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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나의 경비병 1(2화)
1장 제발 좀 그냥 내버려 둬라(2)
그렇게 상인 대열이 사라지자 한스가 다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어제부로 검문검색을 철저히 하라는 상부 지시가…….”
다스는 눈을 부라리며 한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시는 개뿔. 너 인마. 그리고 저거 우리 둘이서 다 검문하고 통행증 일일이 대조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줄 알아? 여기가 경비들이 한가득인 동문인 줄 알아?”
“하지만. 제국법이 있고 상부 지시가.”
그는 신병 교육대에서 배운 그대로 써먹으려는 한스를 한심한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 멀리 가면 식당 하나 있는 거 알지? 거기 가서 시원한 물이나 좀 가져와라.”
“그건 근무지 이탈입니다만.”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한스의 모습을 보며 두둑해진 주머니에 잠시 좋았던 기분이 싹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 신삥에게는 개념탑재를 위해 조금 교육이 필요할 듯 보였다.
“뭐 근무지 이탈? 아놔! 이 시키가 진짜. 하늘 같은 고참이 시키는데.”
그제야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한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야, 이 시키야. 너 대가리 박아. 빨랑 안 박아?”
“넵!”
후다닥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한스를 보며 다스는 인상을 푹푹 써 댔다.
“선임이 시키면 그곳이 드래곤 아가리일지라도 뛰어들어야 한다는 거 몰라? 이 시키가 빠져 가지고.”
“시, 시정하겠습니다.”
“시정은 무슨 시정, 넌 오늘 별로 안 덥지? 그래 이런 시원한 날에 땀 좀 쫙 빼 보자. 오른쪽 다리도 들어.”
한스는 머리를 박은 채 끙끙대며 오른 다리를 들었고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이 개념 없는 신삥 시키, 넌 오늘 죽었다고 복창해라.”
“끄응.”
더러운 군대를 저주하며 악다구니를 악물고 있는 한스, 하지만 어쩔 건가. 군대란 억울하면 먼저, 그리고 빨리 오면 되는 것이다. 물론 어리디어린 한스에게는 그에 대한 해당 사항이 없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내가 누구냐고?
내 이름은 김석민, 귀신도 잡는다는 해병대 말년 병장이다. 아! 미안하다. 말이 잘못 나왔다. 말년 병장이었다라고 수정한다.
지금은 다스 베이더, 참고로 난 니 애비다라고 외치는 스타워즈의 그 다스 베이더가 아니다. 난 총각에다가 아직 니 애비가 될 정도의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니깐. 하여튼 이름은 다스고 지금은 몬타나 제국 몬타나 시티 외성의 북문 경비병직을 수행하고 있다.
몬타나 제국? 해병 병장? 여기서 딱 삘이 오지 않나?
그래 내가 바로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양산 판타지 세계의 그 흔하디흔한 주인공이다. 드디어 나도 양산 판타지 협회의 특별회원으로 등업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되었냐구?
그런 질문은 답할 가치도 없다. 어차피 말해 봐야 뭐 또야? 또 그런 전개야? 그런 뻔한 전개는 이제 그만 좀 집어 치우라는 말만 지껄일 게 뻔하다. 나도 욕먹으면서까지 입 아프게 말해 주고 싶지 않다. 그냥 알아서 상상하자. 어차피 꿈과 환상의 판타지가 아닌가.
중요한 것은 그냥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 기억하라. 어차피 양산 판타지 협회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런 것 따위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지 않나?
거두절미하고 처음에는 나도 많이 황당했다. 이제 전역이 코앞인데 이게 무슨 지랄이냐? 생각해 보자.
내일이면 제대하고 이제 복학을 해서 풋풋한 여대생 후배들과 놀 생각에 들떠 있는데 갑자기 이런 개 같은 일이 펼쳐진 것을 보니 복창이 뒤집어질 만도 하다.
물론 처음에는 당황하면서도 눈으로만 즐기던 양산 판타지 협회의 일반적인 정회원에서, 직접적으로 즐기게 된 특별회원으로 등업을 한 난 정말 부푼 꿈을 안고 있었다.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 드래곤이나 마왕 썰러 다니고 10서클이라는 신의 영역 마법을 꿈꾸는 대마법사가 되고, 혹은 영지를 구워삶아 대륙 최강으로 만드는, 물론 그에 뒤따르는 공주, 귀족, 엘프 마누라는 필수 옵션이다. 이 얼마나 꿈꾸던 세상인가.
그런데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거다.
“니기미, 이상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다.”
정말 가슴에 확 와 닿는다.
마나든 기든 신성력이든 지랄이든 보통 상상 가능한 능력을, 이런 전개가 펼쳐지면 그런 것 정도는 기본 옵션으로 달아 줘야 하는 게 일반적인 전개의 양산 판타지 아닌가?
누구는 대마법사가 소환해서 그놈한테 마나 갈취하고 혹은 드래곤이 소환해서 그놈한테 드래곤 하트를 갈취하는데 난 뭔가?
하다못해 이곳에서 써먹을 수 있는 무림의 비급이라도 던져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이 꼬라지는 뭐란 말인가. 날 이곳으로 보낸 어떤 개 같은 자식은 강철연금이 그렇게 주장하는 등가교환의 법칙이란 것도 모른다 말인가?
혹시 그런 능력이 아니라면 비상한 두뇌로라도 개조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이곳에서 한번 펼쳐 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 나름 나도 기계공학도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아무리 대학생에 기계공학도라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능력이 있을까? 아무리 몇 세기를 뛰어넘는 선진문물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을 현실로 창조해 낼 능력이 있을까?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솔직히 그 흔한 비누를 실제로 아무런 도움도 없이 혼자 제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난 철저히 일반적인 사람이다.
마트 가면 널린 게 비누다. 일반적은 사람은 그냥 사서 쓰지 제작과정을 일일이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물건들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기계공학도라도 정말 0.01%의 특별한 케이스가 아닌 이상은 별것 없다. 학점 올A랭크를 여기에 데려다 놓아 봐라. 과연 자기가 뭐를 할 수 있겠나?
뭐? 조선시대에 가서 내가 가진 앞선 지식으로 세상을 바꾸고 세계를 정복한다고? 순 개뻥에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다. 미친놈 취급 안 당하고 칼 맞고 죽지 않으면 다행이다.
박사급? 음. 그 정도까지는 생각 안 해 봤다. 난 어차피 석, 박사도 아닌데다가 딸랑 지방대학 출신이다. 너무 깊이 따지지는 말자.
거기다 술만 처먹고 다니던 나의 소싯적 대학 시절을 생각해 보면 언감생심이지.
그건 그렇고 왜 난 일반 양산 판타지의 틀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가. 이런 더러운 양산 판타지의 현실을 봤나.
그래도 난 꿈을 잃지 않았다.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난 분명 주인공이다. 주인공에게는 필히 주인공의 자격에 걸맞는 기본 옵션이 주어질 터, 기다림의 미학을 되새기면서 이 세계에서 깽판 칠 나날만을 고대하고 또 고대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의문이 든다.
내가 정말 주인공일까? 혹시 그냥 이 세계의 쓸쓸히 사라져 가는 단역이나 엑스트라가 아닐까? 하다못해 조연이라도 이럴 리가 없는데.
꼭 이런 현상을 겪었다고 해서 주인공이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지나가는 행인 1 정도의 엑스트라라고 이런 일을 겪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럼 난 결국 지나가다가 우연히 이곳으로 이동한 엑스트라 행인 1이었나?
에이, 설마? 라고 말하며 현실 도피를 하고는 싶지만 지금 나의 꼬라지를 보면. 음.
결국 난 얼마 안 가 설정만 양산인 판타지, 그 속의 찌질한 단역일 뿐이라는 무서운 사실을 깨닫고 만다. 현실 속 대한민국에서도 솔직히 별 볼일 없는 찌질한 인생이었는데 이곳에도 찌질한 인생을 계승하게 된 셈이다.
고삐리들도 하는 이계 이동 뒤의 인생 역전 로또는 나같이 더럽게 재수 없는 놈에게는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백수나 고딩들도 잘 처먹고 잘사는데. 이런 빌어먹을.
그만하자. 더 이상은 가슴만 아프다.
하여튼 지금의 난 성문 경비병이다. 어떻게 경비병이 되었는지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지금은 그 가슴 아픈 과거를 말해 주고 싶지 않다.
그냥 대한민국의 그저 그런 인생 하나가 이계로 넘어와 여기에서도 그저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라.
설마 당신이 넘어오면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냐?
웃기지 마라. 찌질한 인생은 어딜 가도 똑같이 찌질한 법이다. 나를 봐라. 당신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찌질한 이방인 인생일 뿐이다.
허나 난 아직 희망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오늘의 찌질한 인생이 내일도 똑같이 반복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인생이 찌질하다고 꿈조차 찌질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면 난 오늘도 여전히 경비병이라는 거다.
오늘도 여전히 말이다.
다스는 두둑한 주머니에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식당에 앉아 잘 익은 스테이크를 시켰다. 예전엔 나름 비싼 음식에 고급스러운이라는 이미지가 붙은 스테이크가 이곳에서는 일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자주 즐기는 외식이었다.
한국인의 입에 맞는 김치 같은 맵고 짠 음식이 없긴 하지만 이제 그 나름대로 충분히 적응을 한 상태다. 어차피 이곳도 똑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인데 바퀴벌레와 같은 질긴 생명력을 지닌 과거 해병 병장이었던 그가 적응을 하지 못할 리가 없다.
거기다 이 집 스테이크는 제법 소문이 퍼질 정도로 유명하다. 좀 허름하긴 하지만 나름 이곳 몬타나 시티의 맛집이라고나 할까? 간간이 귀족들도 신분을 숨기고 이 스테이크를 맛보기 위해 온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니.
물론 평소에는 가격도 저렴하기에 일반인들이 대부분이긴 하다.
‘후후. 이게 얼마야. 거의 한 달 월급인걸. 그 양반 정말 두둑하게 넣었네.’
다스는 상인으로부터 받은 돈을 대충 세어 보니 50실버다. 보통 45실버가 한 달 월급이니 월급을 몇 분 만에 번 셈이다. 벌었다는 어감이 조금 그렇긴 하지만.
때마침 스테이크가 나오자 그는 맥주도 덤으로 시킨다. 솔직히 이 세계에 넘어와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바로 맥주다. 모두 오리지널 100% 제조인 이곳 맥주들은 정말 예전 마셨던 맥주들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진짜 맥주가 어떤 맛인지를 이곳 맥주를 마셔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캬하, 좋다.”
조금 거친 나무잔에 한 가득 담긴 맥주를 들이켠 다스는 안주 겸 저녁 삼아 스테이크에 칼질을 시작한다. 슝슝 썰려 나가는 스테이크에서 피어오르는 독특한 향신료의 냄새는 코를 자극한다.
‘스테이크는 검강으로 썰어 줘야 제 맛일 건데.’
검강으로 스테이크 썰기, 그가 깽판자가 되었을 때의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아직까지는 믿고 있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물이 영.’
지금은 한참 저녁때이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주변에 용병들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왁자지껄하다. 보통은 많아 봐야 한두 팀인데 오늘은 대규모 상인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는지 용병들이 좌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저들은 매우 거칠다. 괜히 시비 붙어 봐야 좋을 것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먹고 마셨다.
그렇게 가볍게 저녁을 즐기고 있을 무렵 다스는 주위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번지는 것을 느낀다. 심상치 않다는 것이 싸움이 날 것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야릇하고 묘하다고나 할까?
그 실례로 왁자지껄하던 용병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여기 특제 스테이크 2인분만 주세요.”
아! 이런 것을 두고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라고 할까? 다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 음성을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비친 곳에서는 모자가 달린 그래도 나름 시원해 보이는 얇은 망토를 걸친 여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여자 한 명과 웬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꼬맹이 하나다.
자세히 보니 용병들이 일제히 그곳을 향해 시선을 힐끔거린다. 별다른 이유 없이 용병들이 그럴 리가 없기에 다스는 슬그머니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제야 주변이 왜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는지 이해가 간다.
‘오호. 죽인다. 옷이 가리고 있지만 분명 예상되는 확실한 쓰리 사이즈에 저 청순하고 매혹적인 미모.’
아마 들어올 때는 망토의 모자를 쓰고 있었기에 별로 시선을 받지 않았으리라.
두 여인, 아니 꼬맹이 하나와 여인은 용병들의 시선이 조금 거슬리는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큰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은 듯했다.
다스 역시도 잠시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을 바라보다 그 앞에 앉은 역시 금발인 꼬맹이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뭐 상당히 귀엽긴 하지만 아무래도 꼬맹이보다는 앞의 여자가 훨씬 나았다. 귀여워 봐야 꼬맹이는 결국 꼬맹이일 뿐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