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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20화)
7장 만류귀종(萬流歸宗)(4)
어느새 그의 눈에는 누리끼리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헉!”
자신을 노려보는 것도 아닌데 겁이 찔끔 난 마초가 헛바람을 삼키면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야, 새끼야. 뭐, 내 별명이 나하고 딱 어울려? 새끼, 겁쟁이 애새끼나 달고 못하는 말이 없네?”
그러더니 얼굴이 새파래진 마초를 노려본다.
“너, 내가 무섭냐?”
“저, 아뇨. 무섭다기보다는…….”
“아니라고? 그럼, 내가 무서운 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무섭다 이거냐?”
“예, 예. 그런 점도…….”
마초가 떠듬떠듬 변명하자, 석두한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자식, 나야 도살부가 직업이니 그렇거니 하지만, 네 옆에 있는 놈 별명이 뭔지 아냐?”
“……?”
“저 새끼 별명이 조피와(粗皮蛙:두꺼비) 살객(殺客)이야! 알겠냐? 진짜 무서운 놈은 대놓고 소나 돼지를 죽이는 내가 아니라 뒤에서 칼질이나 하는 저 새끼란 말이다.”
‘조피와…… 살객?’
마초는 멍청한 표정을 하면서도 속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왕수의 우둘투둘한 얼굴을 보면 토룡왕과 싸우던 금두꺼비를 연상시킨다.
“자식, 저 새끼 말은 무시해라. 내가 주루에서 고기 요리를 한다고 저 자식이 지 맘대로 붙인 이름이거든.”
어쩌니 당황한 왕수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했을 때, 고개를 갸웃하던 석두한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근데 너, 웬일이지? 네놈이 도살하는 걸 구경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맞아. 내가 한가한 사람이 아니잖아?”
말을 하면서 습관대로 마초의 어깨를 툭 치려다가 얼른 손을 당겼다. 마초의 몸에서 발산되는 뜨거운 열기가 신경 쓰였던 거다.
“……실은 이 자식을 너에게 맡기려고 왔다.”
“뭐, 뭐야? 그게 무슨 소리지?”
“마초, 너 말이야. 저 친구의 일이나 도와주면서…….”
그때 석두한이 왕수의 말을 중간에 끊으면서 말했다.
“저 새끼를 어디다 써 먹으라고?”
“넌 애한테 그냥 잡일이나 시키고 밥이나 주면 돼.”
“도살장에서 밥 벌어먹는 게 얼마나 힘든 줄이나 알고나 하는 소리냐?”
“아, 그러니까 소소한 잔심부름이나 시키면서…….”
“크크. 나한테 필요한 건 죽은 소를 나르는 일꾼이거든. 킁! 저 겁쟁이가 잘도 일하겠다.”
“모르는 소리 마. 인석이 겁쟁이라도 힘이 천하장사야. 한번 시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만 돌아가시지?”
석두한이 손을 휘휘 저으면서 한마디 했지만, 마초는 그들의 대화는 귓등으로 흘리면서 축사를 돌며 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야, 저건 엄청나네?”
마초가 큰소리를 질렀다.
다른 보통 수소보다 적어도 배 가까운 엄청난 덩치를 가진 놈이었다. 더욱이 순박해 보이는 다른 소들의 눈과 달리 놈의 부릅뜬 눈이 째려보는 것이 성질 한번 더러워 보였다.
그때, 몇 장 앞에서 축사 안을 기웃거리면서 다가오는 사십 대의 중년인이 마초의 눈에 들어왔다.
투명하리만큼 하얀 비단옷에 풍성하게 틀어 올린 상투에는 우윳빛 나는 옥비녀를 지르고, 순은으로 만든 화려한 문양의 요대는 보기만 해도 진귀해 보인다.
한마디로 도축장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시비를 걸지 않는다.
바로 신목원 유일의 장의사로 천상낙원장(天上樂園莊)의 장주 벽창호였다.
‘저 사람은?’
마초는 은밀히 그의 동태를 살폈다.
축사 안의 소들을 살피는 것을 보니, 장례에 쓰일 소고기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끔 상주가 장례에 필요한 일체를 장의사에 맡기기도 하는 것이다.
‘가만있자…….’
마초의 눈에 약간의 장난기가 서렸다.
마조린에게 사기를 칠 때 바람잡이 노릇을 하고, 그 대가로 사기 친 돈을 챙긴 자다. 어찌 그냥 두고 볼 수가 있을까.
‘크큭. 사기를 친 대가는 받아 내야지.’
마초는 축사를 막은 두 치가 넘는 두꺼운 출입문을 눈여겨봤다. 쇠붙이로 만든 걸쇠에는 두툼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야아, 이 자식, 진짜 눈알이 미친놈처럼 번뜩이네? 어유, 저 다리 짝에 근육 좀 봐. 진짜 힘깨나 쓰겠는걸?”
‘애새끼가 소를 처음 보나.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군.’
벽창호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애써 참았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본 아이 같았다.
‘저 애를 내가 어디서 봤더라…….’
벽창호가 잠시 한눈을 팔았을 때,
“에이, 네가 째려보면 어쩔래? 이 멍청이 소 새끼야!”
마초는 욕설을 하면서 손가락을 소의 눈앞에 대고 뱅글뱅글 돌려 화를 돋우었다.
푸륵, 푸르륵!
화가 잔뜩 난 소가 콧방귀를 뀌면서 목책 앞으로 달려 나왔다.
‘됐어!’
속으로 쾌재를 부른 마초가 그 틈을 놓칠세라 양손을 벌려 소의 두 눈을 일시에 찔렀다.
움메메!
고통스런 비명을 토한 거대한 소가 앞발을 높이 올려 발광할 때, 마초가 수도로 목책 문을 후려쳤다.
퍼썩!
목책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황소가 와락 가까이 있는 사람을 덮쳤다.
“으아악!”
“저, 저, 저……?”
십여 장 밖에서 사단이 벌어진 것을 눈치챈 석두한이 몸을 날려 달려갔다.
도축장에서 사고가 나면 어차피 주인인 그가 책임져야 한다. 똥줄이 바짝 탄 석두한을 왕수가 쫓아갔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크으윽.”
벽창호는 눈앞이 컴컴했다. 좋은 고기를 고르는 데 방해가 된다고 호위무사를 밖에 세워 놓은 것이 불찰이었다.
놈의 앞다리에 가슴이 채여 뒤로 넘어가던 벽창호는 눈앞에 우람한 뿔이 들이닥치자 그만 머리가 텅 비어 버렸다.
마초는 부서진 목책에서 삼사 척 길이의 각목을 들고 무섭게 덮치는 소를 응시했다.
단 한 방이다. 미친놈처럼 덮치는 거대한 소의 다리와 뿔에 부딪힌다면 일류의 고수라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놈의 뿔 사이에 오묵하게 들어간 곳이 급소다. 그 정수리에 각목을 박아 넣어야 한다.
산처럼 내리 덮치는 소의 발광한 눈알이 마초의 눈과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순간! 마초가 높이 쳐든 각목을 평행으로 그으면서 수직으로 떨쳐 내렸다.
“천지! 종횡!”
어디서 들려오는 소린가, 벽창호는 흉악한 소의 뿔에 받힌 자신의 머리통이 부서지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길게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악!”
8장 차도살인(1)
소가 흘린 흥건한 핏물 속에 마초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손에는 황소의 머리통을 친 각목이 떨어질 듯 대롱거리고 있었다.
마초의 흐리멍덩하게 뜨인 눈에 서둘러 달려온 장정들이 보였다. 그들은 마초는 무시하고 절명한 소의 시신을 질질 끌고 작업장으로 옮기고 있었다.
“저, 정말 고맙네.”
석두한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상황이 너무도 뻔했던 것이다.
무언가에 발작한 황소가 우리를 막은 목책을 부수면서 뛰쳐나왔고, 하필 그때 우리 앞을 지나가던 벽창호를 덮치려는 찰나, 옆에 있던 마초가 각목으로 황소의 급소를 때려서 죽인 것이다.
“자네 덕분에 살아났어.”
얼마 후 위험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벽창호가 치하를 했다.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난지라 입에 발린 말은 아니다.
“어때? 자네가 바라는 거 있으면 말해 주게. 내, 내 목숨을 달라는 소리만 아니라면 다 들어줄 테니까.”
벽창호를 아는 사람이라면 실로 객쩍은 소리였다. 자기가 입는 옷이나 먹는 음식만 빼놓고는 돈 한 푼에도 발발 떠는 작자가 바로 벽창호다. 그런 인색한 놈이 자기 목숨만 빼놓고 다 주겠다니.
“아, 아녀요. 뭐, 놀라긴 했지만 제가 다친 곳도 없고…… 아참, 옷이 피에 젖어 볼썽사납네요. 이걸 갈아입어야 할 텐데…….”
그러면서 마초가 왕수를 빤히 보면서 말했다.
“아저씨,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와야겠어요.”
“아, 아니 그럴 필요가 뭐 있어? 내가 돈을 줄 테니 그걸로 옷을 사 입으면 되지.”
벽창호가 생색을 내자, 왕수의 입술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에이, 쪼잔한 새끼. 아이에게 옷이나 살 돈 몇 푼 주고 입을 싹 닦겠다 이거지?’
왕수가 그 생각 끝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가능하면 점심때는 돌아와야 한다?”
“네에…….”
마초가 짧게 대답하면서 축사 사이의 통로를 통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 이거 봐! 시간 있으면 언제라도 날 찾아와라. 내 결코 은혜를 잊는 사람이 아니다!”
벽창호가 소리를 지르면서 함지박만 하게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체면치레로 생색만 내자고 해도 솔솔잖은 돈을 후사했어야 했다. 그런데 세상물정에 어두운 애라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때? 쓸 만하지?”
왕수의 말에 석두한이 픽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자식이 운수가 좋았을 뿐이야. 하마터면 줄초상을 치를 뻔했어.”
“어쨌든 저 녀석, 멍청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독종이거든. 그러니 맡아 보라니까?”
“새끼가 손톱만큼이라도 겁을 내면 바로 돌려보낸다?”
“아, 그 사람. 내가 누구야. 춘양루의 신비루주 아닌가. 믿어 보라니깐.”
두 사람이 알듯 모를 듯 말을 나누면서 빠르게 달려가는 마초의 등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초는 거의 일각을 몸을 날려 신목원의 마가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마가장이 가까워질수록 마초의 얼굴이 침침하게 잠겨들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초목 사이로 우뚝 서 있던 마가장의 전각들은 앙상한 주춧돌과 시커먼 기둥만 남기고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마초는 혹시나 하고 무너진 전각들 사이를 쏘다녀 보았지만,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한 마초가 마지막으로 호두나무 숲 속으로 발을 옮겼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어머니와 주걸, 마조린의 무덤에 들러 봐야 했다.
마초가 숲 속에서 나와 오두막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을 때, 오두막 안에서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격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끄으으, 콜콜콜…….”
‘아니, 누가 오두막에 있는 거지?’
마초는 생경한 느낌에서 금세 아련한 추억 속에 잠겼다. 어떻게 보면 할아버지 주걸의 기침 소리와 흡사했다. 세월을 거꾸로 돌려 주걸이 다시 살아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마초의 걸음이 빠르게 오두막 앞으로 향했다.
삐이걱!
마초가 방문 앞에 서자마자 방문이 아우성을 내지르듯 열렸다.
주춤…….
마초가 주춤 발을 멈추고 열린 방 안을 주시했다.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어오르고, 어쩐지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양 볼이 움푹 꺼져 병색이 완연한 중년인이 희미한 눈으로 마초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마가장주 마중인이었다! 나이 오십에 불과한데, 벌써 환갑이 지난 것처럼 팍삭 늙은 모습이다.
“콜콜, 콜록. 끄으으…….”
잠시 그런 시간이 지나자, 중년인이 가슴을 움켜잡고 고통스레 고개를 수그렸다.
“……가주님…….”
입언저리를 맴도는 마초의 음성을 듣기나 했을까, 고개를 수그린 채 격한 기침을 내뱉던 그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너, 넌…… 크으윽…… 마…… 마초? 내, 내가 허깨비를 보고 있나…….”
의아스럽게도 중년인 마중인은 마초의 변한 모습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헛헛. 내가 꿈을 꾸는 모양이구나. 꿈이라면 깨지나 말아야지…… 크흣. 꿈속에서 깨어나면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이 너무 고통스럽거든. 돼, 됐어. 오늘도 너를 꿈속에서 보았으니 그것으로 된 거야. 그, 그만 사라져라.”
날카롭게 치떴던 중년인의 눈이 힘없이 감겼다.
‘아, 아버지…….’
마초는 소리 내어 그렇게 불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중인이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안다면 저런 심약한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마초는 마중인이 자신을 만난 것이 현실임을 깨닫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초가 천천히 무릎을 꿇고 마중인에게 절을 올렸다.
아마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 올 때면 그가 죽은 다음인지도 모른다. 마초는 자신의 손으로 마중인을 묻고 싶지 않았다.
절을 마친 마초가 무거운 아픔이 배인 눈으로 눈을 감은 마중인을 응시하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마초가 등을 돌렸을 때, 마중인의 감긴 눈가로 눈물방울이 번져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초, 초(草)야……!’
마중인은 목 놓아 마초를 부르고 싶었다. 자신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서도 한 번도 아비라고 불러 보지 못한 잡초 같은 아이.
이제 장성한 마초를 눈앞에서 보니 마중인은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