마초의 몸이 서너 장은 날아갔다. 그러나 그렇게 오지게 당했으면서도 마초는 벌레처럼 몸을 기면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 이런 지렁이 같은 새끼! 아, 아니, 지렁이가 아니라 찰거머리 같은 새끼야.”
고대팔은 어이가 없기보다는 놈의 독기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줘, 그 돈은 내 거야…….”
그사이에도 마초의 말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고대팔이 재차 신형을 날려 마초의 몸을 짓밟으려다가 순간 움찔 떨었다.
눈!
놈의 눈이 황야의 야수처럼 시퍼렇게 타오르고 있었다.
“에, 에이. 더러운 새끼! 내 더러워서 돈을 주고 말지.”
이미 기가 질린 고대팔은 더 이상 손을 쓰는 게 두려웠다.
“옛다!”
쩔거렁!
고대팔이 품속에서 던진 것은 동전 한 꾸러미였다.
“됐지? 이것으로 너와 나의 계산은 끝났다.”
고대팔이 말을 하는 즉시 몸을 날렸다. 그의 하마처럼 살찐 몸이 마치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끄으으…….”
마초가 머리맡에 던져진 동전을 집어 들었다.
눈이 흐릿해서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동전 열 냥이었다.
두 그릇의 국수를 사 먹을 수 있는 돈이다.
“크, 크크큭…… 크크크, 아하하하핫!”
마초의 울음 같은 웃음소리가 터진 입술을 뚫고 기어 나왔다.
마초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동전 꾸러미를 적시다가 지면으로 스며들었다.
열 냥.
그것은 마초가 난생처음 자기 손으로 번 돈이었다.


6장 우연과 필연(1)


마초가 일과를 끝내고 돌아가는 시각, 땅거미가 개미 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제기랄!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구나.”
사진은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토룡지왕이라고 이름 붙인 놈뿐 아니라, 그 많던 지렁이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사진이 하루 종일 감자를 으깨어 깔기도 하고, 야채를 북북 찢어서 늪 속에 파묻기도 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던 거다.
“으으으. 그 자식은 감자나 시들은 시금치를 넣어도 잘도 기어 나오더니, 나는 왜?”
사진이 탄식을 발하면서 늪 속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언뜻 든 생각에 무릎을 쳤다.
“그래! 시금치야.”
사진이 서둘러 늪에서 나와 초막으로 돌아올 때, 마침 마초가 터벅터벅 걸어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너 잘 만났다. 너, 내일 춘양루에서 시금치나 가져오너라.”
“네? 시금치요?”
보자마자 하는 소리라니!
마초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사진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 시금치 말이다. 많을수록 좋아. 그러니…….”
중도에 말을 그친 사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 자식이 내가 시금치로 토룡왕을 꼬시려는 걸 눈치챘나?’
사진의 생각은 아랑곳없이 마초가 헤벌쭉 웃더니 한마디 했다.
“헤에. 시금치가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들었어요. 아저씨도 앞으로 고기보다는 야채를 많이 드실 생각이죠?”
“그, 그야…….”
떨떠름하게 대꾸하면서도 사진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워낙 순진하고 단순한 놈이라 오 년 후의 건곤일척의 승부에 내보낼 수 있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일단 토룡왕을 잡기 전까지는 저놈을 키우는 시늉이라도 해 보는 거야.’
사진은 헤헤 웃고 있는 놈의 손목을 잡아챘다.
“너,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무조건 폭포로 가서 심신을 단련한다. 배가 고프면 소에서 물고기를 잡아먹는 거야. 알겠냐?”
“아, 네네.”
“폭포 수련이 끝나면, 토룡연에서 밤을 새워서라도 토룡을 잡아야 한다. 못 잡으면 알지?”
“네.”
마초의 간단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사진이 마초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새끼, 혹 불만이 있어도 참아라. 왜 사람들이 왜 폭포수를 맞으면서 무공을 수련하는지 알아?”
“…….”
“멍청한 새끼. 그건 간단하다. 모든 무공의 기본은 균형 감각이야. 거센 폭포수를 맞으면서 중심을 잡을 수 있다면, 모든 무공의 절반은 이룬 거다. 더욱이 저 폭포가 떨어지는 지점하고, 그 밑의 소하고는 거리가 얼마나 되겠냐?”
“한 칠팔 장 정도……?”
마초가 자신 없는 투로 말하자, 사진이 고개를 크게 끄덕했다.
“바로 그거야. 사람이 가장 공포심을 느끼는 것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다. 그야말로 간담이 떨어지는 듯한 공포를 느끼는 거지. 너도 수련을 하다 보면 알겠지만, 떨어지는 폭포수에 밀려 까마득한 소로 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면 자연스럽게 공포심이 없어지는 거다. 알겠냐?”
“예, 예…….”
“백 마디 말도 한 가지 행동보다 못하다. 직접 해 봐라.”
“헉!”
내팽개치듯 마초를 용소에 떠밀어 넣은 사진이 뒤도 안 돌아보고 그 자리를 떠났다.
물에, 용소에 풍덩 빠진 마초는 넋을 잃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광경을 쳐다보았다.
촤아아아!
비천하는 용을 닮은 차가운 폭포가 연신 거대한 소리를 끊임없이 토하며 떨어져 내렸다.
서너 장 크기의 소를 헤엄쳐 바윗길을 타고 폭포로 들어간 마초는 눈을 질끈 감고 폭포에 몸을 맡겼다.
이십여 장의 높이에서 꼬리를 물고 떨어지는 물살의 압력은 거대하였다.
“으흐, 차가워…….”
마초는 떡메로 내려치는 듯한 차가운 물줄기에 작살을 맞은 고기처럼 밖으로 튕겨 나갔다.
“어헉!”
마초가 비명을 토하면서 용소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순간, 귀신이 목줄을 틀어잡은 것처럼 숨통이 턱 하니 막혔다. 칼날 같은 바람이 회오리를 일으키면서 가슴을 치받고, 정신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이 이대로 끝장이 날 것 같은 위기감이 닥쳤다.
풍덩!
마초의 몸이 크게 물보라를 튀기면서 물속으로 깊이 잠수해 들었다.
‘크윽…… 온몸이 바짝바짝 조이고 있어.’
물속의 압력은 거대한 문어의 흡반처럼 마초의 몸을 휘감고 떨어질 줄 몰랐다.
마초는 그 무서운 압력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헉! 이건 뭐야?’
몸을 조인 것은 단순히 물살의 압력만이 아니었다. 마초의 몸을 칭칭 감고 두 가닥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는 끔찍스러운 뱀이었다.
길이는 알 수 없지만, 머리통만 해도 어른 머리의 두 배는 됨직하다.
어두운 물길 속에서 화등잔처럼 빛나는 두 개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 이마의 한가운데는 핏빛으로 빛나는 눈이 하나 더 있었다.
‘이, 이건 삼목혈사(三目血蛇)?’
어디서 읽어 봤는지는 모른다.
거의 정신을 잃어 가던 마초의 눈이 바락 뜨였다. 흐리멍덩한 눈빛이 어느새 번갯불 같은 안광을 담고 눈앞의 삼목혈사를 쏘아보았다.
막 아가리를 크게 벌려 마초의 머리를 삼키려던 삼목혈사의 눈이 움찔 떨렸다.
그 순간, 마초의 뇌리에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와 주걸의 고통에 잠긴 얼굴이 크게 부각되었다.
‘안 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마초의 눈에 핏빛의 혈안이 보이자마자 그대로 입을 쫙 벌려 물어뜯었다.
끄아악!
삼목혈사의 몸이 크게 요동치면서 더욱 마초의 몸을 짓눌러 왔다.
삼목혈사의 몸뚱이에 감긴 몸이 온통 분쇄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마초는 삼목혈사의 눈을 문 이빨을 더욱 깊숙이 박아 넣었다.
뚝!
삼목혈사의 눈알이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힘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뇌리에 울렸다.
‘됐어!’
놈이 조이는 힘이 갑자기 줄어들면서 마초의 몸이 풀리는 듯했다.
‘으으윽. 도저히 못 견디겠다.’
오랫동안 숨을 막고 있으니, 머릿속 혈관이 터지는 것 같았다.
마초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삼목혈사의 몸뚱이를 밀어붙이면서 물 위로 떠올랐다.
푸우우!
마초가 크게 숨을 토하다가 입 속을 가득 채운 삼목혈사의 눈동자를 의식했다. 그와 함께 텅 빈 뱃속에서 엄청난 허기가 밀려나왔다.
“에잇. 까짓것 나도 모르겠다.”
마초가 삼목혈사의 눈알을 씹어 목구멍으로 넘기자, 뜨거운 열기가 목구멍을 태울 것처럼 밀려들었다.
“끄으윽…….”
마초는 뱃속을 활활 태우는 무서운 열기에 배를 움켜잡고 입술을 악물었다.
입술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마초는 그걸 의식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후우우…… 죽을 뻔했어.”
마초는 긴 한숨을 토해 내었다. 뱃속을 태우던 열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단전의 한 구석에서 청량한 기운이 발출되어 몸의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잠시 후, 어쩐지 몸이 가뿐하다는 느낌을 받은 마초가 용기를 내어 바위를 잡고 폭포수로 올라갔다.
그러나 마초는 금세 어리석은 생각이었다고 후회했다.
물이끼가 잔뜩 끼어 매끈한 바위는 잡았다 하면 미끄러지고, 겨우 상반신을 바위 위로 올렸다 싶으면 거대한 화살을 박아 넣는 듯한 엄청난 물살의 압력으로 도로 용소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마초는 이를 악물고 그에 도전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만둘 수가 없다.
이내 마초의 몸은 성한 구석이 없어졌다. 손바닥의 피부가 벗겨져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손톱마저 떨어져 나가 대침으로 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 연이어 찾아든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바위 위에 오르기를 시도했을까.
어느덧 혈인이 되어 버린 마초가 바위를 타고 넘어 폭포수 아래에 섰다.
“크아하하하! 성공이야!”
마초는 광소를 터뜨렸다.
겨우 한 번 성공한 것이지만, 마초는 하늘을 품에 안은 것처럼 기뻤다.
기둥 같은 물살을 맞아 도로 용소로 떨어지면서도 마초의 광소는 그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