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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나의 경비병 1(17화)
5장 때론 마왕도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수 있다 Ⅰ(4)
그들은 북문을 한참 지나쳐 예전 눈여겨 봐둔 도시의 한적한 공터가 있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다섯 대의 마차를 가지런히 세워 두고 북문에서의 일 때문에 조금 지쳤는지 모두 한숨을 내쉬며 일부는 주저앉아 쉰다.
“도대체 그놈은 무엇이냐. 네가 상인으로 위장하면 북문은 충분히 통과하기가 수월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다스로부터 노인 공경을 받지 못해 화가 난 것일까? 상인의 우두머리 노인은 다스가 열 받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해 준 마른 놈을 심하게 나무란다.
“저도 상인들에게 소문만 들었던지라. 설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일 처리를 똑바로 하지 못하겠느냐? 네 의견에 따라 상인으로까지 위장을 하고 왔더니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죄송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되었다. 앞으로 조심하도록 해라.”
노인은 다스의 행동에 대한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 계속해서 씩씩거렸다. 아까의 허리를 두드리며 힘들어 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지금 보니 100살도 거뜬히 살 것 같다.
“일단 더 어두워지기 전에 테라핌 님의 봉인 마구를 찾아야 한다. 저놈이 마차에 뒤섞어 놓았으니 어서 그것을 찾아보도록 하거라.”
그러자 남자는 주변의 용병, 아니 용병으로 위장한 이들을 포함 모두에게 마차를 샅샅이 뒤지라는 명령을 내린 뒤 다시 노인에게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곳에 정말 테라핌 님의 육신이 담긴 그릇들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노인은 눈을 부라린다.
“지금 테라핌 님께서 전언하신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노인의 분노에 남자는 깜짝 놀라며 허리를 숙인다. 크게 분노할 만한 대목은 아닌데 아무래도 북문의 여력이 좀 크긴 컸던 모양이다. 노인도 자신이 좀 과했다는 것을 인정하는지 작게 헛기침을 했다.
“험, 확실히 이 몬타나 시티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테라핌 님의 정신이 봉인된 마구가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다.”
“수백 년을 기다려 왔습니다. 이번 봉인이 풀리면 테라핌 님께서 정말 깨어나시는 겁니까?”
수백 년, 정말 외길만을 내달려온 눈물 나는 인생이다. 노인도 마찬가지인 듯 더 이상은 남자를 나무라지 않는다.
“그렇다. 테라핌 님의 정신이 봉인된 봉인 마구의 힘이 많이 약해졌기에 테라핌 님의 생각이 나에게 조금 흘러들어 왔다. 테라핌 님께서는 내게 이곳으로 가라고 인도를 해 주셨다.”
최근 들어 봉인 마구가 갑작스럽게 까딱거리거나 떨리는 현상이 많았다. 노인의 말을 들은 남자는 역시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봉인 마구의 힘이 약해진 이상, 따로 봉인 해제할 강력한 신령 혹은 마령은 필요가 없다. 육신이 담긴 봉인구와 일정 거리 이상 가까이만 가면 끌어당기는 힘이 더해져 봉인은 저절로 풀릴 것이고 테라핌 님은 깨어나실 것이다.”
“그럼 이번은 정말 테라핌 님께서.”
그동안 혼자 서러움을 다 받았는지 남자는 눈물까지 찔끔거린다.
“그래. 걱정하지 마라.”
노인도 충분히 남자를 이해하는 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다.
“정신의 봉인 마구만 있으면 이제 세상은 테라핌 님과 우리의 것이다. 파멸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물론 지금 열심히 찾고 있는, 아니, 다스가 슬그머니 숨겨 둔 그 검은 보자기에 싸인 정신의 봉인 마구만 있으면 말이다. 백날 찾아봐도 다스가 몰래 주워 꼬불쳐 둔 것이 거기에서 다시 생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굳이 이 테라핌 결사단이 상인으로 위장을 했을까? 굳이 상인으로 위장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인원수가 좀 있다고 할지라도 그냥 뿔뿔이 흩어져서 왔다면 문젯거리가 되었을까? 상황을 보니 굳이 몰려올 필요 없이 혼자 와도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자, 여기서 악당들의 혹은 마왕 추종자들의 주입식 교육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자신들이 테라핌 결사단으로서 주목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나름 위장을 했을지 모르나, 이것은 보통 창의성 없는 악당들이 하는 전혀 쓸데없는 짓거리다.
악당들은 굳이 모일 필요도 없는데 모이려는 습성과 양아치들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는 습성이 있는 것을 우리는 이 상황만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우르르 몰려다니기 가장 좋은 위장이 상인 아니겠는가.
아마 혼자 다니다가 괜히 깽판자에게 칼 맞기 두려우니깐 그러는 거겠지. 두 명 이상이면 최소한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한 놈이 죽을 동안 도망가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의견을 낸 저런 희멀건 놈이 간부직으로 있다는 것이다. 악당들은 대부분 윗선에서 내린 지시를 그냥 따르기만 할 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
저런 놈이 윗선에 있고 그에 동조하는 대장 노인이 있는 것을 보니 테라핌 결사단이 꽁해서 수백 년 동안 이 짓거리를 해 온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이러니 악당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이 오지 않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제발 다른 구 악당들도 이제 막 생길 신입 악당들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습성대로 움직이지 말고 조금 더 창의적으로 움직여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럼 혹시 아는가? 진짜 악당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올지도.
그렇게 되면 아마 다스는 악당 편에 설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왜냐구?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나으니깐.’
다른 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들이 직면했던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공략법을 알면 가장 쉬운 하급 경비 보스인 다스를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돈 몇 푼 쥐어 주면 알아서 비켜 주는데, 이 얼마나 쉬운 공략법인가. 게다가 그런 티를 은근슬쩍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팍팍 냈지 않은가.
여기 다스에 이어 동변상련의 안타까운 부류 하나 더 추가한다.
테라핌이라는 마왕도 칠칠치 못한 결사단으로 인해 봉인 마구 안에서 참으로 고생이 많다. 안에서 보고 있자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6장 때론 마왕도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수 있다 Ⅱ(1)
우린 여기서 예언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흔해 빠진 그런 예언 말고 진짜배기 신의 예언 혹은 신탁 말이다. 그 예언이란 무엇인고 하니 영웅이 갈 길을 알려 주는 이정표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런 예언을 딱 꼬집어 정리하자면.
“나쁜 놈이 나타날 것이다. 넌 가서 치고 박고 싸워라. 이기면 네놈은 영웅이라는 단어 한자 이름에 박을 것이지만 만약 지면 엑스트라로 강등이다. 네놈 뒤에는 지금 영웅 면접 대기표를 받고 줄 서 있는 놈들이 수두룩하니 알아서 잘 해라.”
이런 정도로 정리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세상 참 희한한 게 나쁜 놈이 하나 나타나면 그에 따라 그놈과 싸울 놈이 수십 명은 나타난다. 그 수십 명이 나쁜 놈 하나를 몰매를 때리든, 아니면 나쁜 놈이 쓰러질 때까지 한 놈씩 혹은 몇 놈씩 끊임없이 덤비던 간에 결국 영웅이라는 자들은 승리를 거머쥐기 마련이다.
이유는 뭘까?
간단하다. 나쁜 놈들은 몰려다니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약한 놈들 이야기다.
꼭 나쁜 놈들 중 보스 급들은 솔로 천국을 커플 지옥을 외치다 영웅 집단에게 신나게 두들겨 맞고 아윌비백(I’ll be back)을 외치며 퇴장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마 세상이 아직 나쁜 놈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그놈들이 진짜 마음먹고.
‘너희만 다굴을 치냐? 우리도 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자. 1등급 보스들이여, 우리도 한 번 뭉쳐 보자.’
라고 외치며 우르르 몰려오면? 아마 그 세상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날 것이다.
가끔 현대에 존재하는 히어로 물만 봐도 그렇다. 나쁜 놈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꼭 한 놈씩 나타나 사방에서 날아오는 주먹 맞고 비참하게 쓰러지지 않는가. 그렇게 당하고도 최종 보스는 자기 혼자 남을 때까지 한 놈씩 보내는 것을 보면…… 그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다.
낡아서 해어질 대로 해어진 신관복을 입은 노인은 두꺼운 책을 편다.
“자, 오늘은 성녀님이 섬기는 운명의 신 메르바 님의 예언에 대해 공부를 해 볼까요?”
“네.”
그에 옆에 있던 순백의 성녀복을 걸친 15세가량의 세실리아 또래로 보이는 작은 소녀가 보인다. 그녀는 귀여운 얼굴을 활짝 펴며 폴짝 뛰어올라 노인의 무릎 위에 올라와 앉는다.
“인간을 가장 사랑했던 운명의 신 메르바 님께서는 오랜 과거 타락한 인간들을 정화하려 했던 다른 신들의 의견에 반대를 하게 됩니다. 신들의 존재는 인간에 비해 절대적이지만 선택만큼은 모두가 동의를 하지 않는 이상 실행을 할 수가 없게 창조주께서 자체 제어권을 주셨지요.”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인간은 창조주께서 만드시지 않았나요? 그런데 어떻게 신이 창조주께서 만드신 피조물의 생사에 관여를 할 수 있게 되었지요?”
특정 신을 모시는 자로서 어떻게 보면 사실이지만 금기시 되는 발언이다. 하지만 노인은 인자하게 웃을 뿐이다.
“자유 의지라고도 하죠.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잣대인 그 자유 의지가 신에게도 존재합니다. 어떻게 보면 창조주께서는 신과 인간을 같은 선상에서 만드셨는지도 모르지요.”
일반적으로 신관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들으면서도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한참을 신과 인간, 그리고 창조주 사이의 관계에 대해 메르바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며 이야기해 준다.
“자, 다시 태초로 넘어가 타락한 인간들이 이 대지를 오염시킬 당시 신들은 회의를 하게 됩니다. 신들의 결론은 결국 세상의 정화였지요. 신들은 세상의 정화라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인간들의 멸망이었습니다.”
노인은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가진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리고 그때 인간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었던 운명의 신 메르바 님께서는 급히 반대를 하십니다.”
사실 뭐 사설은 길지만 별거 없는 이야기다. 신들은 타락한 인간들을 멸종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 회의 석상 중에 인간들을 사랑했던 운명의 신 메르바가 반대를 하여 그 건은 무산되고 만다.
결국 메르바는 그 일로 다른 신들에게 왕따를 당하게 되지만 그런 메르바의 진심을 알아차린 인간들은 오히려 그를 숭배하며 마음을 고쳐 잡고 대대손손 잘살았다. 이런 일반적인 신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 잡설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집중해야 할 부분은 지금부터다.
“자, 그럼 운명의 신 메르바 님의 사도가 남기신 최종장을 한번 볼까요?”
얼마나 중요한 대목인지 최종장 앞에는 최후의 장이라는 굵직한 글귀까지 친절하게 박혀 있다. 노인이 최종장을 넘기자 그곳에는 한 장 가득히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메르바 님이 인간에게 남기신 마지막 전언을 그림으로 담은 것입니다.”
소녀는 또렷한 눈으로 그림을 바라본다.
당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솜씨가 좀 조잡했는지 썩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지만 상황을 살펴보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이거 선택받은 5인의 영웅과 메르바의 성녀죠?”
“네. 맞습니다.”
솔직히 그림은 별거 없었다. 그냥 맨 앞의 성녀로 보이는 인물을 필두로 5명이 각자의 무기를 든 채 붉은 빛을 뿜어 대는 한 곳을 향해 겨누고 있을 뿐이다.
“저도 이 이야기 알아요. 선택받은 최후의 5인과 메르바 성녀는 거대한 힘에 대적해 용감히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이지요?”
뻔한 영웅 이야기를 신전의 가장 중요한 보물인 이 메르바의 구전 최종장에 담았을 리는 물론 없다.
“성녀님께서 아셔야 하는 것은 그냥 내려오는 구전이 아니라 메르바 님의 마지막 전언이자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성녀라고 불리는 작은 소녀는 깜짝 놀란다.
“네? 예언요?”
“그렇습니다. 이건 일반적인 영웅에 대한 삽화가 아니라 앞으로 인간에게 닥칠 마지막 그날을 예언하는 예언의 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언이라는 말에 성녀는 삽화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아무래도 어린 마음이다 보니 호기심이 더 동하는 것은 당연했다.
“선택받은 영웅들아, 그대들을 감싸 안아야 할 따뜻한 신의 품 안이 성녀의 눈물방울에 흩날리는구나. 하지만 그대들은 슬퍼하지 말지어다. 시작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그 마지막 또한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리라.”
소녀가 작게 중얼거린 한 편의 의미 알 수 없는 시 같은 내용은 삽화의 가장 아래 있는 글귀였다.
“혹시 이 글귀가 그 예언에 대한 내용인가요?”
“그렇습니다. 아직 확실히 어떤 내용이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벌어질지 밝혀진 바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메르바 님께서 마지막으로 인간들에게 남기신 말씀이라는 겁니다.”
“히잉, 하지만 이건 너무 난해하고 어려워요.”
메르바의 학자들조차 아직 밝혀내지 못한 내용이었기에 이 어린 소녀에게는 당연히 난해하고 머리가 아픈 내용일 수밖에 없다.
노인은 살짝 귀여운 울상을 하고 있는 소녀를 무릎에서 한 번 번쩍 들더니 특유의 인자한 웃음을 보여 준다.
“어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때가 정녕 내일이라 할지라도 저희들은 그저 메르바 님의 뜻에 따라 행동을 하면 됩니다. 인간들을 사랑하신 메르바 님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결코 저희들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가 오면 다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오늘 공부는 이만 할까요?”
아이들 혹은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부가 끝났다는 말이다. 소녀도 예외가 아닌지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네엥.”
“그럼 성녀님께서는 필요하신 부분을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세요. 이 늙은이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정말 착하게도 나가는 노인에게 인사까지 귀엽게 꾸벅 한다. 같은 15살로 보이는데 세실리아와 차이가 좀 많이 나지 않는가. 세실리아와는 다르게 착하디착해 보이는 소녀는 노인의 모습이 사라지자 얼른 책으로 다가와 삽화를 조금 더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