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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룡쟁천 1권(21화)
8장 차도살인(2)


‘음? 저 자식은……?’
마쌍린은 오두막을 떠나 숲 속으로 다가오는 마초를 보고 얼른 몸을 숨겼다.
그놈이 숨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통에 장가쌍걸에 쫓기다 돌아와 보니 집안은 그야말로 멸문지화의 화를 입은 상태였다.
예전 같으면 마초를 보자마자 반쯤 죽여 놓을 텐데, 마쌍린은 겁이 더럭 나서 마초의 앞에 나설 생각도 못했다.
마초가 숲 속을 빠져나가 멀어진 후에야 마쌍린은 숨었던 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놈에게 겁먹을 이유가 있을까, 마쌍린은 놈을 피한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니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자식의 뒤를 쫓다가 기회가 되면 콱……!’
마쌍린은 옆구리에 찬 은하검(銀河劍)을 잡은 손아귀에 잔뜩 힘을 주었다.
마가장에서 마지막 남은 가보인 은하검은 원래 아버지 마중인이 쓰던 칼로, 서리가 내린 것 같은 검신을 보면 한눈에 명검임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베지 못할 것이 없다는 신검인 것이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 드디어 비룡장가장이 중원으로 진출하는 때가 다음 날로 다가왔다.
그때를 맞아 신목원은 분주한 공기가 뜨거운 열기 속에 터질듯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대한 전각들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비룡장가장. 처마 끝에 달린 비룡 문양의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비룡장가장의 높은 담장 밑으로는 장가장의 가산을 돌아 나온 작은 도랑이 졸졸 소리 내어 흐르고 있었다.
스스스스!
도랑에 메운 수초들이 세찬 황토빛 바람에 소리 내어 떨고 있을 때, 그 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이틀 밤 내내, 마초는 수초 사이에 몸을 숨기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다!’
마초의 눈빛이 파랗게 타오르다 금세 꺼져 들었다.
바로 이 시각이면 술에 잔뜩 취한 장가쌍걸이 춘양루에서 돌아오는 시각, 지금까지는 두 사람이 함께 움직여서 기회를 잡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백의를 입은 백걸이 먼저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큭. 오늘은 당신들이 죽는 날이야. 기대해도 좋아.’
마초는 입술을 와락 깨물면서 다가오는 자를 기다렸다.
“커억, 취한다.”
백걸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그동안 공을 들이던 계집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쌍둥이 형 흑걸은 아직도 다른 계집을 꼬시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몸살 나게 했던 계집을 장도에 오르기 하루 전날인 오늘 밤에야 품을 수 있었다.
‘크흐흐. 물론 그 계집도 술에 워낙 취해서 그렇기는 하지만…….’
백걸은 이 좋은 기분이 깨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아침에는 상쾌한 마음으로 일어나 장도에 오르는 거다.
바로 그때, 그의 귓속에 풍덩하는 물소리가 자그맣게 들렸다.
‘어느 새끼가 도랑물에 넘어진 모양이구나.’
한심한 놈이었다. 머리를 흔들며 부스스 일어나는 놈의 몸뚱이는 물에 흠뻑 젖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써늘한 밤의 공기에 독감에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다.
녀석이 상의를 벗어 질질 짜면서 앞으로 다가왔다. 마차가 지날 정도로 좁은 길은 아니지만, 백걸이 길 가운데서 네 활개를 치면서 비틀거리고 있으니 곧 몸의 한쪽이 부딪칠 것이다.
“새에끼, 내 몸에 부딪치지 않도록, 꺼억…… 조심해서 지나가라. 네 옷깃이 조금이라도 나한테 스쳐도 너는 죽어…….”
혀가 잔뜩 꼬부라진 음성. 그래도 무인의 본능은 상대가 몸에 부딪치는 것을 꺼려한다.
“아, 예예…….”
백걸은 어디선가 들어 본 음성이라고 느꼈다.
“조, 조심하세요.”
녀석이 옆구리에 파고든다고 느끼고 백걸이 몸을 움찔했을 때 놈이 소리친다.
“새끼! 조심은 무슨……?”
백걸은 짜증이 나서 소리치다가 옆구리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이 밤에 이런 따뜻한 느낌이라니. 마치 화롯불을 옆구리에 대고 지지는 것 같다.
백걸은 녀석이 고마웠다. 그때 놈의 얼굴을 싸고 있던 상의가 벗겨졌다.
“너, 넌……?”
눈앞에서 악마가 미소를 짓는다면 저럴까?
백걸이 왠지 소름이 쭉 끼쳐 뒤로 물러나려고 할 때, ‘빠악!’ 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쇳덩이가 정통으로 정수리를 치고 떨어져 나갔다.
‘저, 저놈은 춘양루의 그 새끼…….’
정수리가 반 넘게 함몰되었을 것이다. 힐끔 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진 백걸을 본 마초가 그의 몸을 덜렁 들어 도랑 한쪽에 보이지 않게 처박았다.

“끄억…….”
흑걸은 이게 꿈인가 생각했다. 옆구리를 빠져나간 묵직한 칼 같은 것이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
“넌 춘양루의 그……?”
흑걸의 터질 듯 확산된 동공에 익숙한 얼굴이 웃고 있었다.
털썩…….
흑걸이 앞으로 쓰러지면서 완전히 함몰된 뒤통수가 마초의 눈에 들어왔다.
‘됐어…… 그만 가자.’
마초가 흑걸의 시신을 그대로 둔 채 서둘러 신형을 날렸다. 빠르게 달려 나가던 마초가 방향을 바꾸었다. 이대로 토룡소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 천상낙원장에 가는 거야.’

‘저 자식이 어디 가는 거지?’
마쌍린은 도랑 건너편의 호두나무 숲에 숨어 있다가 마초의 행동에 의문을 느꼈다. 놈이 왜 북쪽의 토룡소로 가지 않고 반대편 길을 택하는 것일까.
마쌍린은 잠시 행동을 망설였다. 놈이 시차를 두고 장가쌍걸을 해치우는 것을 보니 간이 오그라들 만큼 겁이 났다. 도저히 놈을 정면으로 상대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아냐. 내가 직접 손 쓸 게 뭐가 있어? 저 새끼가 어디로 가는 지 알아보고 장가장에 알려 주는 거야.’
차도살인! 마쌍린은 자신의 생각이 너무도 통쾌했다.
마초가 장가쌍걸을 죽였다고 알려지면 놈은 분노한 장가장의 무리에게 갈가리 찢겨 죽을 것이다.
‘크큭. 이걸 두고 손 안 대고 코푼다는 거야.’

오늘은 장가장이 대중원을 향해 장도에 오르는 역사적인 날이다.
그런데 날이 밝으면서 장가장은 난리가 났다. 장도에 오르는 주축 인물인 장가쌍걸이 거처로 귀가하지 않은 것이다.
장가장에 비상이 걸린 건 당연했다.
“그 사람들이 미쳐 버린 건가? 찾아! 나가서 그자들의 멱살을 잡고 끌고 오란 말이야!”
장룡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아침을 먹고 장도에 오를 비룡장가장의 대표는 당연히 장룡이었다. 그런데 전초대를 맡을 두 사람이 아직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장가장의 수백 무사들이 삼사오오 조를 짜서 안팎으로 흩어졌다.

“헉! 저건 뭐야?”
순찰대장 원승(圓乘)은 가슴이 덜컥해서 길 가운데에 쓰러진 흑의인에게 다가갔다.
“흐, 흑걸 대주?”
뒤통수가 완전히 함몰되었지만, 땅바닥을 박은 얼굴은 대충 멀쩡하다.
그가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순찰대장님! 여, 여기 도랑물에 백걸 대주님이……?”
도랑물에 코를 박고 죽었을까, 순찰무사는 두개골이 반쯤 쪼개진 백걸을 가리키면서 화급히 소리치고 있었다.

온 장원이 뒤집어엎어질 만큼 큰일이었다. 비룡장가장주는 물론 장가장의 수뇌부들이 대회의청에 모여 침묵하고 있었다.
대야망을 품고 중원에 진출하려던 계획이 초장부터 장벽에 부딪친 셈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조용하던 장내에 숨통이 트인 것은 회의청 문이 조심스럽게 열린 덕분이었다.
거기서 나타난 것은 빈대떡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미복비단옷에 화려한 요대가 오늘따라 초라해 보인다. 그건 눈에 불을 켜고 째려보는 장가장의 수뇌부 때문이리라.
‘크으. 이거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초상 치르겠네?’
그 초상을 치를 장본인이 바로 벽창호일 것은 물어보나마나였다.
“오오! 수고했네. 그래, 사인은 밝혀졌는가?”
상석의 비룡장가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자, 좌중의 긴장감은 더욱 팽팽해졌다.
비룡장가주 장무진(張無盡). 감가천하장주 감무혼(甘武魂)이 구만 리 장천을 나는 붕새라면, 장무진은 범인은 쉬이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속이 깊은 만년 묵은 능구렁이였다.
벽창호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저어, 제가 수없이 많은 시신을 보았습니다만, 이 경우는 매우 미묘한지라 쉽게 말씀을…….”
“그럼 모르겠다는 말인가?”
중간에 성급하게 말을 끊은 것은 대장로 장운생(張雲生)이었다. 장무진이 긴 얼굴에 뱀처럼 느물거리는 인상이라면, 사촌형 장운생은 곰처럼 커다란 머리에 쥐새끼 눈을 한 편협하고, 거친 인물이었다.
가려운 데를 긁어준다고 할까, 장운생은 장무진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는 훌륭한 조수였다.
“예, 예. 그게 원래 한 사람에게 당한 시신을 보면 공통된 부분이 있기 마련입죠. 열양공에 당한 시신은 피부가 폭약에 맞은 것처럼 너덜거리고, 음한공에 당하면 자상이 좁고 가늘면서 약간 얼어붙는 게 특징입니다요.”
“그래서……?”
“예에, 근데 두 분 다 옆구리를 먼저 베인 후에 한 분은 정수리를, 다른 분은 뒤통수가 베였는데, 그게 묘하게도…….”
벽창호가 또 묘하다는 말과 함께 말을 중단하자, 좌중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에잇! 자네 지금 장난을 치는 건가?”
화가 난 장운생이 옆에 세워 놓았던 장창을 들고 으르렁대자, 간이 오그라든 벽창호가 땀을 질질 흘리며 소리쳤다.
“그, 그게 칼에 베인 곳은 얼어붙은 것처럼 크기가 작은데, 그 주변은 화농처럼 뭉개져 있었어요!”
“그, 그럼…… 한 번의 공격에 음양의 두 기운을 담았다는 말인가?”
장가장주 장무진의 말에 벽창호가 동그란 눈을 떼구르르 굴렸다.
사실 지금껏 망설인 것도 그런 말도 안 되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가 있을까?’
장무진의 반월 같은 눈매가 초승달처럼 깊어졌다.
사실 흉수가 중원이나 대막, 또는 북해 등 외지에서 오지 않았다면 두 군데, 아니 내부의 적을 가정하면 세 군데를 의심할 수 있다. 감가천하장과 마가제일장, 그리고 비룡장가장의 무공을 익힌 흉수다.
감가천하장의 내공 근원은 수, 화, 목, 금, 토의 오행 중 화기(火氣). 즉, 불이요. 마가제일장은 토기(흙)이며, 비룡장가장은 용을 상징하는 수기(물)다.
음양의 기운을 나누면 물과 불이니, 흉수는 감가천하장과 비룡장가장의 무공을 익힌 자가 되어야 한다. 다만, 마가제일장의 토는 음과 양을 겸비한다.
장무진이 생각에 잠긴 사이 벽창호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두 분의 상흔을 보면, 먼저 평행으로 옆구리를 베고 난 후에 정수리나 뒤통수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은 형상이 꼭 십자형으로 보입니다.”
“시, 십자(十字)?”
“예, 예. 틀림없습니다.”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려는 듯 벽창호가 떠벌떠벌 떠들었지만, 장가장주 장무진은 그 십자를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열십자(十字)는 곧 토기(흙)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하나 놈의 단순한 수법에 쌍걸이 쉽게 당할 이유가 없소.”
장운생의 말에 벽창호가 얼른 대답했다.
“예. 그게 그렇습지요. 말하자면 상흔으로 봐서 흉수를 당한지 몇 시진은 지난 것 같은데, 그게……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어서…….”
“술에 취해서 당했다는 소린가?”
장운생의 반문에 이번엔 장무진이 말했다.
“그놈들이 워낙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어찌 이런 중요한 때에…… 허어…….”
장무진의 말을 끝으로 좌중은 침묵했다.
흉수는 마가장과 연관이 깊다. 평소 쌍걸의 거친 성정과 무자비한 술수로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건 삼척동자도 안다.
그러나 과거 언제부터 언급할 것도 없이 모든 사건은 최근에 벌어진 일의 연장일 가능성이 높다. 쌍걸이 마가장의 대공자 마조린을 개 패듯 패서 죽였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으으음. 그렇다면 그때 쌍걸이 놓쳐 버린 마가장의 마쌍린이……?”
장무진의 말이 아니더라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다녀왔습니다!”
다시 회의청 문이 열리고 들어선 것은 장가장의 대공자 장각(張角)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큰 뿔처럼 뾰족해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오, 그래. 춘양루에서 소득이 있었느냐?”
장각이 부친 장무진의 물음에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예. 그게…….”
말을 하면서 그가 들어오라고 손짓하니, 하얀 보름달이 통째로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며 나타난 여인이 있었다.
바로 춘양루의 요화 앵앵이었다.
그녀의 사슴처럼 긴 목을 까딱 숙여 인사를 했다.
“소녀 앵앵, 지고하신 장주님을 뵈옵니다.”
“헛헛헛. 듣던 대로 대단한 미모로군. 화용월태란 이를 말함인가.”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농이다. 그러나 원래 신목원을 대표하는 가문의 주인이라면 저 정도의 여유는 있어야 한다.
앵앵의 눈빛이 이채로 반짝였다. 말을 들어 보니 급한 일인데,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과연 만년 묵은 능구렁이라더니…….’
“낭자가 아는 내용을 한 점도 숨김없이 말하라.”
뻣뻣한 장각의 언동. 그것 하나만으로도 부친의 여유로운 태도와 뚜렷이 구별이 된다.
“네에. 실은 제가 아는 건 별로 없어요. 우리 춘양루의 기녀인 강아와 취아가 두 분을 접대한 다음에 두 분이 따로 돌아가신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술은 많이 마셨겠지?”
장운생의 말에 앵앵이 고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기녀를 함락시키기 위해 토룡주를 몇 단지나 퍼마신 것이다.
“……네. 고주망태가 되어 몸도 제대로 못 가누시기에 마차를 대령하겠다고 했었는데…….”
앵앵이 말꼬리를 흐렸다. 뒤는 들어 보나마나였다. 장가쌍걸 체면에 취했다고 해서 마차를 탄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알겠다. 그만 돌아가라.”
더 이상 물어봤자 나올 것도 없다. 흉수는 쌍걸 중에 한 사람을 먼저 미행해서 그를 해치운 다음에, 도랑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뒤에 오던 나머지 한 사람에게 손을 쓴 것이다.
이미 도랑의 수초가 사람이 숨어 있던 것처럼 꺾여 있었다지 않는가.
“으으음…….”
앵앵이 돌아간 후, 굽이치는 감정을 다스리던 장무진이 짤막하게 명을 내렸다.
“중원 진출은 무기한 연기한다. 마쌍린! 놈을 잡아라!”
“옛!”
우렁찬 대답과 더불어 장가장의 분위기가 급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