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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6화)
2장. 시작되는 비극(3)


축축한 무언가가 얼굴을 간질였다.
이것은 어릴 적 어머니가 손수 입에 넣어 주시던 달콤한 과일일까?
입술에 닿는 것을 보니 맞는 듯도 싶었다.
아그작!
입을 벌려 급하게 과일을 물어 씹었다.
살짝 풋내가 나는 것이, 성질 급한 농민이 서둘러 수확한 것인가?
응?
그런데 과일이 이처럼 꿈틀거렸던가?
아직 입술에 묻어 있는 나머지가 요동치듯 몸을 비트는 것이 느껴졌다.

백문이 눈을 떴다.
그러자 동굴 입구에서 쏟아지는 햇살로 인해 콧잔등에 절로 주름이 잡혔다.
“헉!”
입술을 닦아내던 백문은 자신의 손에 달라붙어 떨어지는 것이 작은 지네라는 것을 알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역겨움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끄윽, 켁!”
몇 번 신물을 쏟아 내던 백문은 그제야 주변을 살폈다.
주인이 없는 동굴.
추위에 지치고 잠에 못 이겨 몽롱한 정신을 한 채로 기어 들어온 곳.
갑자기 등골에서 찌릿한 무언가가 올라와 가슴까지 차갑게 식혔다.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그런 다급한 처지를 잊은 채 이런 위험한 곳에서 잠들어 있었다니.
이미 수색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관병들이 이곳까지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동굴을 발견한다면 자신의 목숨도 여기까지일 터.
백문은 떨리는 발을 간신히 놀려 입구까지 걸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귀를 기울여 밖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다행이다. 아무도 없어서.’
백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체력이 상당히 고갈되기는 했으나 깊은 잠을 통해 어느 정도 회복했다.
태양이 하늘에 걸린 지금 최대한 어두운 곳으로 몸을 숨겨야 하거늘, 아직 그 정도까지 생각할 만큼 백문은 냉정하지 못했다.
그저 고을이 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방향으로 뛰고 또 뛸 뿐.
푸드득!
놀란 백문이 달림을 멈췄다.
정적 속에서 백문은 내쉬는 숨마저 참고 두려운 눈으로 앞을 주시했다.
새들이 저토록 급히 날아올랐다는 것은 분명 인간이 숲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리라.
백문이 아주 조용한 움직임으로 길옆, 풀이 무성한 나무 뒤편으로 숨었다.
누군가가 지나가더라도 자신이 있는 것을 눈치채지 않기를 기원하며.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상대도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것을 보니 뭔가를 느꼈음이 틀림없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백문은 더욱 몸을 움츠렸다.
터벅터벅.
상대의 발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자신이 숨어 있는 나무 근처에서 멈췄다.
설마, 발견되었나.
“문아, 나야. 동표 형이야. 거기, 문이 맞지?”
동표.
어제 사악한 얼굴로 자신을 붙잡던 인간.
하지만 저 다정스러운 목소리는 뭘까?
그리고 왜 저 인간이 이곳에?
“걱정하지 마. 아무도 없어, 나밖에. 나와도 돼.”
진실로 백문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 안타까운 음성이었다.
“어제는 미안했다. 나도, 장구 아저씨도 어쩔 수 없었어. 연기를 한 거야. 네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다행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동표가 주위를 슥슥 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얼어붙은 백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빨리 나와. 관병들 전부 반대편 산을 뒤지고 있어. 언제 이쪽으로 올지 몰라. 부탁이다. 날 믿어.”
그런 것이었나?
순간, 백문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늘 학문을 가르치려 했으나 타고난 성품이 게을러 결국 배움을 포기했던 동표.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인해 신세를 지기는 했으나 조금씩 갚아 나가며 아버지께 항상 존경의 눈길을 보내던 순박한 사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백문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형.”
“오! 그래, 문아. 거기 있었구나.”
살짝 물기가 섞인 동표의 음성을 접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맺혔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해.”
백문의 손을 잡아끌며 자신이 왔던 길로 급히 인도하는 동표.
탁탁탁탁!
두 사람이 급하게 달리는 소리만이 어둡게 우거진 숲에 가만히 울려 퍼졌다.

“헉헉!”
한참을 달리다 겨우 숲을 벗어난 후, 두 사람은 잠시 숨을 돌렸다.
“헉헉…… 형, 어찌 된 일인가요?”
그제야 백문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
“누군가 관에 고한 모양이다. 처사 어른께서 사교를 퍼트리고 있다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동표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흉작이 심해 인심이 술렁이고 있었거든. 관에서 이번에 단단히 작정한 모양이래.”
어리긴 해도 백문은 총명했다.
그렇기에 동표의 말을 듣고 그간의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왜 저희 집안을요?”
늘 평화로웠던 고을이다.
주변 여러 고을들도 쌀을 빌어 갈 정도로 흉년의 영향에서 벗어날 정도였으니.
“낸들 아나. 어느 쓰레기 같은 놈인지, 네 아버지께 원한을 가진 인간이 틀림없어.”
숨을 돌리고 호흡이 편안해지자 두 사람은 슬슬 걸음을 옮겼다.
“형, 형도 알잖아요. 우리가, 아버지가 결코 남에게 해를 주는 분이 아니란 걸.”
“당연하지. 세상에 처사 어른 같은 분들만 계시다면 얼마나 좋겠냐.”
그러고 보니 동표도 예전에 아버지께 신의 사랑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품으로는 도저히 신을 받아들이지 못해 역시나 교리를 깨우칠 수 없었고 비밀을 엄수한다는 굳은 약속을 했다.
고을 사람들의 일부만이 신을 받아들여 신교의 교인이 되었고,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교인들 외에는 동표가 유일했다.
“다른 분들도 아버지와 함께 형옥에 수감되셨나요?”
“응. 정말 걱정이다. 나라의 법이 워낙 엄하다고 하니.”
문득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투가 조금 거슬렸다.
하늘 정중앙에 떠 내려쬐는 태양의 존재에 백문은 눈이 부신 듯 손을 들어 빛을 막았다.
요즘 들어 정말로 짜증나는 햇빛.
길게 난 흙길에 접어들자 귓구멍을 귀찮게 하던 벌레의 울음소리도 완전히 멀어졌다.
“문아.”
“예?”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처사 어른이 아니었다면 나와 우리 가족들은 굶어 죽었을지도 몰라.”
그건 형네 식구들이 다 게을러서 그런 거고요.
온가족이 일하기 싫어하고 술만 퍼마셨으니.
“벌써 네 집안에 빚진 쌀이 이 년 치가 다 되어 가네. 에휴.”
“신경 쓰지 마요.”
아버지도, 나도 곧 세상에서 지워질 테니까.
“아니다. 사람이 빚을 지고 살면 그게 사람이냐? 빚은 어떻게든 치워야 되는 거야, 어떻게든.”
“이제 필요 없다니까요.”
치워야 된다고?
무언가 계속 백문을 거슬리게 하는 동표였다.
“그나저나 어떤 망종이 네 아버지와 마을분들을 관에 고발했을까? 넌 궁금하지 않니?”
“…….”
동표가 어딘가를 응시하며 물었다.
자신에게 묻고 있으나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이질적인 모습에 백문은 살짝 한기가 돋았다.
“어쩌겠어요. 그게 신의 뜻이라면.”
동표의 앞에서 자연스럽게 신을 언급하는 백문.
그 순간, 동표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스쳤다.
“아마도 천벌을 받겠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면 말이야.”
은혜를 원수로?
설마 고발한 자가 아버지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란 말인가.
“근데 문아, 세상에 천벌이란 없어. 다 만들어 낸 허상이야. 그런 것이 있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거지같이 살아갈까?”
타고난 게으름. 미래를 바라보지 않는 근시안.

나태(懶怠).

신께서 피하라 경고하신 죄악 중 하나.
지금 당신들은 천벌을 받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의 나태를 모른 채 세상을 탓하고 있는 죄로 인해.
“아휴, 잠시만 쉬자.”
백문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묵직한 바윗덩어리에 몸을 올려 버리는 동표였다.
“형, 서둘러야 하지 않아요? 언제 관병들이 절 잡아갈지 모르는데.”
불안한 음성으로 백문이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설마 벌써 여기까지 왔을라구. 내가 네 소식 듣고 오면서 다 봐 뒀어. 안전해.”
장담하는 동표를 바라보며 백문은 조금은 안심하는 마음이 들었다.
“형, 앞으로 전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요?”
“어쩌긴. 멀리 도망쳐서 잘 살아야지.”
쉽게 말하는 동표가 얄미웠다.
“제 아버지께서 지닌 힘이라면 형옥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실 수 있을 텐데…….”
“건 또 뭔 소리냐? 처사 어른께서 무슨 힘이 있다고.”
아차, 이들은 아버지의 무공을 알지 못하지.
이제 겨우 열 살인 백문이 이런 상황에서도 울부짖지 않고 나름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아버지의 무공 때문이다.
그냥 마주치기만 해도 오줌을 지리게 될 무시무시한 악요조차도 아버지를 이길 수 없었으니, 아버지는 어쩌면 벌써 형옥을 뚫고 자신을 찾으러 나오셨을지도 모른다.
순교?
믿음만으로 생을 버릴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아직 백문에게는 없기 때문일까.
어느새 백문은 아버지와 자신의 감정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문아, 너 이상한 거 못 느꼈냐?”
“뭘요?”
“나 말이다.”
지금 동표는 무얼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그것참 묘하지 않니?”
“무슨…….”
“네 소식이란 거. 우리가 살던 고을이랑 여기랑 상당히 멀거든? 그런데 내가 어찌 알고 떡하니 나타났는지 말이야.”
백문은 발바닥에서 수억 마리의 개미가 슬금슬금 기어 올라오는 듯한 기묘한 공포감을 느꼈다.
차분하게 웃으며 말하는 동표의 얼굴.
그것은 방금 전까지 보여 주던 평소 순박했던 동표의 모습이 아니었다.
“따라왔어, 뒤에서 몰래.”
“왜요?”
분명 자신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왔다 했을 텐데…….
“왜긴. 너랑 백 어른께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 때문이지.”
이를 드러내는 동표를 보는 백문의 시선이 굳어 갔다.
“나도 사람이라 잠깐 잠든 사이에 네가 관병을 눕히고 사라졌더구나. 어찌나 황당하던지.”
그제야 백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했다.
돌무더기만 군데군데 자리한 평지.
동표가 앉아 있는 자리 뒤편으로는 낭떠러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걸어왔던 길만이 이곳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
소름이 끼치다 못해 눈물마저 고였다.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어. 너와 네 아버지는 특별한 사람들이란 걸. 여느 인간들과는 분명한 차별점이 있음을 말이다.”
동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문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무식하고 게으르다고 하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이치마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뭐, 간단하잖아? 가진 능력으로 못 오른다면 올라간 사람을 끌어내리는 정도는.”
저 표정. 어제 그 사악했던 모습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이 동표에게 속았음을 깨닫는 백문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장구, 그 똥 같은 인간은 그저 동전 몇 닢에 히히거리는 것으로 끝났지만 나는 달라. 방금 말했지? 너와 네 아버지의 그 특별함.”
동표가 손을 뻗어 백문의 멱살을 쥐었다.
강한 힘에 훅 끌려가는 백문.
“그래서 혹시나 기회를 보았어. 너희의 특별한 무언가로 내게 기회가 오지 않을까. 역시나 너는 무척이나 나를 만족스럽게 해 주더구나.”
동표의 누런 이가 번들거리며 침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잘 도망쳐 주었다, 내 출세를 위해서.”
“끄윽.”
분하고 원통하여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참으려고 했던 눈물이 드디어 볼을 타고 흘렀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동표가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마도 자신을 찾는 관병들에게 어떤 신호를 주었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