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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18화)
7장 만류귀종(萬流歸宗)(2)
마초는 자신이 기거했던, 어머니와 주걸이 나란히 누운 오두막 뒤에 마조린을 묻었다.
망한 가문의 대공자라는 부담을 떨치지 못한 채 술독에 빠져 폐인으로 살다가 끝내 맞아 죽은 비운의 인물.
과거 신목령으로 천하를 질타하던 위대한 가문의 후예치고는 너무도 쓸쓸한 죽음이었다.
슬픈 마음보다는 원통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힘이 없으면 당신처럼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군요.’
마초가 입술을 아프게 깨물면서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중천에 머물러 있던 태양이 급속하게 기울면서 눈부신 빛무리를 내리고 있었다.
‘쩝. 마조린이란 놈이 나타나서 산통을 다 깨어 버렸어.’
왕소는 아쉬웠다. 놈들에게 귀한 국물과 고기를 먹여 주고 싶었는데, 벌써 연회는 파장이었다.
비룡장가장의 무사들이 모두 주루를 나간 뒤, 마초가 주방 뒷문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너 이 자식! 어디 갔다 오는 거야?”
“헤에. 어유. 아무래도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서…….”
“새끼, 그럼 무서워서 숨어 있다 기어 나오는 거냐?”
“헤헤헤…….”
마초가 뒷머리를 박박 긁어 대면서 겸연쩍게 웃자, 왕소의 얼굴이 묘해졌다.
진짜 알다가도 모를 놈이었다. 밀가루 반죽을 다룰 때에는 절정의 무인 같은 기세가 풍기더니, 지금은 멍청한 옛 모습 그대로다.
‘하기야 좀 바보스러워도 무공에는 천부의 재능이 있을지 모르지.’
천부의 재능. 그건 무공을 이해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무공을 펼치면 신체가 저절로 반응을 일으킨다. 실상 무서에 대한 이해력은 뛰어나도 막상 무공을 익히면 형편없는 자들도 많다.
왕소는 놈을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초가 해가 뉘엿뉘엿 지는 황혼의 빛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토룡소로 들어갔다.
“가져왔냐?”
“예.”
마초가 짚으로 묶은 시금치 한 묶음을 내밀자, 사진이 시금치를 낚아채더니 얼른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생각난 듯 한마디 했다.
“너 오늘은 폭포 수련을 마친 다음, 네 거처에서 쉬도록 해라. 네 심신이 지친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알겠냐?”
“네? 아, 예.”
부엌 옆에 붙은 헛간으로 들어간 마초가 바닥에 깔린 마른 풀 더미에 풀썩 누웠다.
헛간 안은 바깥과 마찬가지로 후덥지근해서 쉽게 안정을 취하기는 글렀다. 그렇게 누워 있던 마초는 문득 마조린이 준 다 낡은 비급을 떠올렸다.
마초가 품속에서 비급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고 겉장을 보았다.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는 몰라도 금세 바스러질 것 같은, 누더기 같은 책자였다.
책 표지에는 먹물이 번져서 알아보기 힘든 글자가 몇 개 있었다.
‘천지……종횡도?’
마초는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천지종횡도라니! 그건 주걸이 가르쳐 준 바로 그 검초가 아니던가?
하지만 주걸의 정체를 안 후에는 그가 그럴듯하게 전수해 준 것은 세 살배기 애들도 흉내 내는 삼재검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마조린이 건네준 마가의 비전절학이 바로 천지종횡도라니!
기묘한 감정을 느낀 마초가 서둘러 다음 장을 넘겼다.
‘응? 이게 뭐야?’
마초는 적이 실망을 하고 말았다. 다음 장을 넘겨도, 또 넘겨도 글씨의 먹물이 번져 무슨 글자인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이윽고 마지막 장까지 넘긴 마초의 눈이 번쩍 빛을 내다 급히 사그러들었다.
마지막 장도 마찬가지로 먹물이 번져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단 한 글귀만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만류귀종(萬流歸宗)이란 네 글자였다.
‘큭. 천하의 모든 일은 하나로 귀결된다?’
마초는 책자를 덮었다. 아무런 쓸모없는 책자다. 그러나 이 책이야말로 마초의 뿌리를 찾는 귀중한 의미가 있었다.
책자를 소중히 품속에 넣은 마초는 시간이 꽤 지났음을 알고 녹슨 칼을 들고 헛간을 나섰다.
지금쯤 사진은 자신이 준 시금치로 토룡의 왕을 꼬셔 대고 있을 것이다.
“크으. 미치겠군.”
사진은 끝이 두 가닥으로 갈라진 예의 기형도를 들고 한군데를 열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놈은 자신의 생각대로 시금치라면 사족을 못 쓰는 모양이었다. 그가 시금치를 늪가에 파묻자마자 기다렸던 것처럼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빠르다. 벌써 수십 번이나 칼질을 했지만, 놈은 거의 반 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도를 피하는 것이었다.
‘저 새끼가 장난치나.’
사진은 점점 부아가 돋아 견딜 수가 없었다.
“에잇!”
사진은 거의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내공을 모두 끌어 올린 것은 물론,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그동안 숨겨 왔던 도법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아무도 볼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노릇이기도 했다.
건곤파천섬(乾坤破天閃)! 그야말로 천지를 빛처럼 가르는 쾌도로 지금은 몰락한 산동성 태산 황보세가의 비전절기였다.
“헉헉헉…….”
사진은 전력을 다했지만 겨우 한 자 크기의 괴상한 놈을 해치우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처음에는 피하기만 하던 놈이 언제부터인가 간간이 반격을 시작했다. 사진을 슬슬 얕보고 있다는 얘기였다.
따당!
놈이 발출한 시퍼런 기류와 사진의 도기가 충돌하면서 파도 같은 기류가 사진을 향해 밀려왔다.
“헛! 요망한 괴물!”
사진은 이번엔 유운도(流雲刀)로 기형도를 구름이 흐르듯 부드럽게 흔들면서 좌우로 짧게 그었다. 펄쩍 튀어 날아오는 괴물을 단 한 칼에 해치우겠다는 득의의 공격.
그가 십 년간 이곳 폭포수 밑에서 참오하면서 깨달은 참폭도(斬瀑刀)의 일 초였다.
파칵!
섬광 같은 빛줄기가 토룡왕의 몸에 작열하자, 놈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거의 정통으로 맞은 듯한 느낌에 사진이 환호성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됐어!”
그와 함께 사진의 칼이 건곤파천섬의 일도로 허공에 치솟아 오른 토룡왕의 몸을 쪼개었다.
파라락!
순간 건곤파천섬을 비낀 토룡왕의 몸에서 운무가 자욱하게 솟아오르면서 눈앞을 가렸다.
“헛! 이 새끼가?”
사진은 놈이 혹 무슨 술수를 부리는가 하고 뒤로 훌쩍 물러나려고 했다.
그때, 추아앗! 하고 공간의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소리와 함께 뿌연 안개 더미 속에서 수천 개의 물방울이 쏘아져 나왔다.
“킁! 어림없다!”
사진의 칼이 허공에서 빠르게 선회하면서 수십 가닥의 검기를 쏘아 냈다.
차차차찻!
검기가 물방울을 산산이 흐트러뜨리면서 안개로 가득한 시야가 확 뚫리는가 싶었다.
토룡왕의 기다란 형체가 드러났다 싶은 순간, 갑작스런 광채가 토룡왕의 두 눈에서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그 광채가 어찌나 강렬한지 사진은 그만 눈을 찔끔 감고 좌측으로 물러났다.
눈을 감는다! 싸움 중에는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금기다.
촤아악…….
사진이 물러나면서 어지럽게 칼을 휘두르다가 뭔가 걸쭉한 침 같은 것이 목 줄기에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헉!”
사진은 그 찐득하게 목에 달라붙은 침이 수십 개의 바늘로 화해 목 줄기를 찔러 댄다고 느꼈다.
끄으윽…….
사진이 양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눈을 째질 것처럼 부릅떴다.
눈동자가 허옇게 뒤집힌 것은 바로 그때였다.
쿠웅…….
사진의 동체가 넘어지면서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바로 그때, 부친이 먹을 야식을 마련해서 토룡연으로 다가오던 사미련이 놀라 소리쳤다.
“아, 아버지!”
비단이 찢기는 것 같은 비명 소리와 함께 그녀의 신형이 둥실 떠올랐다.
‘대단하구나……!’
마초는 그녀의 물찬 제비 같은 동작에 감탄하면서 그녀의 몸놀림을 세세히 눈에 담았다.
단순히 직선으로 달려 나가는 그녀의 경공에서 특별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 빠르기에 전후좌우에 변화를 준다면?
마초의 눈에 사진의 빠른 공격을 피하던 토룡왕의 빛살 같은 동작이 떠올랐다.
종잡을 수 없이 오르고 내리면서 비껴 피하는 것이 단순한 임기응변일 뿐일까.
‘상대의 공격에 따라 순간적으로 몸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수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한 결과가 아닐까…….’
마초는 특히 사진의 공격을 피해 춤을 추듯 홀연히 허공으로 떠오르던 토룡의 동작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저 제비 같은 계집애의 움직임에 토룡왕의 동작을 덧붙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이걸 토룡비천무(土龍飛天舞)라 할까. 아니, 너무 길어. 그냥 토룡무(土龍舞)라고 하자.’
마초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넘실거렸다. 스스로 무공을 창안해 낸 것 같은 이 뿌듯함이란.
“아버지…….”
사미련은 눈물을 질질 쏟으면서 통곡하고 있었다.
‘저런, 미련한 계집!’
마초는 이미 정신을 잃고 늪에 쓰러진 사진의 몸을 부둥켜안고 눈물이나 짜는 사미련이 한심스러웠다.
뚜벅, 뚜벅.
마초가 소리를 내어 토룡연에 다가가자, 구슬피 울던 사미련이 고개를 홱 돌리고 마초를 쏘아보았다.
“이 지렁이 새끼야, 아버지가 잘못되었으니 잘되었다고 구경하러 온 거야?”
“헤에…… 그게 아니고요…… 저기, 중독된 것을 만지면 낭자도 중독이 될 가능성이…….”
“어맛!”
사미련이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부친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슬픔에 겨워 기본적인 사항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손을 떼자마자 마초가 사진을 덜렁 업었다.
“너, 넌……?”
“뭐, 난 괜찮아요.”
진짜 괜찮은지는 마초도 모른다. 사진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마초에게 그는 스승과 다름이 없었다. 마초는 그가 자신을 혹사한 것이 훈련의 일환이라고 믿고 싶었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침대의 두터운 이불에 덮인 사진의 몸은 오한에 걸린 것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거의 밤새도록 사진의 이마에 데운 물을 적신 물수건을 갈아주던 사미련은 지쳐 잠이 들었고, 그녀 대신에 일을 맡은 마초도 차츰 무거워진 눈꺼풀을 억지로 떠서 깨어 있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끄으응…….”
‘음? 이게 무슨 소리지……?’
설핏 잠이 들었었나 보다. 마초는 아련히 귓가에 들리는 자그마한 신음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 침대 위를 보았다.
“아니……! 깨어나셨어요?”
마초의 갑작스런 물음에 사진의 맥이 풀린 눈동자가 몇 번 감길 듯 껌뻑거렸다.
“……내, 내가 언제 여기에…….”
간신히 말을 꺼내던 사진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토룡과 싸우던 그때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후우…….”
왠지 모를 한숨을 내쉰 사진이 눈을 돌려 침대 위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든 사미련을 바라보았다.
“그랬어…… 그놈의 독에 당해서…….”
사진이 몸을 부르르 떨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신경이 곤두선 눈으로 마초를 응시했다.
“누가 네놈보고 내 방에 들어오라고 했지? 새끼! 당장 나가!”
사진이 악을 바락 쓰면서 호통을 질렀다. 퍼뜩 잠결에 깨어난 사미련이 멍한 눈으로 부친을 보다가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가는 마초를 의식했다.
“저, 아, 아버지…….”
사미련이 어렵게 말을 꺼내자, 사진이 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놈은 흉측한 놈이야. 절대 놈에게 정을 줘서는 안 돼. 아비가 조금이라도 약점을 보이면 승냥이처럼 물어뜯을 놈이란 말이다. 알겠냐?”
“네…….”
평소에 보기 힘든 부친의 엄격한 언동에 그녀의 가슴이 메추리처럼 졸아들었다.
이해는 못하지만, 아버지가 누군가. 황보세가의 장자로 태어나 세상의 온갖 매운맛, 쓴맛을 다 본 그의 말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큭.’
마초는 씁쓰레 웃었다.
자신이 방문을 나서자마자 들린 사진의 실망스런 말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들으라고 한 말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대로 헛간에서 세상일을 모두 잊고 눕고 싶었지만, 마초의 발길은 자연스레 토룡연으로 향했다.
‘큭. 그놈이 아직 남아 있을까?’
놈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영물인지도 몰랐다. 마초가 서둘러 사진을 업을 때에도 자신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던 놈의 화등잔처럼 빛나던 눈을 잊을 수 없다.
‘음? 역시!’
마초가 허리춤에 찬 녹슨 칼을 힘껏 부여잡았다.
있었다!
놈은 마초를 기다린 것인지 전에 있던 바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곧추세운 조막만한 대가리를 살살살랑 흔들고 있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