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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17화)
6장 우연과 필연(3)


“모두 술잔을 들라!”
굉렬한 음성이 주루를 무너뜨릴 듯 울려 퍼졌다. 뿔잔을 높이 든 장룡이 사위를 쓸어보고 있었다.
장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잔을 높이 들자 장룡의 사자후가 터졌다.
“삼 일 후, 본 비룡장가장은…….”
장룡이 무사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처럼 중도에 말을 끊었다.
꼴깍.
누군가 긴장으로 팽팽해진 실내의 공기를 이기지 못하고 침 삼키는 소리를 냈다.
“본 장가장은! 중원으로 진출한다!”
“우와아!”
무사들이 잔뜩 흥분에 겨운 엄청난 환호성을 내질렀다.
“모두들 높이 든 술잔에 무림 평정의 염원을 담아라.”
무림 평정! 비룡 천하!
이백여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부르짖는 소리에 춘양루가 통째로 무너질 듯 들썩거렸다. 그들이 술을 쭉 들이켜고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헹, 어림도 없는 소리.”
반쯤 혀가 꼬부라진 음성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한 침묵 속에 잠겼다.
“어느 새끼가!”
흑걸이 손에 든 철퇴를 들고 큰 걸음으로 한 발자국 떼었을 때.
“아서라.”
흑걸을 만류하고 나선 장룡이 무섭게 치켜 뜬 눈으로 춘양루의 입구를 노려보았다.
거기에는 이미 고주망태가 된 마조린이 비틀거리며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다.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코를 찌르는 술 냄새가 주변에 자욱하게 번졌다.
“놈을 들어오게 놔두어라!”
장룡의 이어진 일갈에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무사들이 옆구리의 검병에 손만 올린 채 씨근덕거리기만 했다.
“아아, 좋다. 도산검림이란 이를 말함이더냐. 꼭, 꼭 만승천자가 되어 백만 대군의 열병식을 보는 듯하구나.”
노인네가 노랫가락을 부르듯 축축 처지는 음성은 그가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이윽고 흐느적거리면서 장룡의 옆에 다다른 마조린이 눈이 자꾸 감기는지 눈을 크게 몇 번 깜빡였다.
“이 자식을!”
흑걸이 평소의 급한 성질대로 마조린을 제지하려고 할 때, 그보다 먼저 장룡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푸핫핫! 이거 마 형 아니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오?”
마조린이 스물일곱, 장룡이 스물셋이니, 마 형이라고 부르는 칭호에는 상대를 한참 깔보는 조소가 들어 있었다.
“크흥! 마 형이라고? 옛날에는 형님, 형님하면서 내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더니 이젠 많이 컸다 이거지?”
“마 형, 취했으면 구들장에서 잠이나 자야지 함부로 돌아다니면 다칠 수도 있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장룡의 눈에는 화염 같은 붉은 광채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가 살기를 품었을 때 나오는 안광이었다.
“뭐어, 다쳐? 이 새끼가 이젠 위협까지 하네. 그래, 자식아. 죽여 봐라! 네놈의 천룡뇌검(天龍雷劍)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구경이나 하자고! 아구…… 켁켁켁!”
마조린이 소리를 꽥지르다가 목을 움켜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더니,
웨엑!
마조린의 입에서 토사물이 튀어나와 탁자 위로 쏟아져 내렸다.
“어어? 이, 이게……?”
흡사 기습을 당한 것처럼 화들짝 놀란 장룡이 뒤로 풀쩍 물러났다.
다행히 옷에는 토사물이 튀지는 않았지만, 푸짐하게 차려 놓은 음식은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으음. 똥 밟았군.’
장룡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놈이 폐인이 다 되었다는 소문은 어김없이 들리는 소리였다. 실제로 오늘 만취한 놈을 보니 소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케액…… 아구구…….”
마조린이 자신이 뱉은 음식 찌꺼기로 고랑을 이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이 자식을 어떡하죠?”
백걸이 일그러진 장룡의 얼굴을 살피면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경사로운 날, 적당한 곳에 내다 버려라!”

‘헉!’
마쌍린은 골목길로 나오다가 급히 뒤를 돌아 으슥한 곳에 숨었다.
형이 며칠 전부터 집 안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술을 마시다 간 곳이 춘양루란 말을 듣고 서둘러 달려 나오던 참이었다.
소문에 듣기론 오늘 비룡장가장에서 춘양루를 통째로 전세를 내고, 중원 진출을 기념하는 연회를 열 것이라고 했다.
혹시 거기서 형이 실수할까 봐, 아니 형이 개창피를 떨어 마가장의 체면을 떨어뜨릴까 봐 급히 쫓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양쪽에서 형을 떠메고 나온 것은 바로 악명이 자자한 장가쌍걸이 아니던가.
‘저, 저 사람들이 왜 형을 데리고 나오는 거지?’
마쌍린은 자신이 숨은 골목에서 겨우 삼사 장 앞까지 다가오자, 가슴이 콩알만 해졌다.
‘형이 춘양루에서 뭔가 큰 실수를 한 게 틀림없어.’
마쌍린은 당장 도망을 치고 싶었지만, 놈들에게 혹시 들킬까 봐 꼼짝도 못했다. 형이 당하는 것보다는 자신마저 들키면 놈들은 형제를 싸잡아 죽이려고 들 것이다.
마쌍린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시작하자.”
흑걸이 한마디 하자 백걸이 입가에 으스스한 미소를 흘렸다.
“흐흣. 주공의 심중은 이놈을 본 비룡장의 장도를 축하하는 제물로 삼자는 것이야.”
“물론! 주공의 성격을 몰라서 하는 소리냐?”
두 사람이 의미 있는 미소를 주고받더니, 허리춤에서 두 자 길이의 쇠몽둥이를 빼어 들었다.
“크크큭. 미친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이지!”
빠, 빠악, 빠아악!
몽둥이가 횟수를 거듭할수록 더욱 격렬한 타격음을 내면서 마조린의 튀어 오르는 육신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이미 처음부터 반쯤 정신을 잃고 있던 마조린은 아무런 항거도 못하고 두 사람이 때리는 대로 맞고만 있을 뿐이었다.
‘병신, 만날 술이나 처먹고 다니더니…… 으으. 그렇지만…… 아아, 난 어떡하지?’
마쌍린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막상 앞으로 나설 용기는 없었다. 그가 한 일이라곤 눈을 꾹 감고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는 것뿐이었다.
마조린의 몸은 완전히 혈구가 되어 반쯤 송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이 힐끗 서로의 눈을 보면서 의사를 확인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마조린의 머리통을 두들기면 끝이다.
“네가 해라.”
흑걸의 말에 백걸이 씨익 미소를 흘렸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인생이 오로지 자신의 손에 달려 있을 때에 백걸은 머릿속이 한순간 텅 비는 것 같은 엄청난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내 손에 죽는 걸 감사하게 여겨라. 한 방에 끝내주마.”
백걸의 쇠몽둥이가 이번엔 높이 솟구쳤다.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을 때에 순식간에 해치우면 재미가 없다. 조금이라도 천천히 음미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빨리해. 그 집은 진흙으로 구운 통닭이 일미 아니냐?”
“아아? 통닭!”
백걸이 혀끝을 입술에 적시면서 속도를 내어 몽둥이를 내리치는 순간,
쌩! 하고 돌멩이가 날아오더니 백걸의 몽둥이에 부딪쳤다.


7장 만류귀종(萬流歸宗)(1)


“엇? 누구냐!”
백걸은 뜻하지 않은 방해를 받고 얼굴이 푸르뎅뎅해졌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지만, 그 방해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쌍걸 형제의 예리한 눈이 골목의 입구로 쏘아졌을 때, 거기서 비비적거리면서 나오는 것은 멍청한 표정을 한 소년이었다.
어쩌다 정통으로 돌멩이를 맞추긴 했으니 약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아니, 넌 춘양루의……?”
“네가 돌멩이를 던졌느냐?”
흑걸과 백걸이 연이어 묻자, 마초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예예. 시, 실은 이미 죽은 사람한테 손을 쓰는 것을 보니…….”
“다시 묻겠다. 네가 돌멩이를 던져 내 철장을 맞췄느냐?”
“그, 그게…… 급한 마음에 얼떨결에 던지긴 했는데요. 서, 설마 마, 맞을 줄은 몰랐어요.”
마초가 떠듬떠듬 겁먹은 얼굴로 변명하자, 흑걸이 마초의 손목을 와락 붙잡았다. 맥문을 잡힌 마초의 얼굴이 누렇게 질렸다.
“끄으윽…….”
흑걸에게 잡힌 손목은 쇠고리로 조인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그가 밀어 넣은 내기에 전신 혈맥이 얼어붙는 것 같아 마초는 이를 악물고 신음하고 말았다.
“어때?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어?”
백걸의 물음에 흑걸이 손을 떼면서 고개를 저었다.
“크크. 괜한 의심이야. 그 정도 거리에서 내 철장을 맞히려면 최소한 초일류 고수는 되어야 할걸?”
두 사람이 마초에게는 신경을 끄고 거의 초죽음이 된 마조린을 노려봤다.
“이 새끼나 끝장을 보고…….”
“에이, 아저씨들. 저게 어디 봐서 살아 있는 사람의 몰골입니까? 에라, 모르겠다. 죽은 사람 적선하는 셈치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다 묻어나 줘야지.”
마초가 천연덕스럽게 마조린을 어깨에 들쳐 메다가 눈을 크게 떴다.
“어라? 저기 누가 숨어 있는 거지?”
마초가 정 안 되면 마조린을 업고 도망치려는 생각을 하다 눈을 번쩍 빛냈다. 골목길 으슥한 곳에서 검은 형체가 어른거린 것이다.
‘으으으! 저 새끼가?’
마쌍린은 마초가 자신이 숨어 있는 걸 눈치챘다고 생각하고 마음이 급해졌다.
“아니! 저건 혹시 마……쌍린?”
마초의 말이 결정타였다.
후다다닥!
마쌍린이 꽁지가 빠져라 몸을 날린 것이다.
“뭐, 뭣? 마쌍린?”
쌍걸의 눈이 빠르게 교차했다. 아이의 말이 아니더라도 더 이상 마조린에게 손을 댈 필요도 없다.
흑걸이 먼저 신형을 날렸고, 이어 백걸이 골목 옆 지붕을 타고 추적해 나섰다.
세 사람의 추격전을 지켜보던 마초가 마조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조린이 깨어나는지 새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끄으으…….”
간신히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는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마초가 마조린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잠자듯 감겨 있던 마조린의 눈이 뜨인 것은 그때였다. 짜부라진 눈에서 꺼질 듯 가느다란 안광이 스며 나왔다.
“너, 넌…… 누구냐?”
“나를 몰라보겠어요?”
“엉? 그게 무슨 소리? 네가 누군데…… 헛! 그, 그러고 보니 너, 넌?”
마조린은 그제야 마초를 알아봤는지 눈시울이 파르르 떨렸다.
어렸을 때는 무던히도 괴롭히던 마초다. 용모와 체구는 변했어도 묘한 뒤울림이 있는 음색은 그대로였다.
“새끼! 내가 몸은 말이 아니지만, 아직 너쯤은 손가락 하나로…… 쿨럭, 쿨럭…….”
마조린이 말을 하다 말고 입에서 선지피를 쏟아 냈다. 그와 함께 그의 눈빛이 급속히 가물가물해져 심지가 다 된 촛불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새끼, 동생이란 새끼가 형이 죽도록 얻어터지고 있는데도 쥐새끼처럼 숨어서…….”
이미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마쌍린을 입에 올리던 마조린이 손을 들어 마초를 가리켰다.
“너, 너 말이다. 너도 마가의 핏줄임에 틀림이 없지?”
“…….”
“마, 마가는 신목령을 들고 천하를 호령하던 가문이야. 근데…… 헉…….”
마조린이 숨이 막혔는지 그르륵 소리를 내면서 말을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끄흐흐…… 동생 놈한테는 기대할 것이 없어. 속이 편협하고, 무공에 대한 재능도 없는 놈이야. 하, 하지만 난…… 너를 알아. 네놈은 흉악한 놈이야.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어. 이, 이거…….”
마조린이 부들부들 떠는 손을 품속으로 집어넣으려고 애쓰더니, 간신히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의 작은 책자였다.
“크흑. 이, 이건 본 가의 비전절학…… 이 담긴 비급…… 이, 이것도 팔아서 앵앵을 구하려고 했더니…….”
마초가 언뜻 사람을 홀릴 것 같은 앵앵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그녀가 장룡에게 빚을 많이 져서 놈에게 팔려 갈 처지라 대신 빚을 갚아 주려고 했는데……. 크윽! 내 대신 앵앵, 앵앵을 돌봐 줄 수 있느냐?”
“…….”
“클럭…… 크흣. 지렁이 새끼…… 내 대신 마가장과 어머니를, 어머니를 부탁…….”
휘이이이.
어디선가 귀곡성 같은 찬바람이 불어와 고개를 떨군 마조린의 머리카락을 헤치고 지나갔다.
마초가 물끄러미 마조린을 보다가 바로 어깨에 둘러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