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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타나의 경비병 1(24화)
8장 기회를 잡았을 때 쪽쪽 빨아먹어야 한다(2)
“어떻게 할 거야?”
거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으나 150골드라는 달콤한 언어 마술의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고배당에 따른 리스크가 얼마가 될지부터 계산을 한다.
‘하루 잠시 그곳으로 간다. 설령 들킨다고 해도 날 처벌할 근거는 없다. 상당히 격식 있는 집 같은데 옛날도 아니고 겨우 그딴 일로 암살 혹은 날 죽이거나 할 그런 미친 짓을 할 일은 절대 없다. 이것이 시켰으니 들켜도 난 솔직히 말하고 그냥 쫓겨 나오듯 나오면 끝나는 거다. 그렇다면 위험은 단 하나.’
그 위험성만 뒤집을 수 있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결국 다스는 결정을 내렸는지 슬그머니 뒤를 돌아본다.
“결정했어?”
이게 최후의 수단인 세실리아도 조금은 긴장한 표정이다.
“한 가지 받고 하프 150골드에 쿼터 50골드 추가하고 선불, 콜?”
150골드의 쿼터는 37.5골드이지만 지금 그런 사소한 계산 따위를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이제 와서 별 의미가 없어져 버린 그 세 가지도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그냥 돈만 신경 쓰면 되는 거다. 그것도 선불로 말이다.
“음.”
간단히 총합 200골드를 선불로 내놓으면 말대로 하겠다는 의미다. 솔직히 세실리아도 받는 봉급이 2골드인데 있는 150골드를 제외하고도 50골드면 정말 장난 아닌 돈이다. 물론 없지는 않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진 못했다.
“쫄리면 죽던가.”
이미 입장이 바뀌어 버린 다스는 의기양양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세실리아는 주먹을 푸르르 떨며 입을 살짝 뗀다.
“좋…… 좋아. 대신 내일 오후야.”
“콜! 돈은 내일 아침 당장 선불로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뭐 주의사항 정도는 들어 주도록 하지.”
“다만 한 가지 계약을 해야겠어. 선불로 주되 그날 하루는 무조건 들키지 않고 버틴다는 전제하에서야.”
“음.”
이건 좀 고민이 된다. 이건 안 들키면 대박 들키면 본전이 아닌가. 끝까지 버텨 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게 마지막이라는 세실리아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 이상의 협상은 힘들어 보인다.
그래도 하루 풀도 아니고 그곳에서 겨우 몇 시간 정도는 충분히 들키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좋아. 콜!”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저 200골드면 지나가는 좀 생긴 아무 남자나, 아니 좀 가난한 몇몇 기사만 붙잡고 하소연해도 충분히 들어 주지 않았을까? 심지어 다스도 그 생각을 얼핏 했는데.
아무리 똑똑해도 15세밖에 안 된 아이의 생존에 대한 응용력은 별수 없나 보다. 다른 건 몰라도 다스의 생존 응용력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
* * *
노인은 소녀를 다시 자리에 앉히며 인자한 미소를 보인다.
“그럼 성녀님, 메르바 님의 전언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요?”
소녀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선택받은 5인들이 어떤 이들인지 기억하시지요?”
“네. 물론이에요. 숲의 가호를 받은 자매와 대지의 굳건함을 간직한 전사, 그리고 강철의 신념을 지닌 기사, 자연의 조화를 이룬 마법사, 마지막으로 고귀한 피를 지닌 사도라고 들었어요.”
“네. 그리고 성스러운 피를 이어받은 성녀까지 이렇게 6인이 되는 거지요.”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메르바의 선택받은 5인과 메르바의 성녀에 관련된 내용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그만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구전 내용을 한번 기억해 볼까요?”
소녀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작게 중얼거린다.
“숲의 가호가 그들을 보호하나니, 대지의 드셈이 방패가 되어 줄지어다. 자연의 조화 속에 강철의 신념이 무기가 되어 고귀한 자의 피 속에서 그의 발자국을 맞이하리라.”
노인은 잘 기억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예정된 파멸 속에 슬픔과 분노가 그들의 신념을 잡아 가둘 때 존재할 수 없는 칼날이 그들의 심장을 관통하고 말리라. 이게 제가 알고 있는 전부예요.”
“성녀님은 충분히 잘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궁금함을 얼굴로 잔뜩 표현한 소녀의 모습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예정된 파멸을 가져올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메르바 님의 전언에 따르면 우리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항상 우리 주위에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군요.”
예언이란 본시 추상적인 표현이 많았기에 이 소녀가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물론 그 추상적인 내용을 연구하는 학자들조차 쉽게 풀지 못할 수수께끼임은 분명하다.
“마왕 같은 존재인가요?”
소녀로서는 당연히 세상을 파멸시키는 존재이니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마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건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성녀님이 아셔야 할 것은 마왕, 혹은 마족이라고 부르는 사악한 존재들도 결국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창조주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존재들은 나쁜 존재들이잖아요.”
주름진 노인의 손이 소녀의 머리로 살짝 올라간다.
“나쁜 존재들이라는 관념은 인간이 만들어 냈습니다. 결국 그 기준점은 인간이 될 수밖에 없기에 그들은 인간들의 입장에서 사악한 존재가 되는 것이겠지요.”
인간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모호한 개념까지 들어가자 성녀의 고민은 더 깊어지는 듯하다.
“인간의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질서는 모두에게 평등합니다. 그 질서를 깨트리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겠지요. 성녀님께서는 그들 또한 이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체이며 그것은 신이라는 존재들도 마찬가지라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노인은 도무지 성직자로서는 내뱉을 수 없는 이단적인 말을 그것도 성녀에게 해 준다. 신을 거부하는 자가 아닌 이상 결코 이런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노인은 아무 거리낌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성녀에게 전해 주고 있다.
“히잉, 너무 어려워요.”
“성녀님. 어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면 되는 것입니다. 순리를 따라가다 보면 답이 나오는 법입니다. 때가 오면 모든 것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정말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나요?”
소녀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은 매우 성스러웠다. 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듯한 기분마저 들게 만들었다.
“물론입니다. 성녀님은 그저 순리에 따라 운명에 따라 움직이시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은 시간이 말해 줄 겁니다. 저희 같은 창조주님의 피조물들은 그저 그 시간 속에 녹아들면 되는 것이지요.”
그 답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시간이 말해 줄 것이라는 노인의 말에 소녀는 또랑또랑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그럼 저희들은 기다리면 되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입니다. 설령 세상의 질서를 깨는 존재라도 말이죠. 그리고 그런 시간을, 질서를 깨뜨리는 존재는 누릴 자격이 없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노인은 책을 조용히 덮는다.
* * *
짙은 안개가 가득한 고요의 대지, 저 멀리 구불거리는 절벽 길을 따라 암갈색을 띠는 거대한 성이 하나 보인다.
“저기인가, 세상에 파멸을 안겨 줄 절대 마왕이 살고 있다는 그곳인가.”
헐렁한 검은 망토 등 뒤에 삐져나온 하나의 검, 바람결에 날리는 치렁치렁한 검은 긴 머리를 가진 남자의 음성은 차분했다. 그의 뒤로는 엄청난 수의 군집 무리가 각자의 무기를 부여잡은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하지만 이곳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요.”
군집 무리에서 5명이 조심스럽게 걸어 나온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그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고개를 돌린다. 뒤에는 정말 아름다운 다섯 명의 여인이 신뢰감 가득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직접 당신들에게 밝은 내일을 보여 주겠소.”
남자는 몸을 돌려 슬며시 한 사람씩 끌어안는다. 그러자 그의 품에 안긴 여인마다 그에게 달콤한 목소리로 한마디씩 속삭인다.
“숲의 가호가 영웅과 함께하기를.”
아마 엘프인 듯하다.
“제국의 영광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왕족 혹은 귀족인 듯하다.
“신의 신념이 당신을 지켜줄 거예요.”
성녀가 아닐까?
“그 어떤 마법도 당신을 해할 수 없을 거예요.”
마법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마지막 붉은 머리를 빛내고 있는 여인이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최후의 드래곤 로드인 마리나의 생명은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
마지막으로 그 여인과 깊은 포옹을 한 남자는 굳은 의지의 눈빛으로 몸을 돌린다.
“설마 그랜드 마스터인 내가 저 따위 마왕에게 당하겠소? 그럼 나의 사랑스러운 여인들이여,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점심이 끝나기 전에 돌아오겠소. 하하하.”
호탕한 미소를 지으며 구불거리는 절벽 길로 한 걸음 내딛자 군집해 있던 이들의 함성이 들려온다.
“와아아아.”
그는 절벽 길을 향해 걸어가며 슬쩍 주먹을 들어 화답한다. 그가 떠나가자 사랑스러운, 혹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역사에 다시없을 영웅의 뒷모습을 배웅해 준다.
“자. 이제 당신들을 위해 악당을 처리하러 가 볼까?”
남자, 아니 영웅은 자신감의 발로인 듯 낭떠러지인 구불구불한 절벽 길을 홀로 당당하게 걸어간다.
“날 환영해 주는 모양이군.”
점차 안개가 심하게 끼는 것으로 봐서 인위적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웅웅거리는 귀에 거슬리는 음성이 들려온다.
[선택받은 영웅이여, 마왕성 지하의 권좌에서 기다리겠다. 오라, 너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
“마왕 주제에 자신 있다 이건가. 좋아. 그럼 가 보실까? 흐아압.”
영웅은 힘찬 기합성과 함께 땅을 박차고 올랐고 빠른 속도로 마왕성까지 달려 나갔다.
무시무시한 함정과 매복한 마물들이 영웅을 습격했지만 이미 그랜드 마스터라는 엄청난 무력을 지닌 영웅에게는 소용없었다. 영웅은 손쉽게 그것들을 파쇄 혹은 처리하며 빠르게 마왕성의 지하로 계속해서 내려간다.
얼마나 깊이 내려갔을까? 눈앞에 거대한 악마 형상의 문이 보인다.
“여기군.”
영웅은 망설임 없이 검을 들어 문을 부숴 버렸다.
“사악한 마왕, 너를 단죄하기 위해 내가 왔다. 나와 칼을 맞대어 보자.”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의 영웅이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대전의 끝에 거대한 의자가 하나 보인다. 그런데 그 의자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이 드넓은 곳에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망을 간 거냐? 비겁하구나. 나와라.”
영웅이 외쳐 보았지만 묵묵부답, 영웅은 혹시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마왕의 의자로 보이는 검은 빛의 지옥도가 새겨진 그곳으로 다가간다.
“음.”
점차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의자 위에 흰 종이 한 장이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도대체 무슨 수작인지 알 수 없었던 영웅은 의자 앞까지 다가왔다.
“뭐지.”
종이를 들어 본다. 함정이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랜드 마스터가 된 영웅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스윽.
앞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독이라도 뿌렸나 싶었지만 그에게 독이 통할 리가 없었다. 영웅은 습관적으로 종이의 뒷면을 돌려 본다. 그리고 그곳에는 커다란 글귀가 적혀 있다.
GAME OVER
“응?”
바로 그 순간이었다.
덜컹.
갑작스럽게 땅이 푹 꺼지며 영웅이 추락하기 시작한다. 명백한 함정이다.
하지만 그랜드 마스터에게 이 따위 조잡한 함정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며 금방 코웃음을 치며 허공을 박차고 오른다. 그리고 검을 들어 막혀 버린 입구인 위를 그대로 갈라 버린다.
“감히 이런 잡수를 쓰다니.”
이딴 술수는 통하지 않는다는 듯 둘로 쪼개진 천장을 향해 솟아오르려는 순간, 갑자기 굉음이 울리며 마왕성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르르.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