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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16화)
6장 우연과 필연(2)


용소를 헤엄쳐 나온 마초는 자신의 거처로 정해진 헛간에 들러 녹슨 칼을 들고 토룡연으로 향했다.
토룡연에 도착한 마초는 밤바람에 살랑이는 늪 속의 수초를 바라보다 털썩하고 사지를 쭉 뻗고 누웠다.
“휴우. 정말 몸이 말이 아니구나.”
심신이 모두 노곤하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잠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누워 있던 마초가 습관대로 대도무문 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전에서 작은 벌레가 꼬무락거리던 느낌에서 이젠 묵직한 돌덩어리가 응어리진 것 같았다.
‘이게 단전이 형성된 것일까.’
과연 그럴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걸이 이르기를, 단전이 형성된 되었다는 것은 집터를 닦는 단계이고, 거기에 진기를 담게 되면 내공이라는 게 생긴다고 했다. 그 내공을 운용하는 단계에서 소주천과 대주천으로 발전하고, 그렇게 되면 대라만상과 교류하는 단계에 이른다고 하지만, 지금의 마초에게는 꿈같은 경지였다.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마초가 풀썩 웃었다.
사진이 시금치를 달라던 말을 떠올린 것이다.
‘큭. 내가 시금치를 줄 때 나타난 놈을 본 게 틀림없어.’
마초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동자에 천공을 담았다.
온통 감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은 흑천을 뚫고 몇 가닥의 유성이 폭죽처럼 떨어져 내렸다. 황홀한 자연의 향연에 빠진 마초의 눈은 어느새 꿈결 속을 헤매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토룡연에서 아무런 성과도 못 올린 마초가 밖에 나가 식량과 고기를 들고 축 처진 걸음으로 초막으로 갔다.
“흥! 또 한 마리도 못 잡았지?”
사미련의 뾰족한 음성이 귓전을 쑤셨다.
마초가 뒷머리를 긁으면서 예의 바보스런 웃음을 흘렸다.
“그게 잘 안 되네요.”
마초가 내민 꾸러미를 받은 그녀가 쌀쌀맞게 등을 돌리다 무엇을 봤는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어머머! 너 밤중에 뭔 짓을 했기에 옷이 만신창이가 된 거야? 어? 그러고 보니 손이며 다리며 성한 곳이 없네?”
“아, 아저씨가 폭포 수련을 하라고 해서…….”
마초가 어물쩍 변명을 하니, 그녀가 큰소리로 비웃었다.
“흥! 멍청이! 큰 지렁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사미련은 코웃음을 치더니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쌩하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 계집, 성질이 정말 얼음구덩이로군.’
마초는 씁쓸하게 웃으며 초막의 뒤로 돌아갔다. 초막의 뒤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고, 거기에 두레박이 걸려 있었다.
두레박을 내려 물을 뜬 마초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싸늘한 냉기가 담긴 우물물이 뱃속을 시원하게 적셔 들었다.

“야, 지렁이! 너, 시금치 가져오는 거 잊으면 안 돼.”
마초가 꾸벅하고 갔다 오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끄윽 하고 트림을 한 사진이 한 말이었다.
마초는 오늘도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춘양루로 가야 했다.
마초가 춘양루의 정문 앞에 들어섰을 때, 주렴이 촤라락 열리면서 뚝배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야 새끼야, 빨랑빨랑 오지 못해?”
마초가 고개를 퍼뜩 들어 보니 주방장 왕소가 눈을 부라리면서 달려 나오고 있었다.
“……?”
마초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아직 동녘이 밝은 지 얼마 안 되는 이른 아침이다.
“새끼! 따라 들어와!”
왕소는 불문곡직 마초의 손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너 말이다. 점심때 연회가 열린다. 예약된 손님만 이백 명이 넘어. 알겠냐? 너 양곡 창고에서 밀가루 포대를 날라야겠다. 시작해라!”
짤막짤막하게 말을 끊는 습관대로 마초에게 일을 시킨 왕소가 커다란 식칼을 들고 고기를 저장해 놓은 고깃간에 들어갔다.
그 고깃간에는 왕소 외에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은 두 명의 다른 숙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왕소는 싸늘한 냉기가 살을 저미는 넓은 고깃간의 끝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그러고는 몇 개의 시렁 위의 쇠고리에 걸려 있는 사람 크기의 시커먼 고깃덩이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그 새끼들이 특별한 고기 요리를 달라 했지?’
왕소가 식칼을 옷깃에 썩썩 비비더니, 그중 하나의 고깃덩이를 서슴없이 베어 냈다.
‘흐흥! 특별한 고기고말고! 아암.’
왕소가 휘파람이라도 불 듯한 표정으로 저장고를 나와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응? 왜 고깃간에 자물쇠를 채우지?’
고깃간 바로 옆의 곡식 창고에서 커다란 밀가루 포대를 어깨에 메고 나오던 마초가 고개를 갸웃했다.
있을 수 있는 얘기다. 고기를 저장해 놓은 장소는 무엇보다 신선도가 중요하다. 이 사람, 저 사람 맘대로 드나들면 고기가 상할 우려도 있다.
하지만 왠지 비밀스런 왕소의 행동에 의문이 가는 것이다.
‘음? 저 자식이?’
왕소는 서둘러 고깃간을 나오다가 마초의 눈길을 의식하고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멍청한지 순진한지 몰라도 어쨌든 약간 덜떨어진 놈이다. 그러니 괜히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시끌벅적!
오정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떠들썩하니 춘양루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녹색 무복에다 허리나 어깨에 각종 병기를 찬 자들은 바로 비룡장가장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이 차례로 자리에 앉았지만, 넓은 창가에 마련된 상석은 아직도 비어 있었다.

“서둘러 음식을 차려라!”
총관 송결이 진두에 나서 점원들을 지휘했다.
덕분에 조비와 여웅은 물론 골망태마저 양손 소매 자락을 걷어붙이고 음식을 나르느라 난리였다.
타타타탁!
길다란 도마 위에서 왕소의 칼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춤을 추었다.
나르라는 밀가루 포대를 다 나른 마초는 딱히 할 일이 없어 그의 동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빠르다! 그야말로 눈이 부신 속도였다. 서너 자 크기의 고기가 저며지고, 가닥가닥 끊겨 커다란 물 항아리 속으로 들어갔다.
왕소가 다시 식칼을 들고 고기를 저미다 옆에 서 있는 마초를 흘겨보았다.
“새끼, 너도 요리에 관심이 있냐?”
마초가 고개만 끄떡하자, 왕소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너, 내가 하는 일이 간단해 보이지?”
“아뇨.”
“엉? 아니라고?”
“예.”
‘이거 웃기는 자식일세?’
왕소는 녀석에게 신경을 끄려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남들은 으레 그렇거니 하고 넘어가는데, 놈의 반응에 괜히 재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든 것이다.
“자, 봐라. 내가 이렇게 밀가루 반죽을 양손에 들고…….”
왕소가 반죽을 높이 들어 도마 위를 치다가 슬슬 마른 밀가루를 뿌려 주고는 몇 번 후려치니, 벌써 수십 가닥의 국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어 한 손으로 국수 가락을 높이 치켜들더니, 칼을 잡은 손으로 뭉텅뭉텅 잘라 내 끓는 가마솥에 집어넣는다. 그러고는 대뜸 묻는다.
“봤느냐?”
마초가 그의 빠른 동작에서 느낀 것은 바로 중심이었다.
사진이 폭포수 수련을 시키면서 강조하던 중심. 단순하고 명쾌한 동작을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중심이 잡힌 허리였다.
“중심이군요.”
“어헝?”
왕소는 그럴 이유도 없는데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이야 쉽다. 그러나 무공이든 무용이든 서로 추구하는 바는 다르지만, 모든 동작의 기본은 중심을 잡는 것이다.
거기서 엄청난 위력이 나오든, 멋진 춤이 나오든 중심이 죽은 동작은 난잡하다는 한마디 말로 무시를 당하는 거다.
“야, 인마. 네가 한번 해 봐라.”
왕소가 도마 옆에 뭉쳐 놓았던 다른 반죽을 가리키면서 마초를 불렀다.
잘못하면 반죽이 뭉개져서 망칠 우려가 있었으니 말도 안 되는 주문이었다.
“제, 제가요?”
“새끼, 내가 헛소리하는 줄 아냐? 자신 없으면 가서 요리나 날라라.”
“헤. 아저씨가 하라고 하시니…….”
“싱거운 자식, 내 마음에 안 들면 점심은 없다. 알겠냐?”
‘쳇.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먹는 것 가지고 사람을 시험하는군.’
마초는 사진이 하던 말을 왕소에게 들으니, 순간 잡치는 기분이었다.
“아구. 이거 큰일이네?”
내심과 달리 너스레를 떤 마초가 석 자 길이의 반죽 양끝을 잡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 순간 마초의 눈은 사진의 동작을 하나씩 그려 보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하자. 난 이 반죽을 드는 순간 마초가 아냐. 저 주방장이 되는 거야.’
마초의 눈이 밀가루가 얇게 깔린 도마를 응시하다가 반죽을 높이 들어 내리쳤다.
타탁타탁!
촌부가 개울에서 방망이로 빨래를 두드리듯 규칙적이면서도 단조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죽이 도마를 치고 올라가면 그 반동으로 내려오는 반죽을 고무줄처럼 양손으로 늘려 잡고, 다시 도마를 두드린다.
처음에는 조금씩 반죽이 내려치는 지점이 조금씩 엇갈리더니 어느 순간 똑같은 곳을 한 치도 차이 없이 내려치고 있었다.
“허, 허어!”
왕소의 한껏 커진 퉁방울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어, 동공이 떼구르르 구르는 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마초의 동작은 어느새 천지종횡도가 되었다가 마쌍린이 펼친 비호도의 맹호출림이 되어 포효를 하면서 정글을 뛰쳐나오고, 보는 사람의 넋을 환영처럼 앗아 가는 호구난무가 되었으며, 마지막엔 호조단천으로 세상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허어, 허어허…….”
왕소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며 온몸을 엄습하는 무형의 기운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주루 밖에서 큰소리가 들리면서 떠들썩하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이공자님 듭시오!”

‘저 사람이 장가장의 잠룡이라는 장룡?’
초록 무복을 입은 이십 대 초반의 장한은 의외로 호리호리한 느낌을 주는 체구에 키만 멀쑥했다.
소문과는 상반된 인상이었다.
국수 만드는 일을 마친 마초가 주방 안에서 장룡을 지그시 응시하면서 가볍게 몸을 굳혔다. 이어 마초의 눈이 장룡의 몸을 거쳐 얼굴로 향했다.
봉황의 눈처럼 밝은 이지가 담긴 눈동자에 하관이 긴 말쑥한 얼굴이다. 그러나 화가 나면 광룡(狂龍)이 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낸다는 소문대로, 그의 눈동자 한 구석에 자리 잡은 것은 흉포한 기질이었다.
비룡장가장의 이공자 장룡은 앞의 수하가 열어 주는 주렴 속으로 몸을 들이밀면서 한눈에 주루 안의 풍경을 담았다.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선 이백여 명의 장가장 무사들이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씨익.
장룡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길게 늘어졌다.
이제 이들을 데리고 무림에 진출한다. 감가천하장과 공식적인 회담은 없었지만, 그들도 이심전심으로 장가장의 행동을 반기고 있었다.
그것은 이 년 전 중원에 진출한 감가천하장이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과 일맥상통한다.
역사가 증명하듯 새외 세력의 중원 공략은 중원인들의 엄청난 저항을 동반하는 것이다.

장룡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의 양쪽에 선 덩치가 곰 같은 장한들이 사위를 기세등등한 눈으로 휘둘러보았다. 바로 장룡의 수신호위로서 쌍둥이 형제인 원춘하와 원추동이었다.
장가쌍걸(張家雙傑). 그들의 포악한 성정에 치를 떠는 사람들도 많았다. 불곰처럼 무지막지하게 생긴 용모로는 쉽게 구별하기 어렵지만, 복색으로 쉽게 구분이 된다. 쌍둥이 형인 원춘하는 흑의를 입고, 원추동은 백의를 입고 있어 각각 흑걸과 백걸로도 불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총관 송결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오, 송 총관.”
“아, 예. 삼 년 전에 뵙고 처음인가 하오이다.”
“그렇군요.”
말을 길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장룡답게 짧은 응수다.
장룡이 십여 걸음을 걸어 밖이 훤히 보이는 창가에 앉자, 그의 뒤에 장가쌍걸이 시립하고, 건너편에 송결이 섰다.
“총관님, 음식이 준비된 모양이에요.”
그때,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던 골망태가 넌지시 옆에 와서 속삭이자, 송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야, 네가 날라 가라.”
마초가 왕소의 말에 따라 미리 큰 쟁반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았다. 커다란 주발에 담긴 만둣국에서는 향긋한 고기 국물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꿀꺽.
마초의 목울대가 절로 꿈틀거리면서 침이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지난밤부터 지금까지 곡기를 입에도 대지 못했다.
‘식량 창고에서 생감자라도 꺼내 먹어야겠어.’
마초는 애써 만둣국을 먹고 싶은 욕구를 참았다.
꽈릉, 꾸꽈꽝!
금방 허기를 채울 수 없다고 느낀 것일까, 뱃속에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초가 쟁반을 들고 탁자 옆에 서니, 흑걸이 마초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멍청하게 생긴 놈이로군. 얼른 음식을 내려놓고 꺼져라.”
“예, 예.”
마초가 무섭다는 듯 진저리를 치더니 얼른 탁자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