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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백문 1(11화)
3장. 순교(殉敎)(5)
“문아, 나와 함께 가자.”
마을에서 피어오른 연기를 바라보던 백문을 향해 악요가 말했다.
“연가(淵家). 이 의숙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곳이란다.”
“위대하신 조정의 장군가(將軍家)로군요.”
온갖 슬픔을 털어 낸 듯 백문의 음성은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달라. 형님, 아니, 연 어른은 네가 생각하는 관리들과 질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같습니다.
“연가라면 네게 힘을 줄 수 있다. 그곳에서 신분을 감추고 연 어른을 모신다면 머지않아 네가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을 게야.”
“의숙이 가진, 그런 능력 말씀입니까?”
“그렇다.”
악요의 능력.
순간적으로 공간을 이동해 날카로운 무언가로 인간을 무 썰 듯 도륙해 버리는 가공할 무력.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그때, 백문의 머릿속으로 마지막 실신 때 일어났던 기이한 경험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따라 이대로 죽어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기에 검고 칙칙한 상념 속에서 그대로 묻히고 싶어 했던 자신.
그런 자신을 비웃듯 속삭이던 청년의 목소리.
온전히 기억나지는 않으나 백문은 분명히 들었다.
‘만들어 줄까? 그 의미.’
그 이끌림에 자신은 깨어났고,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얻은 것 같았다.
그리고 청년의 잔상은 악요의 제안을 거절하라 말하고 있었다.
“의숙. 의숙께서 주신 말씀은 정말로 기쁘지만, 따를 수 없습니다.”
백문의 말이 의외였는가.
악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 머리와 가슴이 다른 길을 가라고 전해 옵니다.”
“형극(荊棘)의 길이다.”
“압니다. 이 상황에서 제게 남은 것이 무엇인지. 조그맣고 힘없는 몸뿐이죠.”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쓰고 살아야 할 가면도.
“해서 보잘것없는 저이기에 의숙께 몇 가지의 작은 부탁을 드릴까 합니다.”
“휴우…… 그래, 말해 보아라.”
백문이 조용히 소매를 걷었다.
솜털이 보송보송 나 있는 작은 팔뚝이 햇빛을 받아 허옇게 드러났다.
“아버지는 의숙을 정말로 좋아했습니다. 삶의 지기를 만난 것과 같이요. 의숙께서 왔다 가시면 다시 오실 때까지 어린아이처럼 기다림에 들떠 계셨죠.”
“…….”
“오죽하셨으면 관의 인물인 의숙께 신교를 전하셨을까요. 그만큼 믿고 아끼며 사랑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수십 년을 같은 고을에 머무르면서도 교를 전파하는 일을 결코 쉽게 생각하지 않던 아버지다.
결국 그마저도 작은 믿음에 배신당하셨지만.
“저 역시 그래요. 누구보다 의숙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제게 남은 마지막 기둥이기도 하고요. 의숙께선 저의 이런 믿음, 영원히 지켜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당연하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한다 해도 제 자신에게 확신이 생기지 않아요.”
순간, 백문의 눈에 독한 기운이 넘쳤다.
마주하고 있는 악요의 낯빛이 변할 정도로.
백문은 훤히 드러난 자신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표현하기조차 벅찰 정도로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콱!
백문이 팔뚝을 물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악요의 몸이 움찔거렸으나 저지하지는 않았다.
으드드득!
살이 씹히며 피부가 뜯어졌다.
조금씩 배어나던 피가 순식간에 콸콸 쏟아져 땅을 적셨다.
꿀떡꿀떡.
넘치는 피를 머금고 그대로 삼키는 백문.
살이 터진 고통을 초월한 듯, 열 살 아이의 얼굴에는 찡그림 하나 없었다.
“피의 맹세. 신의 은총을 받은 모든 이들에게 절대적인 약속의 의미라지요?”
백문의 입가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와 누런 근육 조각을 말없이 바라보던 악요의 얼굴에도 진지함이 서렸다.
그리고 백문과 마찬가지로 소매를 걷어 팔뚝을 입으로 가져갔다.
* * *
“꼭 들러야겠나?”
“예.”
천을 찢어 팔뚝에 친친 동여맨 두 사람이 길을 걷고 있었다.
그 방향은 백문의 집.
“반드시 챙겨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죽간.
그 속에 담긴 고대의 비밀들이 왠지 자신의 앞날에 큰 힘이 되어 줄 것만 같았다.
“집 전체가 이미 불타 없어졌을 수도 있다. 그만큼 조정의 행사는 철저하지.”
“보셨잖아요. 저들이 벌이고 있는 피의 축제를.”
아마도 꽤 오랫동안은 인육을 즐기느라 희생당한 이들의 거처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찌릿!
순간, 백문은 악요의 칼 같은 살기를 느꼈다.
돌아보니 악요의 얼굴에는 은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왜요?”
“누군가 있다. 무인(武人)은 아니야. 좀도둑이군.”
악요의 말에 백문도 화가 치밀었다.
청빈한 삶을 살았기에 딱히 값비싼 재물은 없으나, 그래도 보유하고 있는 서적들의 양이 상당했다.
으득!
백문의 작은 입에서 독한 마찰음이 일어났다.
“젠장, 역시 돈 될 것들은 뵈지를 않는구먼.”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거지같이 살면서 무슨 처사니 나발이니 했을꼬.”
딱 봐도 비열하게 생긴 사내가 앞선 자의 말을 받았다.
“이보게, 장구. 진짜 거기 암것도 읍나? 품에 뭐라도 숨긴 거 아녀?”
장구.
동표와 함께 백문을 관에 넘긴 인물.
이자 역시 아버지의 은혜를 입은 자였다.
“거, 백 마귀 귀신이라도 나타나기 전에 어여 저 책들이나 챙기세. 보니까 오래된 냄새가 풀풀 나는 것이, 장에 내다 팔면 술값은 나올 듯하이.”
인력으로 끄는 작은 수레를 창고 앞에 대놓고 분주히 서책을 실어 나르는 두 도둑.
그들은 일에 몰두한 나머지 악요와 백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턱!
뒷걸음질로 창고에서 나오던 자가 무언가에 걸려 멈추었다.
“아, 뭐야! 어느 개 쌍눔이 또 여길 털러 온 겨? 억!”
“힉!”
따라 나오려던 장구가 놀라 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인간이라 불릴 자격도 없구나.”
물이 끓어오르는 듯 조용하지만 소름 끼치는 악요의 음성에 장구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너, 넌? 백문! 문이가 아니냐!”
장구는 그제야 악요의 옆에 서서 불길을 뿜어낼 듯 사납게 쳐다보는 백문을 인식했다.
“끝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딱히 특정할 수 없는 종족의 행태.
아버지의 가르침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던 인간의 행동들.
이런 추악함들이 사실은 인간 본연의 모습은 아닐까?
“관병에게 끌려가 다른 고을에서 처형당한 줄 알았거늘, 그 명이 질기기는 하구나.”
악요를 슬쩍 바라본 장구가 이내 입가에 교활한 웃음을 매달며 입을 열었다.
“어찌 탈출했는지는 몰라도 사지로 기어 들어온 용기는 칭찬해 주마.”
악요의 입에서 픽,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이래 봬도 왕년에 거란 잡놈들 수십의 목을 벤 용사였다. 오늘 이 손에 개떡이 될 줄 알아라!”
허풍이 섞인 말투와 함께 장구는 발목에 숨겨 두었던 작은 칼을 꺼냈다.
백문에게 장구의 이런 모습은 생소하기만 했다.
항상 남에게 굽실거리며 도움만 받던 인간이거늘.
“거란의 잡놈이라…….”
그 순간, 악요의 미소가 진해졌다.
거란을 언급한 장구의 말에 무언가 심사가 단단히 꼬인 듯 보였다.
“저 길쭉한 놈을 믿고 왔니? 거, 보기만 해도 바람에 훌훌 날려가게 생겼구먼.”
장구는 칼날을 슥슥 닦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다른 한 사내도 장구의 모습에 용기가 생긴 듯 험악한 얼굴을 백문에게 쏘아 냈다.
“의숙.”
“말해라.”
장구와 다른 사내의 거친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던 백문이 악요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확실해졌어요.”
“뭐가 말이냐?”
“인간은…….”
자신에게 속삭이던 청년의 음성.
그 잡히지 않을 것만 같던 속삭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요. 멸망(滅亡)의 정화(淨化).”
악요가 무슨 말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백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입술을 얇게 편 채 웃기만 하는 백문이었다.
“에라이!”
자신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태도를 느껴서일까.
장구의 뒤에 섰던 사내가 몽둥이를 집어 악요에게 휘둘렀다.
“켁!”
장구는 채 눈을 깜박거리지도 못했다.
사내가 몽둥이를 떨어뜨리고 악요에게 머리채를 잡혀 공중으로 들려진 시간 동안에.
“어, 어라! 아, 아파!”
악요가 다른 손으로 사내의 아래턱을 움켜쥐었다.
강하게 잡아당기는 힘에 사내의 살가죽이 점점 늘어났다.
“이놈이!”
그 모습에 장구가 칼을 휘두르며 악요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 걸음도 못 가 보이지 않는 발길질에 걷어차인 듯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넌 문이 거야.”
장구의 생을 백문에게 맡기는 악요.
백문은 그 말에 묘한 흥분을 느꼈다.
“케…… 케엑! 아, 아픕! 사려 주서어!”
징그럽게 늘어난 사내의 얼굴 가죽 아래쪽에서 균열이 생겨났다.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사내를 농락하는 악요의 표정에는 아까와 같은 차가움도, 잠깐 떠올랐다 사라진 미소도 없었다.
쭈아악!
살가죽이 통째로 뜯어짐과 동시에 사내가 고성을 질렀다.
툭 튀어나온 하얀 눈알에는 아직 식지 않은 공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스걱! 스걱!
이어 사내의 팔과 다리가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머리통을 싸고 있던 생가죽 전체가 없어진 상태로 바닥에 떨어져 펄떡거리는 사내.
그 처참한 모습에 침을 게워내던 장구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끼야악! 꺅! 꺄아악!”
강아지를 돌로 찍을 때와 흡사한 소리를 내지르며 퍼덕거리는 핏덩어리.
벌어진 입을 찢을 듯 튀어나온 누런 이가 피에 절어 번들거렸다.
“흐…… 흐억!”
새파랗다 못해 이제는 검게 변한 얼굴로 장구가 덜덜거리며 칼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무, 문아! 내가 잘못했다! 나 좀 살려 다오!”
이 순간, 백문이 또다시 인간의 더러운 본성을 자각했다.
장구를 바라보는 백문의 눈에 더 이상 인간은 없었다.
단지 그 거죽을 뒤집어쓴 한 마리 잡귀만 있을 뿐.