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몬타나의 경비병 1(18화)
6장 때론 마왕도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수 있다 Ⅱ(2)
다른 건 몰라도 예전에도 얼핏 살펴보았던 이 삽화가 예언이라는 것은 솔직히 조금 충격인 듯했다.
“성녀와 5명의 영웅.”
소녀가 가장 눈여겨본 것은 영웅들의 삽화다. 어린 마음에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혹시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눈을 가까이에 가져간 채 세세히 살펴본다.
“힝. 눈, 코, 입도 잘 안 보여.”
사진도 아니고 이런 조잡한 그림에서 당연히 그런 게 보일 리 만무하지만 소녀의 동심이니 깨지는 말자.
그런데 한참 그림을 살펴보던 소녀는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한 부분을 계속해서 뚫어져라 바라본다. 급기야 뭔가 발견을 했는지 손으로 슥슥 문질러 보기까지 한다.
“얼룩인가?”
소녀가 지금 뚫어져라 보고 있는 그 부분, 그것은 일행의 중앙에 선 긴 금발을 휘날리는 검사의 모습이었다. 아니 정확히 금발의 검사 뒤에 있는 희꺼무리한 검은 얼룩이다.
검은 얼룩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분명 얼룩은 아니다. 촉감으로 보아 원래부터 삽화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궁금증이 커진 소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시중에서도 너무 고가라서 보기 힘든 커다란 돋보기 하나를 가져오더니 그 부분을 확대시켜 본다. 돋보기로 보니 확실히 이 검은 얼룩 같은 것도 삽화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음. 이건 마치.”
금발의 검사 뒤에 비친 검은 얼룩, 그것을 본 소녀의 감상은 딱 하나다.
“검사 뒤에 떡하니 숨어 있는 듯한 사람의 모습이잖아. 이건 뭐지?”
검사 뒤에 숨어 있는 듯한 사람의 모습?
글쎄, 정말 이건 뭘까?
* * *
인적이 드문 병영 밖의 구석, 그리고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까딱거리는 검은 오뚝이, 굳이 특징을 따지자면 오뚝이 자체에 새겨진 기이학적인 형상의 문양이랄까?
“음.”
툭.
다스는 오뚝이의 몸뚱이를 한 번 더 건드려 본다.
까딱까딱.
오뚝이 특유의 반응만 있을 뿐 별다른 특이 현상은 없다.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오뚝이를 들어 이리저리 둘러보고 혹시 무슨 버튼이나 구멍이라도 있나 싶어 꼼꼼히 뒤져 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보물이라고 그렇게 신주단지 모시듯 가지고 있었던 거지?”
물론 규칙적으로 배열된 형상의 문양을 보고 있자니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감이 팍팍 오긴 한다. 보통 이런 것은 무언가 진한 신비를 담고 있고 우리 주인공들에게 예기치 않은 힘을 주는 것이 다반사가 아닌가.
“내 생각이 맞다면 이건 분명 마법진 비스무리한 것일 테고, 그러면 어떤 마법장치가 되어 있는 통이라는 의미인데.”
무게가 생각보다 가볍고 두드려 보니 안이 빈 것 같은 탁한 울림이 전해졌기에 분명 이 안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간간이 이런 것 속에 사라진 고대 마법서 같은 아이템들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한번 부숴 볼까?”
그는 테라핌 결사단이 들었으면 기겁할 소리를 한다. 게다가 다스의 말이 끝이 남과 동시에 오뚝이가 까딱거리다가 살짝 떠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바위 파쇄용 오함마가 작업 도구실에 있었지?”
오함마, 일명 파쇄용 거대 망치, 이윽고 결심을 한 다스는 오뚝이를 구석에 내버려 둔 채 병영 내의 작업 도구실로 향한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오뚝이의 까딱거림이 점차 심해지더니 무언가를 피하려는 듯 필사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나?
마치 앞으로는 가고 싶은데 계속 옆으로 갈 수밖에 없는, 아무리 기를 써 봐도 옆걸음질밖에 하지 못하는 게의 모습?
구르든 뛰든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데 아무리 용을 써 봐야 제자리에서 까딱거릴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오뚝이의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결국 지금 이건 혼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혼자 움직이는 오뚝이라니,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오뚝이가 발버둥을 치는 사이 다스는 어깨에 오함마를 떡하니 걸치고 나타났다. 그러자 오뚝이는 정말 미친 듯이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오잉?”
그제야 오뚝이가 혼자 까딱거리는 것을 본 다스는 흥미로운 눈을 한다. 혼자 움직이는 오뚝이라, 이건 분명 평범한 오뚝이가 아님을 반증하는 의미가 아닌가.
호기심이 동한 다스는 잠시 오함마를 옆에 내려놓고 까딱거리는 오뚝이를 조용히 지켜본다. 그런데 그가 오함마를 내려놓자마자 오뚝이는 점차 움직임을 멈추더니 떡하니 멈추어 선다.
“왜 안 움직여?”
손으로 마구 흔들어도 보고 굴려도 보았지만 역시 아까와 같은 움직임은 없다.
“야! 움직여 봐. 조금 전처럼 움직여 보란 말이야.”
다스의 표정을 보아하니 살짝 고민에 빠진 얼굴이다. 분명 어떤 계기가 있을 터, 그 계기가 뭔지 생각을 하는 듯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며 오뚝이를 건들던 다스는 더 이상 짜증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던지 결국 거대한 오함마를 들고 일어선다.
“이 쉐리가 진짜. 움직이라면 움직일 것이지.”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정통으로 그것을 향해 내리쳤다.
퍼억.
바닥이 흙이라 큰 충격음은 들리지 않았지만 바위 파쇄용 오함마가 이런 목각 오뚝이 하나 박살 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아씨, 빗나갔어.”
정말 한 치 차이를 두고 오함마는 빗나갔다. 그 옆에서 오뚝이는 필사적으로 까딱거리고 있다.
정확하게 내리친다고 해도 오함마의 무게와 길이가 있기 때문에 빗나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는 정확히 서 있는 오뚝이를 겨냥한 채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부릅뜨며 다시 내리친다.
퍼억.
그런데 또 빗나간다. 두 번을 더 내리쳤지만 두 번 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오뚝이는 옆으로 살짝 엎어지며 까딱거릴 뿐이다.
아무리 힘껏 내리쳤다고 해도 사람 팔뚝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오뚝이가 세 번이나 빗나갈 수가 있을까?
여기서 잠시 다스가 오함마로 내리치는 그 순간을 슬로우 모션으로 확인해 보자.
오함마가 공기 저항을 가르며 다스의 힘에 의한 가속도와 무게까지 더해져 곡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린다. 분명 그 떨어져 내리는 안착 지점은 약간 오차가 있긴 했지만 오뚝이를 깨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오함마와 오뚝이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맞닿으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오뚝이가 옆으로 픽 쓰러지며 스치듯 오함마를 피한다. 슬로우 모션을 보니 매트릭스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오뚝이는 기가 막히게도 세 번의 오함마 공격을 정말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물론 혼자의 힘으로 말이다.
“아놔! 작업의 정점이라는 대한민국 군인, 그것도 해병 오함마가 세 번이나 빗나가?”
다스는 결국 눈을 부라리며 정확도를 위해 이번에는 짧게 오함마를 잡았다.
“어디 이번에도 빗나가나 한번 보자. 우랏차!”
이번은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 정확한 거리와 힘을 가늠하며 다시 한 번 오함마질을 했다. 파공성을 가르며 내리찍어 오는 오함마에 당연한 듯 오뚝이도 반응을 하더니 일정 지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옆으로 픽 누워서 옆으로 조금이나마 이동을 시도한다.
“…….”
“…….”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땅을 찍는 파열음이 들려오지 않았고 다스와 오뚝이의 기묘한 침묵만이 이어졌다.
다스가 오함마로 신나게 내려치려는 순간 오뚝이는 당연히 사력을 다해 옆으로 굴렀을 것이다. 그럼 다스의 오함마는?
어떻게 된 일일까?
자, 지금 다스와 오뚝이의 장면을 살펴보자.
옆으로 바짝 누워 부들부들 떠는 오뚝이, 그리고 그 약간 옆의 안착 지점의 허공에서 떡하니 멈추어 선 오함마, 그리고 네놈이 그럼 그렇지 하며 씨익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다스의 모습.
“딱 걸렸네. 그래 또 아닌 듯 헛지랄을 해 보시지?”
만약 오뚝이에게 얼굴이 있었다면 지금 다스를 보며 아마도 어색하게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서지면 끝이라는 것을 잘 아는 마왕 테라핌의 생존 본능, 정말 마왕 체면이 말이 아니다.
* * *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그 경비병이 검은 보자기를 마차에 대충 던져 놓는 것을 끝까지 확인을 했다.
“이럴 수가. 사라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온 마차를 다 뒤지고 혹시나 싶어 지나온 길까지 다 확인해 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분명 마지막에 마차에 올려지는 것을 확인을 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건 이해를 넘어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날을 위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찾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라. 우리 수백 년의 고행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테라핌 님의 봉인 마구를 찾아야 한다.”
결국 그들은 이 밤이 다 새도록 몬타나 시티에서 이동한 경로를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 물론 헛수고다.
* * *
다스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오뚝이를 보고 있다.
“야. 움직여 봐.”
하지만 오뚝이는 묵묵부답이다.
“내가 한 번 더 물었을 때 안 움직이면 그대로 조각조각 박살을 내서 톱밥으로 만들어 버린다.”
남들이 보면 웬 미친놈이 밤에 목각 오뚝이를 세워 놓고 대화를 한다고 하겠지만 이 오뚝이는 분명 보통 오뚝이가 아니다.
“자. 이번이 마지막이다. 한번 움직여 봐.”
그제야 오뚝이는 부르르 떨더니, 까딱거리는 반응을 보여 준다. 그에 다스는 말도 알아듣고 혼자 움직이는 오뚝이가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펴본다.
“자, 그럼 이번엔 왼쪽.”
오뚝이는 당연히 왼쪽으로 한 번 기우뚱한다.
“오른쪽, 앞으로, 뒤로, 다시 오른쪽.”
다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오뚝이 속에 담긴 마왕 테라핌의 심정은 지금 어떠할까?
“자, 내가 묻는 말에 정확히 대답을 한다. 맞으면 오른쪽 아니면 왼쪽. 알겠지?”
알겠다는 듯 오뚝이는 오른쪽을 까딱거린다.
“너 힘 좀 있냐?”
오른쪽.
“세상을 휘저을 만큼 되냐?”
오른쪽.
“오오. 그래? 그러면 나도 너를 통해 그만큼 강해질 수 있냐?”
순간 오뚝이는 고민을 한다. 분명 왼쪽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이 기분 나쁜 놈의 말투로 보아하니 왼쪽으로 움직였다가는 이 자리에서 박살이 날 것만 같았다.
“이 새끼가 고민하네. 그냥 오함마로 팍!”
오른쪽! 오른쪽! 오른쪽!
얼마나 놀랬는지 급하게 움직인다. 아마 마왕 테라핌은 자신을 이곳에 봉인한, 마왕보다 더 더러운 천하의 나쁜 새끼에게 오만 욕지거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좋아. 그럼 그 방법을 나에게 말해 봐.”
“…….”
테라핌은 이놈 완전 또라이가 틀림이 없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무슨 재주로 말을 한단 말인가. 테라핌 결사단의 그 늙은이라면 교감이 강해 약화된 봉인의 힘으로 약간의 대화 시도가 가능하겠지만 이 또라이와는 교감은커녕 적대감만 가득하다.
“아! 미안. 질문이 잘못 되었네. 넌 말도 못하는 찌질이 목각 오뚝이였지?”
순간 마왕에서 찌질이가 되어 버린 오뚝이가 부르르 떨린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나에게 지금 당장 그 힘을 줄 수 있냐? 참고로 난 정직한 놈이라서 거짓말하는 걸 매우 싫어해. 만약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이 나면 넌 그대로 톱밥으로 먹여 버린다.”
오뚝이는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결국 왼쪽으로 까딱거린다. 그에 다스는 조금 안타까운 얼굴이었지만 예상외로 무덤덤하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너 거기 속에 있는 거는 맞아?”
오른쪽.
“그럼 봉인된 거야?”
오른쪽.
“이야, 봉인 정도면 대단한 분이시겠네.”
당연히 크게 오른쪽.
“우와. 그럼 이 세상에 널 당해 낼 자는 없겠네.”
당연히 또 크게 오른쪽.
“그럼 봉인 풀리면 너 괴롭힌 나 같은 놈은 그냥 죽여 버리겠네. 아주 간단히 말이야.”
기분 좋게 아주 크게 오른…….
오른쪽으로 한 번 크게 넘어갔다가 중간에서 멈칫한다. 하지만 다스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늦은 듯하다.
“그래. 그랬구나. 이 더러운 세상에 외롭게 버려진, 다른 놈들과 다르게 힘없는 나 같은 엑스트라는 그냥 죽여 버리겠구나. 끽하는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말이야.”
유도 심문에 제대로 걸려든 테라핌 마왕의 오뚝이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듯 슬쩍슬쩍 앞, 뒤로 까딱거렸다.
“뭐 괜찮아. 지금 너는 그 속에 있으니. 차차 우리는 대화를 통해 풀어 나가면 되잖아. 그렇지.”
그의 말에 무조건 동의를 하듯 오른쪽으로 마구 까딱거린다. 그 모습에 다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더니 천천히 입을 뗀다.
“그런데 어쩌지? 난 원래가 천성적으로 말이야. 고배당은 좋아하지만 고위험은 별로 안 좋아해. 얇아도 길게 살자는 게 내 인생관이거든.”
오뚝이는 갑자기 불길한 기운이 감돌자 움직임의 침묵을 지킨다. 다스는 그런 오뚝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만져 보기까지 한다.
“흠, 팔아도 돈은 안 될 것 같고. 괜히 팔았다가 튀어나오면 복수한답시고 날 잡아먹으려 할 것 같구. 어떻게 하지?”
절대 아니라는 듯 오뚝이는 왼쪽으로 심하게 까딱거린다.
“그렇지? 절대 넌 안 그럴 거지?”
당연한 것 아니겠냐는 듯이 오른쪽으로 까딱거리려는 순간 다스가 벌떡 일어서더니 그대로 오함마로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오뚝이를 찍어 버렸다.
콰직!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